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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⑬] 법보다 공직윤리 잣대 중요하게 여겨 

상피제 어기지 않고도 물러난 김창협... 관직은 ‘천하의 공기(公器)’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최근 교육부는 대학 재정 지원 사업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제고하기 위해 평가위원을 선정할 때 해당 대학과 이해관계가 있는 사람은 배제한다고 밝혔다. 보건복지부도 현지 조사는 반드시 그 지역과 연고가 없는 공무원이 담당하도록 규정을 손질했다. 그러면서 두 부처는 모두 ‘상피제(相避制)’를 언급했다. 상피제란 고려 때 처음 도입돼 조선에서 확대 시행된 것으로 일정 범위 안의 친족은 같은 관청이나 연관 직무에 근무하지 못하도록 한 제도를 말한다.

유교 정신에 부합하는 상피제

상피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운용되었느냐는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고, 또 상피에 해당하더라도 임금의 명령에 의해 묵살되거나 예외로 처리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설명하기란 어렵다. 다만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 이전(吏典)에 따르면 주로 본가의 4촌 이내, 어머니와 아내를 기준으로 2촌 이내는 의정부·의금부·이조·병조·형조·승정원·사간원 등 주요 기관에서 같이 근무할 수 없게 되어 있다. 이조-이방승지, 병조-병방승지와 같이 연관된 직무는 상피해야 하고 같은 도의 관찰사와 고을수령처럼 지휘라인에 있어서는 안 된다. 군부의 경우에는 동일한 관청이 아니더라도 상피가 적용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철저하게 객관적이어야 할 공적 업무가 혈연의 사사로움에 의해 변질될 수 있는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것으로, 인사권자인 임금뿐 아니라 관직에 나서는 선비 입장에서도 반드시 지켜야 할 도리로 여겨졌다. 정치에서의 ‘도덕성’과 ‘공공성’을 중시하는 유교의 정신에 부합하는 제도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처럼 상피가 단순한 규칙이 아닌 공직윤리이자 처세의 원칙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서, 당사자 스스로 법에 규정된 내용보다 더 엄격하게 실천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1687년(숙종13), 훗날 대학자로 이름을 날린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1651~1708)이 올린 대사간 사직상소를 보자(이하 모두 [농암집] 7권에서 인용함). ‘삼가 생각하건대, 나라에서 대각(臺閣, 사헌부와 사간원의 총칭)을 설치한 것은 묘당(廟堂, 의정부)과 서로 견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제껏 묘당에서 옳다고 하는 일을 대각에서는 그르다 하고 묘당에서는 어질다고 하는 사람을 대각에서는 그렇지 않다고 하는 등 피차간에 의견이 달라 극심한 마찰을 빚는 경우가 자주 있었습니다. 더욱이 묘당에 과실에 있으면 오직 대각에서 그것을 지적하고 탄핵할 수 있으니, 조정의 체면을 생각할 때 어찌 묘당에 있는 사람의 자제를 대각에 있게 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래 놓고서 거리낌 없이 가부를 논의해보라고 요구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이치상으로도 옳지 않을 뿐 아니라 행해져서도 안 되는 일입니다.’

당시 의정부를 총괄하는 영의정은 다름 아닌 김창협의 아버지 김수항(金壽恒, 1629~1689)이었다. 아버지가 묘당에 있으니 아들인 자신이 묘당을 견제하고 잘잘못을 비판하는 대사간의 직무를 맡을 수 없다며 상피한 것이다. 이는 단순히 부자 간의 관계가 껄끄러워질까 걱정해서라거나, 대사간의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까 자신이 없어서가 아니다. 부자라는 사적인 혈연관계가 묘당-대각의 공적인 견제관계를 해칠 수 있고, 더욱이 이러한 사례가 한 번 허용되고 나면 비슷한 경우가 계속 이어져 그 폐단이 걷잡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김창협이 체직을 요청한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신은 처음 사헌부의 관원이 되었을 때부터 이와 같은 혐의를 피하고자 사직을 요청하며 그 이유를 구체적으로 진술했었습니다. 하지만 조정에서는 이런 신의 뜻을 깊이 살피지 않았고 그 뒤에도 다시 거듭하여 대각의 관직을 제수하였습니다. 때문에 신도 처음의 입장을 계속 고수할 수만은 없어서 부득이 입을 다문 채한 두 차례 직임을 수행한 바 있습니다. 하온데 요사이 처음으로 [송사(宋史)]를 읽던 중, 원우(元祐, 송나라 철종) 연간에 범조우(范祖禹)가 우정언(右正言)으로 발탁되었으나 장인 여공저가 재상이라는 이유로 사직하고, 장인이 벼슬에 있는 동안에는 간관을 담당하지 않았다는 대목을 보았습니다. 아시다시피 범조우는 단정하고 성실하며 정직한 것으로 이름이 높아, 그 학식과 언론은 당시 대각의 으뜸으로 꼽혔던 인물입니다. 이런 범조우가 단지 여공저의 사위라는 점을 혐의로 여겨 간관에서 물러났으니 옛 사람이 의리를 지킬 때는 구차하지 않았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당시 조정에서도 그의 체직을 허락하고 더 이상 그 직임을 맡기지 않았으니, 이 문제는 비단 한 사람의 사적인 일이 아니라 실로 국가의 큰 체통에 관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송나라 때 범조우는 누구보다도 탁월하고 올곧은 인물이었지만 장인이 재상이라는 이유로 스스로 간관에서 물러났다. 그는 장인의 눈치를 볼 사람도 아니었고, 장인과 사위라는 사적인 관계를 나랏일보다 앞세울 사람도 아니었다. 하지만 정치의 공공성을 해칠 수 있는 요소는 아예 싹부터 잘라내야 하며, 선비로서 그 일에 앞장서겠다는 신념이 있었던 것이다.

김창협은 범조우의 처신에 비하면 자신은 잘못한 점이 많다며 사직하겠다고 밝힌다. ‘아비를 피해야 하는 신의 처지를 논하면 장인을 피했던 옛 사람에 비할 바가 아닌데도, 신은 천박한 소견 하나 견고히 지키지 못하여 끝내 나라의 체통과 개인의 의리를 모두 손상시키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한스럽나니 이는 모두 신의 죄입니다. 과거의 잘못을 되풀이해서는 안 되고 옛 일의 좋은 점은 뒷사람이 본 받아야 할 것이니, 신은 이제 절대로 다시 대각에 들어가지 않겠나이다. 옛 사람이 가르쳐 준 의리를 망각하고 국가의 체통을 거듭 손상시키는 짓을 할 수가 없습니다.’

처음 사헌부의 관리로 임명되었을 때 깨끗하게 물러났어야 했는데 조정에서 계속 대각의 관직을 제수한다는 이유로 머뭇거리다가 처신에 오점을 남기고 말았으니, 이제라도 사직을 하여 나라에 누를 끼치지 않겠다는 것이다. 하지만 사실, 법적인 면만 놓고 보자면 김창협은 상피제를 위반하지 않았다. 부자가 같은 관청에 근무한 것도 아니고 동일한 지휘라인에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애초부터 상피의 요건에 해당하지 않으니 굳이 사직상소를 제출할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도 김창협은 왜 스스로에게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면서까지 상피를 선택한 것일까? 임금의 인사명령도 어겨가며 그가 지키고자 했던 ‘의리’는 무엇이었을까?

자녀를 자신의 부처에 특채한 장관…

김창협은 무엇보다 ‘공직윤리’를 확립해 정치의 공공성을 지켜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흔히 관직이 ‘천하의 공기(公器)’라고 불리는 까닭은 여기에는 그 어떤 사사로운 이해관계나 주관적인 목적이 개입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철저할 정도의 투명성과 공정성이 확보되어야 관직을 맡은 사람이 비로소 제 역할을 다할 수 있게 된다. 오늘날 친인척을 보좌관으로 임명하는 국회의원, 자녀를 자신의 부처에 특채한 장관, 연고지 근무를 조장하는 사정기관 등 ‘사(私)’를 ‘공(公)’에 앞세우는 경우가 빈번한 것을 생각할 때, 우리가 본받아야 할 자세가 아닐 수 없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34호 (2016.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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