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ey

[2000선 맴돈 코스피 지수 9년] 112번의 만남 이젠 헤어지고 싶다 

2007년 7월 25일 첫 2000선 돌파 … 박스권 맴돌며 지지부진 

박진석 기자 kailas@joongang.co.kr

벌써 112번째 만남입니다. 햇수로 9년이나 됐습니다. 첫 만남의 감동은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이제는 만나도 심드렁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짜증이 납니다. 이제 더 이상 그를 만나고 싶지 않습니다. 몇 번이고 떠날 생각을 했고, 실행에 옮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숙명인지 업보인지, 어느 새 돌아와 또 다시 그를 보게 되네요.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저는 ‘코스피 지수’라고 합니다. 1980년 1월 4일 ‘한국증권거래소’라는 나라에서 ‘종합주가지수’라는 이름으로 태어났습니다. 올해 만 36세가 됐네요. 그동안 우리나라는 ‘한국거래소‘로 국명을 바꿨고, 저는 코스피 지수로 개명했습니다. 나이가 적지 않지만 아직 배필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많은 사람을 만나긴 했죠. 하지만 제게는 누구를 오래 만나지 못하는, 나쁜 습성이 있답니다. 첫 만남에 홀딱 반했던 사람도 몇 명 있었지만 관계가 오래 가질 못하더군요. ‘팔랑귀’다 보니 “좀 더 높은 곳에 가면 더 훌륭한 사람이 있다”는 주변의 귀엣말에도 쉽게 넘어가버렸습니다.

9년째 오르락 내리락


그런 제가 누군가를 112번이나 만났다는 건 아주 이례적인 거죠. 그는 바로 ‘2000포인트’라는 사람입니다. 저는 애칭인 ‘2000’이라고 부릅니다. 어린 시절, 그는 전설적인 존재였습니다. 실존인물인지도 불분명했습니다. 100포인트 같은 친구들하고 놀던 코흘리개 시절이니 당연했겠죠. 그러던 어느 날, 아마 1985년 정도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100포인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를 찾아 헤매고 있자니 누군가 말하더군요. “이제 아기가 아니니까 다른 친구들을 만나야 한다. 100포인트는 더 이상 만날 수 없다”고요. 저는 슬펐습니다. 하지만 슬픔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200포인트, 300포인트, 400포인트, 500포인트 등 심심할 사이도 없이 새로운 친구들이 속속 나타났거든요. 100포인트는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멋진 친구들이었어요. 그러다가 1989년 3월 31일에 저는 1000포인트와 만났습니다. 주변에서는 우리 만남을 축복해줬습니다. 과연 그는 지금껏 제가 만났던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멋졌습니다. 하지만 당시 저는 너무 어렸고 그의 소중함을 제대로 알지 못했습니다. “1000포인트는 네 상대가 아니다. 조금만 있으면 2000포인트도 만날 수 있다”는 주변의 말도 저를 뒤흔들었습니다. 저의 관심은 1000포인트가 아닌 2000포인트에 집중됐습니다.

1000포인트를 무시한 벌을 제대로 받은 걸까요. 2000은 그림자도 못 본 상태에서 1000포인트 아래의 친구들을 다시 만나게 됐어요. 1998년 6월에는 300포인트와도 재회했습니다. 멀지 않은 곳에 200포인트의 모습도 보여서 아찔했던 기억이 납니다. 철없이 마음만 붕 떴다가 냉혹한 현실을 만나 급전직하한 것이죠. 사춘기 시절의 좋지 않은 기억이 현재 저의 삐뚤어진 행보에 영향을 미친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다시 희망을 찾기 시작한 건 23세 되던 해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던 2003년 3월, 저는 길었던 방황을 끝내고 새 출발했습니다. 한발 한발 열심히 전진했던 저는 조금씩 위로 올라와 2년 후 1000포인트와 재회했습니다. 이번에 그를 버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16년 전과 달리 그리 멋져 보이지 않았거든요.

저는 상승행보를 계속한 끝에 2007년 7월 25일 마침내 2000포인트와 조우했습니다. 제 나이 스물 일곱이던 시절입니다. 상상 속 이상형과의 만남은 감격스러웠습니다. 주변에서도 진심으로 축복해줬습니다. 우리는 뜨겁게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요. 그 해 11월 8일, 2000 아래로 내려온 저는 이후 3년 동안이나 그와 생이별을 해야 했습니다. 저는 2000을 그리워하면서 독수공방했습니다. 2010년 재회한 우리는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헤어지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그리고는 수시로 만나 애정을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남녀관계란 참 묘합니다. 못 만날 때는 애타게 그립더니 자주 만나게 되니 점점 심드렁해지더군요. 한 해, 두 해가 지나면서 우리는 노래 가사처럼 때가 되면 의무감으로 만나고 관심도 없는 서로의 일과를 묻는, 그런 사이가 됐습니다. 2000의 눈을 피해 잠시 2100포인트와 2200포인트를 만났던 일도 영향을 미쳤을 겁니다. 2000보다 더 근사한 애들이었거든요. 그 때부터 저 높은 곳을 지향하는, 저의 지병이 재발했습니다. 저는 3000포인트를 새로운 목표로 삼게 됐습니다. 곧 만날 수 있을 거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당선되면 1년 만에 3000포인트를 만나게 해주겠다”던 어떤 대통령 후보의 호언장담을 곧이곧대로 믿었습니다. 그 후보가 자신의 임기 내에 5000포인트까지 만나게 해주겠다고 하는 바람에 잠시 황홀경에 도취된 적도 있습니다. 하긴 그 양반만 원망할 일도 아니죠. 제가 처음 2000과 만난 날, 한 언론사의 긴급 설문조사에 응한 당시 증권사 리서치 센터장 10명 중 절반이 “앞으로 3년 이내, 즉 2010년까지 3000포인트를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한 분은 2015년이 되면 5000~6000포인트를 만날 수도 있을 거라고 사자후를 터뜨렸습니다. 돌이켜보니 허탈하기만 합니다.

3년은커녕 9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저는 2000 주변을 맴돌고 있습니다. 지난 6월 13일 2000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와 다시 만나게 됐을 때 이게 과연 몇 번째 만남인지 헤아려 보기로 했습니다. 제가 2000 아래쪽에 있다가 2000 위로 올라갈 때 만난 게 56번, 2000 위에서 놀다가 2000 아래로 내려가면서 만난 게 56번이었어요. 도합 112번이네요. 그것도 오후 3시 퇴근 이후에 만나 다음날 오전 9시 출근 직전까지 함께 보낸 횟수 만입니다. 사람들은 이걸 ‘종가 기준’이라고 부르더군요. 오전 9시~오후 3시의 일과시간 동안 스쳐지나 듯 잠시 만난 것까지 따지면 횟수는 훨씬 더 늘어납니다.

이제는 정말 헤어지고 싶습니다. 더 이상 2000의 꼴도 보기 싫습니다. 우리나라에 태어난 것조차 원망스러워졌습니다. 뉴욕상업거래소에서 태어난 ‘다우지수’라는 친구는 2009년에만 해도 6400포인트와 만나더니 지금은 1만8000포인트와 연애 중입니다. ‘상하이종합지수’란 친구도 한 때 6000포인트를 만난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꼴이 말이 아닙니다만, 그래도 늘 6000포인트를 만났던 걸 자랑합니다. 왜 저만 이 모양일까요.

어느 대통령의 3000포인트 공약

어떤 분들은 기업들이 더 많이 성장해야 제가 3000포인트와 만날 수 있다고 합니다. 연기금 투자문화의 미성숙, 장기 투자 문화의 미정착, 금융사와 고객 간의 불신 등을 이유로 꼽는 분들도 있습니다. 제가 하도 하소연하니까 주변 분들도 불쌍했던지 손을 쓰려고는 합니다. 우리나라를, 지방자치단체들에 독립성을 부여한 후 중앙정부가 큰 틀의 관리만 담당하는 연방제 국가(지주회사)로 만든다는 계획, MSCI(모건스탠리캐피털 인터내셔널)라는 국제기구에서 우리나라를 선진지수 그룹으로 밀어 올리려는 노력 등이 그런 것입니다. 모두 저를 3000포인트와 만나게 해주려는 구상의 일환이랍니다. 그런데 다들 실패했습니다. 이게 성공하면 제가 3000포인트와 만날 수 있는지조차 미심쩍습니다. 별로 믿음이 가지 않네요.

어찌 됐든 이제 2000은 그만 만나고 싶습니다. 아니,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보고 싶네요. 작별 인사는 해야 하니까요. 다음 번에 제가 그를 만나는 날, 즉 2000포인트 위로 다시 올라서는 날이 그와의 이별기념일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올라가서 3000포인트와 포옹하고 싶습니다. 전망이 밝진 않지만 그래도 언젠가는 꿈이 이뤄지겠죠. 다음 서신은 꿈을 이루는 날 띄우겠습니다.

1340호 (2016.06.2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