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득불평등 심화로 계층 간 이동 어려워
근대 경제의 힘은 풀뿌리 혁신
코포라티즘 부각으로 자생력 저해근대 경제의 혁신은 생산성 증대와 실질임금 상승을 야기했다. 더 나은 삶은 대중에게 더 많은 자유를 주었고, 빈곤을 감소시키고 생활을 향상시켰다. 자본과 노동의 증가, 상업과 국가 간 무역 팽창의 결과가 아니라 작은 혁신의 결과가 번영을 초래했다는 펠프스의 주장에 우리는 동의하는가. 전례 없는 번영은 20세기 중반까지 지속됐으나, 오늘날 번영은 수십 년에 걸쳐 약화되고 있다고 펠프스는 주장한다. 1972~2012년 기간 중 미국의 총요소 생산성이 2%대에서 절반 수준인 1%대로 감소하는 등 세계적으로 잠재성장률 저하가 문제가 되고 있다. 그럼 우리는 다시 어떻게 대번영을 이룰 수 있나. 펠프스는 사회 곳곳에 풀뿌리 혁신(grassroot innovation)이 확산되도록 여건을 조성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한다.그렇다면 왜 역동성을 이끄는 자생적 혁신이 저해되었을까. 펠프스는 근대 경제의 기반이 되는 근대적 가치관이 공동체와 국가를 개인보다 우선시하는 전통적 코포라티즘(협동조합주의) 가치관을 부상시킨 게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공동체와 국가를 개인보다 우선시하고 낙오자들을 선도자들로부터 보호하는 전통적 가치관이 강력해지면서 근대 경제가 전진하지 못하게 됐다고 한다. 유럽 대륙에서 1920년대 처음 등장한 코포라티즘은 모험·도전·혁신 같은 근대적 가치보다는 안정·조화·질서·연대 같은 전통적 가치를 옹호했다. 코포라티즘은 정부와 기업단체, 노동단체 간 합의를 바탕으로 경제를 운용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개인주의나 돈에 대한 욕망같은 행태의 확산을 비판하고 대신 약자와 기득권 보호를 내세웠다. 이러한 ‘사회적 보호’는 보조금에서 복지 부조에 이르는 다양한 정책으로 나타났다. 펠프스는 이를 자생력을 저해하는 해악으로 봤다.누군가는 양극화가 심해지고 가난한 사람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자본주의의 위기 상황에서 자유와 활력을 중시하는 펠프스를 조롱할 수도 있겠다. 펠프스 주장의 근거를 좀 더 들여다보자. 기업 규모가 커지면 커질수록 의사결정 구조의 효율성을 저해해서 역동성을 훼손하는 경향이 있다. 그는 대기업의 관료적 의사결정을 싫어한다. 기업이 단기 성과주의와 경영자 그룹에 대한 과도한 보상에 몰두하다 보면 기업 경영의 장기적 전망은 어둡게 된다. 장기 비전 없이 단기 목표에 급급한 기업은 표류한다고 본다. 돈에 대한 과도한 탐욕도 자본주의의 쇠락에 영향을 미친다. 주식이나 부동산 투기를 통해 수십억씩 버는 사람의 돈에 대한 탐욕은 혁신을 저해하는 암 덩어리라 본다. 그 돈이 부가가치를 생산하지 않는 비생산적인 곳으로 들어가서 사람들의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좀먹는 것으로 생각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창의적인 풀뿌리 혁신 시스템을 바르게 인지하고 이를 존중하고 일하면서 발생하는 결과를 제대로 보상하는 것이다. 인센티브는 덩치가 큰 고래도 춤추게 한다. 개척 정신으로 대변되던 미국의 경제적 역동성은 코포라티즘이 강조하는 가치들이 도입됨으로써 ‘의존성’에 대체돼 힘을 잃었다고 그는 보았다. 국가가 개입해 규제를 통해 기득권을 보호하고 정치인·관료·이익집단의 3각 규제의 철옹성이 공고하게 됐다고 주장했다.이쯤에서 그의 정의관을 한번 보자. 그는 일자리 문제와 좋은 삶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한 경제학자다. 아리스토텔레스와 그의 후예들이 논의해 온 ‘좋은 삶의 향기’를 평생 동경했다. ‘정의로운 경제의 향기란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면서 경제가 돈과 이익의 문제라는 편견을 과감히 거부한 인물이다. 사회적 약자를 존중한 존 롤즈의 정의론을 사랑하면서 다수 이익의 합이 크다고 소수에게 희생을 강요할 수 없다고 주장한 참 인물이다. 사회의 소득이 어떻게 분배돼야 하는가를 늘 생각하며 번영으로 이끄는 ‘좋은 삶’은 분배 역시 정의로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런데 왜 그는 코포라티즘적 분배를 보기 싫은 불의로 규정했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그에게 최저 임금에 보조금을 지급해 극단적인 양극화를 해소하는 분배는 많은 사람을 경제 활동에 참여하게 해서 ‘좋은 삶’으로 이끄는 정의로운 제도다. 이와 달리 코포라티즘의 영향을 받은 ‘사회 부조’의 확대는 경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에게까지 ‘복지’라는 이름으로 사회적 부를 분배한다.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도 혜택을 줘서 사회 역동성을 심하게 저해하기에 정의롭지 않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아직까지 펠프스의 주장에 동의하고 싶지 않은 복지론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일하지 않는 자에게도 소득을 주는 기본소득 논쟁이 한창이니 말이다. 그의 저서 [중산층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Rewarding work)]를 읽어 보자. 그는 일하는 저임금 근로자에게 생산성에 따라 차별화된 보조금이나 세제 혜택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나라가 도입한 근로 장려 세제가 그의 이론을 수용한 제도다. 일하는 보람을 앗아가서는 곤란하기에 사용자에게는 고용 비용을 줄여 주고, 일하는 사람에게는 제대로 된 임금을 제공하자는 게 그의 일관된 사고다. 그는 정부가 저임금 근로자에게 영구적으로 임금 보조금을 줘서 중산층으로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일할 기회를 줘서 개개인의 참여와 도전정신으로 그들의 삶이 나아지고 국가 번영을 이끈다는 것이 그의 핵심 이론이다.
부러운 중국의 창업 열풍공식적인 한국의 혁신지수는 다양한 발표에서 상당히 높다. 연구개발과 높은 교육열이 한몫하는 것 같다. 그런데 풀뿌리 혁신의 열기는 뜨겁게 느껴지지 않는다. 요즘 세대는 이전 세대보다 창의성을 발휘하고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모험을 하는 대신 안전 지향으로 직업을 선택하는 경향이 오히려 높아 보인다. 금융업·교사·공무원·대기업 시험에 수많은 젊은이가 목을 맨다고 하니, 청년 실업을 생각하면서도 안타깝다. 우리는 아직도 중세나 있었던 특권의식, 순응주의, 체면치레 같은 전근대적 문화에 안주하는 경향이 있는 것은 아닌가. 달라진 세상에서 역동성은 자유와 창의에서 나올 수밖에 없다. 집단주의에 빠진 역동성 고갈을 극복하는 것이 위기에 빠진 자본주의의 숙제라고 펠프스는 외치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공산주의 국가인 중국의 창업 열풍이 거세다. 리커창 총리는 ‘대중의 창업, 만인의 혁신’을 말하며 청년들에게 창업을 독려한다. 중국에서 제2, 제3의 알리바바와 텐센트, 샤오미가 나와 경제 부흥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에드먼드 펠프스(Edmund S. Phelps, 1933년 7월~): 거시경제 정책의 장·단기 효과 사이의 관계에 대해 이해를 넓힌 공로로 2006년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했다. 1960년대 말에 주류 경제학의 견해였던 인플레이션과 실업률 사이의 안정적 역(逆)의 상관관계, 필립스 곡선을 반박해 경제학계에서 큰 호응을 얻었다. 새로운 기술과 발전의 확산에서 ‘인적 자원’의 중요성을 분석하는 데 선구자적 역할을 했다. 고용이론의 대가로 합리적 기대를 하는 고용주들은 생산에 차질을 빚지 않고 재고용으로 인한 추가 비용을 고려해 노동자들의 이직을 막으려 한다고 했다. 그 결과 시장 임금보다 높은 수준의 임금을 제시해 임금은 균형 수준보다 높게 되고, 노동의 수요와 공급의 불일치로 비자발적 실업이 존재한다고 주장했다.
조원경 - 연세대(경제학과)와 미국 미시간주립대(파이낸스 석사)를 졸업했다. 행시(재경직) 34회 출신으로 재무부·재정경제원·재정경제부·기획재정부에서 관세, 물가, 복지, 소비자, 국제금융, 통상, 대외경제 분야에서 일했다. 미주개발은행 이사실에서 한국 대표로 근무했다. 현재 기획재정부 대외경제협력관(국장급)으로 근무하고 있다. 저서로는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