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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같은 값이면 흙수저 뽑아라 

금수저는 모르는 흙수저만의 비밀 무기 … 열정·목적의식 남달라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

바야흐로 스펙(Spec)의 시대다. 스펙은 입시생이나 취준생의 공력이 드러나는 점수·자격증·실적 같은 것을 말한다. 제품이나 기계의 사양(仕樣)을 뜻하는 영어 단어 ‘스페시피케이션(Specification)’에서 따왔다. 스펙이 없으면 입학도 취직도, 심지어 연애도 힘들다. 그래서 너나 없이 스펙 쌓기에 혈안이다. 하지만 아무리 ‘노오~력’을 해도 감히 넘볼 수 없는 스펙 지존이 있다. 바로 호적등본이다. TOEIC 점수나 HSK 등급, 각종 자격증 수십 개보다 (조)부모의 신분과 재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여기서 등장한 것이 ‘수저 계급론’.

수저 계급에는 금수저·은수저·동수저·흙수저가 있다. 영어 표현에 부모 잘 만나 호강한 사람을 ‘은수저를 물고 태어났다(Born with a silver spoon in one’s mouth)’고 하는데, 수저 계급론은 은수저 위, 아래로 몇 개 등급을 더 붙였다(다이아몬드 수저, 놋 수저, 플라스틱 수저, 나무 수저도 있는데 헷갈리니까 일단 빼자). 역사가 입증하듯이 계급론은 개인의 상승 의지를 무력화한다. 계급의 갈피마다 차곡차곡 쌓인 체념과 분노는 결국 한 사회를 병들게 하고 무너지게 한다. 수저 계급론은 우리 사회의 음침하고 어두운 그림자를 드러내는 한 편의 ‘웃픈(웃긴+슬픈)’ 독백으로 들린다.

스펙보다 ‘웃픈’ 수저 계급론


한 가지 반가운(?) 소식이 있다. 우리만 그런 건 아니라는 거다.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 아메리카는 한 술 더 뜬다. 돈 뿐만 아니라 피부색·출신지·거주지 등에 따라서도 알게 모르게 신분이 갈린다. 아이비리그(Ivy League) 같은 명문 대학은 금수저들의 독차지가 된 지 이미 오래고, 겉으로는 다양성을 외치는 멀끔한 회사들 중에도 실상은 금수저·은수저만 선호하는 회사도 많다. 그런데 세계적 물류 운송업체 UPS의 인사전문가 레지나 하틀리(Regina Hartley)는 색다른 얘기를 한다. 사람을 뽑을 때 같은 값이면 금수저보다 흙수저를 뽑으라는 거다. 뭐지? 일단 조크는 아닌 듯하다.

두 명의 지원자 중 한 명을 골라야 한다. A(아이비리그 졸업, 학점 4.0, 흠잡을 데 없는 이력, 수십 장의 추천서)와 B(시골 주립대 졸업, 빈번한 이직, 음식점 점원 경력, 추천서는 당연히 없음)가 그들이다. 물어보나마나다. A는 딱 봐도 엄친아, B는 찌질이다. 편의상 A를 금수저, B를 흙수저라 하자. 하틀리는 수년 간 인사업무를 하면서 흙수저들의 변변찮은 이력서들을 휴지통에 던져버리기 일쑤였다. 그러다 문득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봤다. 흔히 흙수저들은 게으르고, 일관성과 집중력이 결여되고, 행동이 제멋대로일 거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혹시 그들의 뒤죽박죽인 인생 경로는 남들은 모르는 최악의 역경을 딛고 그만큼 치열하게 살아왔다는 생생한 증거인 것은 아닐까.

통상 역경을 겪고 나면 오랫동안 정신적 후유증, 즉 트라우마(Trauma)가 남는다. 트라우마는 두고두고 문제를 일으키기 때문에 정신의학에서는 주로 트라우마의 부작용에 초점이 맞춰져왔다. 하지만 연구가 계속되면서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정신의학자들이 ‘외상 후 성장(Post traumatic growth)’이라고 부르는 현상인데, 트라우마가 오히려 개인의 성장과 발전에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거다. 실제로 그렇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사업가나 리더들 중에 왕년에 고생 한번 안 해본 사람은 드물다. 가난했거나 아팠거나 버림받았던 경우도 부지기수다. 심지어 알코올 중독이나 폭력에 휘말렸던 사람도 있다. 역경이 아이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측정한 한 연구에서는 최악의 상황에 놓여졌던 698명의 아이들 중 3분의 1 이상이 건강하고 성공적인 삶을 산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그래서 젊어 고생은 사서 하라 했나 보다).

특히 성공한 기업가 중에는 묘하게도 난독증(難讀症) 환자가 많다. CNN 설립자 테드 터너, 버진그룹의 리처드 브랜슨, 시스코 시스템즈의 존 챔버스, 이케아의 잉바르 캄프라드, 자산운용사 찰스 슈왑의 창업자 찰스 슈왑 등이 모두 난독증을 앓았다. 레오나드로 다빈치, 알버트 아인슈타인, 토마스 에디슨, 파블로 피카소 같은 천재들도 난독증이었다. 명절 때마다 뵙는 성룡 삼촌과 톰 크루즈 형님도 난독증이다. 놀라운 것은 이들이 난독증이라는 치명적인 학습장애를 오히려 자신에게 바람직한 계기로 활용했다는 거다. 읽고 쓰지 못하는 대신 오히려 사소한 것에도 주의를 기울이고 남의 말을 귀담아 듣게 된 것이다.

창조적 리더 시대에 흙수저 출신이 제격?

오갈 데 없는 흙수저들은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건 자신 밖에 없다는 믿음으로 움직인다. 일이 잘 안 풀릴 때 쉽게 좌절하기보다는 ‘더 나은 결과를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를 자문한다. 또한 흙수저들은 스스로를 무너지지 않게 잡아주는 열정과 목적의식으로 무장되어 있다. 지독한 가난과 술주정뱅이 아빠와 연이은 불운, 아 그리고 빙빙 도는 난독증으로부터도 살아남았다면 일이나 사업이 조금 안 풀리는 것쯤은 아무 것도 아니다. 물론 명문대에 입학하고 졸업하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인생에서의 성공이 예정되어 있는 금수저들이라면 어떻게 눈 앞에 놓인 수많은 역경과 가시밭길을 헤쳐갈 수 있겠는가. 실제 명문대 졸업생들 중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에 좌절하고 상심하다가 애써 뽑아 준 회사에 미련없이 사표를 던지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하틀리는 흙수저를 뽑을 것을 강력히 권한다. 그녀 자신도 흙수저다. 그녀의 아버지는 망상성 정신분열증 환자여서 한 직장에 오래 있지 못했다. 당연히 그녀 가족의 삶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거나, ‘사랑의 기적’이거나, 아니면 ‘뷰티풀 마인드’였다고 한다(세 영화 모두 정신병 환자가 주인공이다). 그녀 가족은 뉴욕 브루클린의 빈민가에 세들어 살았고, 당연히 자동차, 세탁기, 심지어 전화기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하지만 그녀는 금수저의 자부심 대신 흙수저의 근력을 키웠다. 주변의 눈총과 비아냥을 약으로 삼았다. 어두운 과거에 갇히지 않고 밝은 미래에 집중했다. 그것이 지금의 그녀를 만들었고, 흙수저를 바라보는 긍정적 시각을 갖게 한 것이다.

서부영화를 보면 깔끔하게 양복 입은 은행원들이 나온다. 분명 금수저들이다. 반면 넝마 걸치고, 먼지 뒤집어 쓰고, 말 타고 소떼 모는 카우보이들은 흙수저쯤 되겠다. 그런데 악당들을 몰아내고 서부를 개척하는 건 결국 언제나 카우보이들의 몫이다.

지금까지의 성장 공식은 끝났다. 과거에 우리가 선택했던 빠른 추격자(Fast follower) 모델에는 정답에 충실한 금수저들이 제격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맨땅에 헤딩하듯 뭔가 새로운 것, 최초의 것을 만들어 내야 하는 창조적 리더(Creative leader)의 시대다. 여기에는 빈(貧)하게 나서 험(險)하게 자란 흙수저들이 딱이다. 이력서 한 장을 보자. 어릴 때 부모에게 버림받아 입양됨, 대학을 갔으나 중간에 때려 침, 번듯한 직장 없이 여러 곳을 전전함, 느닷없이 명상을 하겠다며 인도에서 1년 쯤 뒹굴다 옴. 흠, 당신이 인사 담당자라면 이런 사람을 뽑겠는가? 이름도 괴상하다. 잡스(Jobs), 직업이 많았다는 뜻인가? 풀네임은 스티브 잡스란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 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1345호 (2016.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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