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장이 가족의 불행의 시작은 강남 재개발난장이 가족의 불행은 강남 재개발에서 시작된다. 지금의 영동 인근이다. 재개발(redevelopment)이란 주거환경이 낙후된 지역에 도로·상하수도 등 기반시설을 놓고 새 주택을 지어 재정비하는 사업을 말한다. 취지야 좋지만 원주민과 세입자에 대한 보상이 턱없이 적다는 것이 문제다.난장이 가족이 살던 1970년대 주택 보상가는 시세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난장이 가족에게 집은 가족의 ‘모든 것’이다. 어머니·아버지가 도랑에서 돌을 져와 계단을 만들고 벽에 시멘트를 쳤다. 아이들도 힘을 보탰다. 이런 집을 지으려면 드는 돈은 130만원 정도. 하지만 시가 제시한 것은 이주비는 15만원이다. 58만원 하는 분양아파트는 물론이고 30만원 하는 임대아파트도 들어가기에는 턱없이 적은 돈이다.난장이 가족은 부동산 거간꾼에게 25만원에 입주권을 판다. 이웃 명희네가 받은 17만원, 다른 동네주민들이 받은 22만원보다 많다. 그렇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세입자에게 전세금(15만원)을 내준 후 난장이 가족 손에는 7만원 밖에 없다. 이 돈으로는 서울 시내 어디에서도 집을 구하기 힘들다. 시세차익은 개발업자와 부동산업자의 몫이 된다. 난장이네에게서 입주권을 사들인 부동산업자는 45만원에 입주권을 되팔았다. 한 집당 최소 20만원의 시세차익을 남긴 것이다. 입주민들의 고통의 크기는 부동산 업자의 부와 비례한다. 영희는 부동산 업자로부터 입주권을 훔쳐와 행복동 아파트임대신청을 한다. 아파트임대신청을 한 재개발지구 주민은 영희가 유일하다.1970년대 재개발 방식이 많은 사회 문제를 낳으면서 입주민과 세입자를 보호하기 위한 각종 장치들이 마련됐다. 하지만 철거민들이 원지역에서 쫓겨나는 현상은 그대로다. 주택 보상가나 토지 보상가가 여전히 시세의 60~70%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서울시 길음 뉴타운의 경우 원주민과 세입자가 재개발 후 재정착한 비율은 17%에 불과하다. 김포-한강 신도시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른 지역으로 가려 해도 지금 사는 곳보다 싼 곳을 찾기 어렵고, 농민들이라면 농지를 구하기 어려워 일자리를 잃는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재개발 현장은 철거민들의 극심한 저항이 있게 마련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2009년 용산참사. 조합측이 제시한 휴업보상비와 주거이전비가 적다며 항의하는 세입자들을 강제철거 하려는 과정에서 6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최순실 국정농단 계기로 개발독재시대 다시 회자재개발의 대가로 주어지는 것이 입주권이다. 입주권은 조합원 자격으로 새로 짓는 아파트에 입주할 수 있는 지위다. 보유기간 1년 내 다른 사람에게 팔면 양도세 40%를 내야 한다. 1년 이상 보유하면 양도차익에 따라 일반세율(6~38%) 적용을 받는다. 조합원 입주권은 1세대1주택 비과세 판정 때 주택수에 포함된다. 만약 1세대가 1주택을 갖고 있으면서 입주권도 갖고 있다면 1세대2주택이 된다. 1세대1주택 양도세 비과세가 적용되지 않는다는 의미다. 또 입주권은 취득 때 취득세(토지가격의 4.6%)를 내야 한다. 재산세(토지분)도 입주권 보유 때부터 납부해야 한다.조합원이 아닌 일반이 청약을 통해 입주자 지위를 갖게 되는 것이 분양권이다. 분양권은 입주권과 여러모로 다르다. 분양권을 보유 1년 미만에 전매하면 양도세율 50%가 적용된다. 1년 이상 2년 미만인 경우는 세율이 40%, 2년 이상인 경우는 일반세율(6%~38%)이 적용된다. 입주권에 비해 양도세 부담이 크다. 또 부동산 과열지구는 종종 분양권 전매제한이 되기도 한다. 다만 분양권은 새 아파트에 입주해 소유권을 등기이전할 때 취득세(전용면적에 따라 1.1%~3.5%)가 발생한다. 또 분양권은 보유기간 중 재산세를 내지 않는다. 분양권은 ‘입주권리가 있는 유가증권’ 성격이 강한 반면 입주권은 ‘사실상 거주하는 재산’으로 본다는 얘기다.난장이 가족의 큰아들인 영수는 노동운동을 통해 은강그룹 노동자의 처우를 개선하려 하지만 끝내 실패한다. 영수는 칼을 들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영수네만 난장이 가족일까. 이웃 마을에는 꼽추와 앉은뱅이도 있다. 서민들은 다 비슷하다. 난장이네의 이웃인 신애는 외친다. “저희들도 난장이랍니다. 서로 몰라서 그렇지 우리는 한편이에요.”저자인 조세희는 1965년 경향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지만 곧 작품활동을 포기한다. 그러다 10년이 지난 1975년 돌연 펜을 잡는다. 조세희는 ‘작가의 말’을 통해 “비상계엄과 긴급조치가 멋대로 내려지는, 그래서 누가 작은 소리로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말만 해도 잡혀가 무서운 고문 받고 감옥에 갇히는 ‘유신헌법’아래서 나는 일찍이 포기했던 ‘소설’을 한편 한편 써내려 갔다”며 “나는 지금도 내란 제1세대 군인들이 무력으로 집권해 피 말리는 억압독재를 계속하지 않았다면 ‘난쏘공’은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으로 생각했던 유신과 개발독재 시절의 이야기가 최순실 국정농단을 계기로 다시 회자된다. 역사는 ‘뫼비우스의 띄’처럼 끝없이 반복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