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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삼의 ‘테드(TED) 플러스’] 물체가 기억하는 소리 

 

박용삼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
미세 움직임 감지하고 해독하는 ‘모션 현미경’ 기술 등장

지난 수 세기 동안 현미경은 우리 삶에 혁명적인 변화를 가져왔다. 너무 작아서 육안으로는 관찰이 불가능했던 사물·생명체·구조물의 미시적 세계를 우리 앞에 보여주었던 것이다. 21세기 과학기술 문명의 상당 부분은 현미경 덕분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590년에 배율 10배인 현미경이 처음 등장한 이래 발전에 발전을 거듭해온 현미경이 이제 또 한번의 도약을 앞두고 있다. 특기할 점은 지금까지의 발전 경로와 원리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는 점이다.

미국 MIT에서 컴퓨터·전기공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마이클 루빈스타인(Michael Rubinstein)은 마이크로소프트, 퀀타 리서치와 공동 개발한 새로운 형태의 진화된 현미경을 보여준다. 이 현미경은 일반 현미경처럼 광학렌즈를 쓰는 대신 비디오 카메라와 영상처리 기술을 이용한다.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는 기존 현미경과 같다. 하지만 볼 수 없던 것을 보게 하고, 들을 수 없던 것을 듣게 해 준다는 점에서는 기존 현미경을 훌쩍 뛰어 넘는다. 일명 ‘모션 현미경’(motion microscope)이다.

디지털 기술이 만든 마법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서울 중앙지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던 중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사진이 공개된 후 조사실 창문에 종이가 붙여져 있다. 조사실 내에 있는 물체를 멀리서 동영상으로 찍었다면 ‘시작 마이크’로 거기서 오간 대화를 복원할 수 있다.
사람의 피부는 혈액의 흐름에 따라 아주 미세하게 붉은색에서 흰색으로 색깔이 바뀐다. 하지만 그 차이가 크지 않기 때문에 육안으로는 거의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사람의 얼굴을 동영상으로 찍고, 얼굴에 나타나는 미세한 색의 변화를 전용 프로그램으로 탐지해 낸 후, 이 차이를 100배 정도 증폭시키면 얘기가 달라진다. 심장 박동에 따라 얼굴 색깔이 흰색-빨간색으로 변하는 것을 확연히 볼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동영상의 모든 픽셀에 기록되어 있는 색상 측정값을 여타 노이즈 신호와 구분해서 정확히 골라내는 것이다. 고도의 영상처리 기술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 다음은 색상 신호를 증폭하기만 하면 된다. 이 과정에서 단지 색상 변화 양상뿐 아니라 변화 속도까지 측정할 수 있다. 실제로 TED 강연에서 시연된 화면을 보면 맥박이나 심장박동 속도를 측정하고, 얼굴에 혈액이 흐르는 양상까지 확인 가능하다. 시중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웬만한 비디오 카메라로 찍은 영상만 있으면 된다.

모션 현미경의 응용 분야는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특히 의학 분야에서 심박수를 비롯해 심장 운동 패턴, 근육 움직임, 장운동, 혈액 순환 등을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다. 현재 병원에서 사용하고 있는 X-ray, 초음파, CT, MRI 등 다양한 진단장비에 모션 현미경 기술을 적용하면 좀 더 정확한 진단이 가능할 것이다. 범죄 수사에서 피의자가 하는 말의 진위 여부를 가리는 데도 유용하다. 얼굴 표정, 눈동자, 몸짓의 미세한 움직임을 감지해서 분석하면 호흡, 혈압, 맥박, 땀 등 생리적 정보에 기초한 기존의 거짓말 탐지기를 크게 보완할 수 있다. 또 엔진의 진동처럼 기계의 미세한 움직임도 확대, 분석해서 고장을 사전에 감지하고 진단하는 데 도움이 된다. 건물과 구조물이 바람이나 지진에 흔들리는 정도를 측정해서 구조 설계나 유지 보수에 활용할 수도 있다.

이게 끝이 아니다. 급기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얘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들의 대화 내용도 포착할 수 있다. 원리 자체는 간단하다. 대화를 나눌 때 음파는 주변 사물과 부딪혀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진동을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노래하는 사람 옆에 놓인 와인 잔의 움직임을 250배로 확대해 보면 잔이 소리에 맞춰 진동하고 공명하는 모습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이 과정을 역으로 적용해서 주변 물체의 진동을 촬영한 후 증폭, 분석해 내면 원래의 대화를 재생해 낼 수 있는 것이다. 그럼 일상의 모든 물건이 일종의 마이크가 된다.

MIT 연구팀은 탁자 위에 빈 과자봉지 하나를 놓고, 그 옆에서 노래를 틀었다(연구팀이 선택한 노래는 1877년에 토마스 에디슨이 자신의 축음기에 처음으로 녹음했던 ‘Mary Had a Little Lamb’이다). 노래를 튼 후 과자 봉지를 15피트(약 4.5m) 떨어진 비디오 카메라로 (소리를 제외한 영상만) 고속 촬영했다. 영상에는 음파로 인한 과자봉지의 미세한 떨림이 기록되었고, 이것을 분석해서 원래 노래를 거의 근접하게 복구해 낼 수 있었다. 과자봉지를 겨우 1 마이크로미터(1mm의 1000분의 1) 정도만 움직이려고 해도 엄청나게 큰 소리가 필요하다고 하니, 보통 볼륨의 노래라면 비디오 분석이 얼마나 정교해야 할지를 짐작할 수 있다.

연구팀은 이렇게 비디오 신호로부터 오디오 신호를 추출해내는 장치에 ‘시각 마이크(visual microphone)’라는 이름을 붙였다. 과자봉지 외에 다른 물체, 예를 들면 화분에 심은 식물로부터도 소리를 복원할 수 있고, 당연히 노래뿐 아니라 말소리도 복원 가능하다. 말하는 사람들 옆에 조금이라도 진동하는 물체가 있고, 그 물체가 CCTV에 녹화가 되어 있다면, 사실상 그들의 대화는 해당 물체(정확히는 물체가 찍힌 영상)에 녹음이 되는 것이다. 그 CCTV 영상을 거꾸로 해독하기만 하면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를 언제라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전임 청와대 민정수석이 서울 중앙지검에 소환돼 조사를 받던 중 팔짱을 낀 채 웃고 있는 사진이 공개된 적이 있다. 공교롭게도 맞은편 수사관들은 기립자세로 손을 모은 채 서 있는 모습이다. 이 사진은 국내 모 일간지의 객원 사진기자가 서울지검 사옥에서 직선 거리로 350m 떨어진 한 건물 옥상에서 600mm 망원렌즈에 2배율 텔레컨버터를 끼우고 찍은 것이라고 한다. ‘봐주기 수사’ 논란에 휩싸인 검찰은 해당 사진은 조사 중에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던 장면이라고 해명했으나, 피고발인 신분인 (검찰 출신) 전임 수석의 여유로운 모습에 여론은 분노로 들끓었다(특종 사진을 찍은 사진기자가 객원 꼬리표를 떼고 즉시 정기자로 발탁되었다고 하니 그나마 위안이 된다).

‘시각 마이크’의 시대, 더 이상 비밀은 없다

사실 사진 한 장만 가지고 팩트를 확인하는 데에는 다소 무리가 따른다. 정말 어쩌다 우연히 그런 이상한 장면이 찍힌 건지도 모른다. 무의식 중에 사람의 감정, 표정, 동작은 시시각각으로 변할 수 있으니 말이다. 진위를 확인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사진이 찍힌 그 순간 어떤 대화가 오고 갔는지를 밝혀내는 것이다. 그렇다고 무시무시한 검찰 조사실을 무단으로 도청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방법은 딱 한가지, ‘시각 마이크’이다. 조사실 내에 있는 물체를 멀리서 동영상으로 찍기만 하면 된다. 영상 속의 컵, 화분, 휴지통, 과자 봉지는 그들의 대화를 고이 기억했다가 언젠가 우리에게 다시 들려줄 것이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이제 눈으로도 듣는 시대가 왔다. 높은 자리에 계신 분들, 입 단속에 더욱 신경쓰셔야 한다. 이너서클의 심오한 비밀을 끝까지 지키고 싶으시다면 말이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

1362호 (2016.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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