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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26)] 오명 뒤집어쓰며 공동체 지키려는 결기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최명길의 한성판윤 사임... 주화론 주장하며 후일 도모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1627년(인조5), 조선과 후금 사이에 발발한 정묘호란은 양국이 ‘형제의 예(禮)’를 맺으면서 종결되었지만 그 질서는 이내 흔들리게 된다. 조선은 오랑캐라고 무시해 온 후금을 형으로 모셔야 하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후금도 명나라에 충성을 바치는 조선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양국의 긴장관계를 매끄럽게 조율하며 나라의 실리를 찾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당시 임금인 인조와 조선 조정은 무능하고 무책임한 모습을 보여주었을 따름이다.

그러던 1636년(인조14) 2월, 후금의 칸 홍타시가 칭제건원, 즉 국호를 청(淸)나라로 바꾸고 황제로 즉위하면서 상황은 긴박하게 돌아갔다. 홍타시는 “조선과는 형제의 나라이니 이 문제를 의논하지 않을 수 없다”(인조14.2.24)며 사신을 보냈는데, 자신들이 만든 질서에 순응할지 아니면 거역할지를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대명의리를 절대적인 가치로 생각했던 조선의 사대부들에게 이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 황제의 국서를 거부하게 된다. 당연히 청이 보복해 올 거라는 것을 상정하고 벌인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위기가 뻔히 예상되었음에도 조선은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말로만 척화를 외치고 형식적으로 전쟁에 대비하자고 했을 뿐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는다. 오직 최명길만이 ‘참으로 조정의 뜻이 척화에 있다면 어찌 논의하는 말들이 하나같이 몽롱하여 한 가지 계책도 시행하지 않는다는 말입니까…(중략)…간원의 말을 받아들여 나가 싸우거나 물러나 지킬 방책을 정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신의 말을 받아들여 병화(兵禍)를 늦출 계책을 세우지도 않으니 적들이 쳐들어오면 하루아침에 생령이 어육이 되고 종사(宗社)는 파천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진언한다(인조14.9.5).

무능하고 무책임한 인조와 조정 대신

더욱이 이때의 조선 조정은 계속 ‘후금’이라고 부를 것인가 아니면 ‘청’이라고 할 것인가를 둘러싸고 시간을 허비하고 있었다. ‘청’이라고 부르게 되면 황제를 참칭한 것을 인정해주는 꼴이니 불가하다는 의견과, 화친을 유지하기 위해 국호 정도는 저들이 원하는 대로 해주자는 의견이 대립했다.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며 명분 싸움을 벌이느라 정작 눈앞에 닥친 위기에 대응할 골든타임은 놓쳐버린 것이다. 그러자 한성판윤(지금의 서울시장)을 맡고 있던 최명길은 사직상소를 올리며 이러한 태도를 강하게 비판했다. 그는 장문의 상소를 통해 지금은 명분보다는 현실, 정도(正道)보다는 권도(權道)를 중시해야 할 때임을 역설한다. ‘일이란 본디 명분이 아름다우나 실제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습니다. 위대한 순(舜)임금 같은 이는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장가를 들었는데, 아내를 맞이할 때는 반드시 부모에게 고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는 말로 순임금을 힐난하는 자가 있다면 순임금은 필시 대답하시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태왕이 적인(狄人)의 침략을 피해 빈(邠) 땅을 떠나가셨는데, 군주는 사직을 위해 죽는 것이 도리가 아니냐는 말로 태왕을 책망하는 자가 있다면 태왕도 또한 필시 대답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하오나 순임금과 태왕은 끝내 혹자의 말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인륜을 무너뜨리거나 나라를 망치게 될지도 모르는 길을 달게 받아들였습니다. 과연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대체로 일을 수행하는 방도에는 정도와 권도가 있으며 일에는 급히 처리해야 하는 것과 늦게 해야 할 것이 있으니, 때가 어디에 있든 의(義)도 때에 따라 달라집니다. 성인(聖人, 공자)가 [주역(周易)]을 지을 때에 중도(中道)를 정도보다 귀하게 여긴 것도 진실로 이 때문입니다’(지천선생집).

아무리 보편적으로 타당한 원칙인 ‘정도’가 존재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현실을 감당할 수가 없다. 더욱이 ‘정도’는 고정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를 고수하다 보면 변칙적인 사태를 맞이했을 때 능동적으로 대응하기가 힘들다. 따라서 현실 여건에 맞게 응용하고 변통하며 정도를 실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제시된 개념이 ‘권도’인 것이다.

최명길이 인용한 순임금과 태왕의 일화 역시 ‘권도’의 사례다. [맹자]에 따르면 순임금은 아버지 고수(瞽瞍)에게 아뢰지 않고 장가를 들었다. 만약 순임금이 나쁜 아버지의 대명사인 고수에게 허락을 구했다면(고수는 아들인 순임금을 죽이려 했다) 아마도 끝내 장가를 들지 못했을 것이고 자식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맹자는 불효 중에서도 가장 큰 불효가 후손을 얻지 못한 것이므로 이 때 순이 아뢰지 않은 것을 ‘권도’라고 평가한다. 태왕은 주나라의 임금으로 오랑캐가 침략해오자 천도를 단행했다. 목숨을 걸고 나라의 터전을 지키지 못했으니 정도를 어긴 것이지만, 그를 통해 수많은 백성들을 구했으므로 ‘권도’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최명길은 순임금과 태왕이 ‘인륜을 무너뜨리거나 나라를 망치게 될지도 모르는 길을’ 부득이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시의 상황이 권도를 요구했기 때문으로, 지금 조선에게 필요한 것 또한 권도라고 말한다. 공자가 ‘정도’보다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적절한 도인 ‘중도’를 강조한 것처럼 말이다.

이에 최명길은 ‘화친을 위하여 살기보다는 의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 낫다는 말은 신하가 절개를 지키기 위한 말일 뿐, 종묘사직의 존망은 필부의 죽고 사는 것과 다르다’는 성혼의 말을 거론하며 ‘신하가 나랏일을 도모하면서 먼 앞일을 내다보지 못하고 자기 혼자만의 뜻대로 하기에 과감하다가 나라를 망하게 하는 데에 이르렀다면, 그 처리한 일은 비록 바르더라도 그 죄를 면할 수는 없사옵니다’라고 말한다. 내가 한 사람의 개인이라면 명분과 의리를 고수하고 고고한 절개를 지켜내는 것은 옳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국정을 담당하고 있는 신하라면, 백성과 국가의 안위를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하는 정치가라면 문제는 다르다. 신념 못지않게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는 것이고, 그 책임을 위해서라면 정도에서 벗어난 권도라 할지라도 기꺼이 선택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국력 다져 적의 빈틈 엿봐야

최명길은 또 이야기한다. ‘우리의 국력은 고갈되어 가고 오랑캐의 병력은 강성하니, 우선 정묘년의 맹약을 지켜서 몇 년이라도 화를 늦추는 동안, 시간을 벌어 올바른 정치를 펴서 어진 정책을 시행하고, 민심을 수습하여 성을 쌓고 군량을 비축하며, 변방의 수비를 더욱 굳건히 하고 군사를 단속하여 동요함이 없게 하면서, 저들의 빈틈을 엿보는 것으로 우리나라의 계책을 삼으면 이보다 나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주화라는 두 글자가 신의 일생 동안 허물이 될 것이나, 신은 지금 화친하는 일이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사옵니다.’ 비록 오명을 뒤집어쓸지언정 공동체를 지켜내기 위해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겠다는 결기는 오늘날의 리더들도 본받아야 할 대목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63호 (2016.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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