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으로는 이긴 것처럼 보여도 상대방에게 싸울
마음이 남아 있다면 아직 끝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상대의 기세를 완전히 꺾어서 상대방이 결과에 깨끗이
승복하도록 만들어야 한다. 대규모 전투이든 일대일
싸움이든 무기를 꺾고 상대방의 몸과 마음도 완전히
꺾어버려야 비로소 승리를 확신할 수 있다. -불의 장
유도에는 효과·절반·한판이 있지만, 검도는 한판 이외에는 없다. 칼싸움 자체가 적을 베든지 내가 베이든지 둘 중의 하나다. 승부에서도 어중간한 승리는 없다. 승리는 적의 전투 의지를 완전히 꺾어 다시는 도전하지 못하게 하고 화근을 뿌리째 뽑는 것이다.서양에서는 로마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간에 벌어진 내전이 전형적 사례다. 기원전 49년 1월 카이사르는 루비콘 강을 건너 로마로 진군해 권력을 장악한다. 반대세력의 수장 폼페이우스는 이탈리아를 떠나 근거지인 동방의 발칸 반도에서 권토중래를 도모했다. 카이사르는 잔존 반대세력을 일소하기 위한 원정에 나섰고, 그리스 중부의 디라키움에서 격렬한 공방전이 벌어졌다. 당대의 군사적 천재 두 명의 대결에서 카이사르는 병력의 열세와 지형적 불리함에 보급문제까지 겹쳐 대패했다. 카이사르도 죽음 직전까지 몰린 참패였다.폼페이우스는 여세를 몰아 완전하게 승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으나 충분한 전과를 거두었다고 생각하고 공격을 멈췄다. 일단 후퇴해 전력을 정비한 카이사르는 8월 파르살로스 평원에서 벌어진 회전에서 폼페이우스 군대의 주력을 격파했다. 승기를 잡은 카이사르가 폼페이우스 군대를 와해시키면서 폼페이우스는 살해되었고, 반대파를 완전히 제거한 카이사르는 수명이 다한 로마 공화정에 대한 정치개혁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비록 카이사르는 4년 후인 기원전 44년 3월 15일 원로원에서 암살되었으나 그가 남긴 정치·사회적 개혁의 비전은 충실한 후계자인 아우구스투스에게 계승되어 로마는 중흥기에 들어섰다.동양에서는 중국 춘추시대 고사인 와신상담이 대표적 일화다. 오왕(吳王) 부차가 월왕(越王) 구천에게 승리했으나 살려주는 바람에 화근이 되어 결국 패망했다. 월왕 구천과 싸워 패배한 오왕 합려는 전사하면서 태자인 부차에게 복수를 유언으로 남겼다. 구천은 선제공격을 감행했지만 오히려 대패하여 부차에게 항복했다. 오나라 신하 오자서가 “후환을 남기지 않으려면 지금 구천을 죽여야 한다”고 진언했으나 승리감에 도취한 부차는 구천을 살려서 귀국시키는 아량을 베풀었다. 오나라 속령이 된 고국 월나라로 돌아온 구천은 항상 곁에 둔 쓸개의 쓴맛을 보고 장작더미에서 잠을 자며 복수의 기회를 노렸다. 20년이 흘러 구천은 오나라를 침략하여 오왕 부차를 굴복시켰고, 부차는 자결했다.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인간들이란 다정하게 안아주거나 아니면 아주 짓밟아 뭉개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인간이란 사소한 피해에 대해서는 보복하려 들지만 엄청난 피해에 대해서는 감히 복수할 엄두를 못 내기 때문”이라고 갈파했다. 리더는 주변 세력과 우호 관계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일단 결투가 시작되면 완전한 승리를 확보해야 한다. 어중간한 봉합 조치는 결국 후일의 화근이 되게 마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