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변종 속출 … 전쟁 막는 수준의 전염병 방어 노력해야
“옛날 어린이들은 호환마마, 전쟁 등이 가장 무서운 재앙이었으나, 현대의 어린이들은 무분별한 불량, 불법 비디오를 시청함으로써 비행 청소년이 되는 무서운 결과를 초래하게 됩니다.”1980년대, 비디오를 볼 때마다 의무적으로 들어야 했던 공익광고 문구다. 이 말을 철썩 같이 믿은 필자는 정품 비디오만을 고집했고, 간혹 친구들의 꾐에 빠져 불법 비디오를 볼 때에도 절대 비행 청소년은 되지 말자 다짐하곤 했다. 세월이 흘러 비행과는 동떨어진 밋밋한 삶을 살게 된 지금, 새삼 깨닫는다. 불법 비디오 따위보다는 호환마마가 훨씬 더 무섭다는 것을.호환은 호랑이에 물려가는 것이고, 마마는 임금이나 왕비처럼 지엄한 존재를 의미한다. 이 둘이 합쳐진 호환마마는 정녕 울트라 슈퍼급으로 무서울 게 분명하다. 그렇다. 호환마마는천연두를 일컫는 말이었다. 변변한 치료약이나 방역 체계가 없었던 과거에는 천연두가 제일 무서웠을 성 싶다. 한번 걸리면 열에 세 명이 사망했다고 하니 더 말해 무엇하랴. 용한 무당도 소용없고, 어디 멀리 도망쳐봤자 호환마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호환마마가 좀 잠잠해질 무렵이면 장질부사(장티푸스), 호열자(콜레라), 이질 등이 뒤를 이었다.
유럽 인구 3분의 1 몰살한 흑사병
▎1918년 발생한 스페인 독감 환자들로 가득 찬 미국 캔자스주의 한 병원. 사망 직전 피부가 짙은 보라색으로 변하기 때문에 ‘보랏빛 죽음(Purple death)’으로 불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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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이 엄청나게 발전한 21세기 지금은 어떤가. 놀랍게도 인류는 아직 전염병의 공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사스, 메르스, 지카 등 매년 희한한 이름의 바이러스들이 새롭게 등장한다. 이젠 연례행사처럼 치러야 하는 가축 살처분(생매장) 비극이 결코 가축에서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끔찍한 상상도 떠나질 않는다. 결국 인류는 핵전쟁이나 외계인의 침공, 소행성과의 충돌이 아니라 전염병으로 멸망할 것 같다. 빌게이츠도 그렇게 생각한다.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인 빌 게이츠는 전 세계 최고 부자다. 2016년 말 현재, 그가 가진 순 자산은 900억 달러(약 100조5000억원), 미국 국내총생산(GDP)의 0.5%에 달한다. 죽을 때까지 부지런히 써도 다 못 쓸 것이 분명한 이 많은 돈을 그는 다 써 버릴 태세다. 2000년에 자신과 부인의 이름을 따서 ‘빌&멜린다 게이츠 재단’을 만든 이래, 그는 글로벌 보건의료 확대와 빈곤 퇴치에 돈을 펑펑 쓰고 있다. 지금까지 쓴 것만 해도 30조원이 넘는다.테드 무대에 선 빌 게이츠는 인류의 생존에 대한 가장 큰 위협으로 전염병을 경고한다. 역사를 살펴보면 빌 게이츠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다. 인류 역사상 가장 큰 재앙은 전쟁이나 자연 재해가 아니라 전염병이었다. BC 430년, 스타르타와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한창 승기를 잡아가던 아테네는 갑자기 전체 인구의 25%가 사망하면서 맥없이 주저앉는다. 장티푸스 때문이었다. 만약 이때 아테네가 승리했다면 서양의 역사는 한참 달라졌을 게다. 중세 때의 흑사병은 1347년 처음 창궐해서 당시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죽게 했고, 결국 농노 중심의 봉건제를 끝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1918년 발생한 스페인 독감은 4000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낸 것으로 추정된다. 한반도에서도 당시 인구 1700만 명 중 절반에 가까운 인구가 감염되고, 14만 명이나 희생된 것으로 추정된다 (‘무오년 독감’이라 불렸다 한다).이제는 각종 교통수단이 발달해서 전 세계가 한마당이다. 전염병이 퍼지기 딱 좋은 환경이 된 것이다. 향후 스페인 독감 급의 전염병이 발생한다면 어마어마한 수의 사망자를 보게 될 것이 분명하다. 전파 경로도 다양화되고 있다. 생화학 테러로 인해 인위적으로 바이러스가 퍼질 수도 있다. 상황을 천 배는 더 안 좋게 만들 요소들이 곳곳에 잠복해 있다. 다행히 빌 게이츠는 전염병을 막을 방법을 알고 있는 듯하다.우선 실패 케이스를 보자. 2014년 에볼라 바이러스는 주로 서아프리카의 기니, 시에라리온, 라이베리아 세 나라에서 발병해서 무려 1만 명의 사람들을 몰살시켰다. 이유는 총체적이다. 우선 전염병의 정체가 무엇이고, 어떻게 확산할지를 알 수 있는 전염병학자들이 없었다. 발병 정보가 온라인에 올라오기까지 굉장히 지체되었고, 그 정보 또한 매우 부정확했다. 준비된 의료팀도 없었다. ‘국경 없는 의사회’에서 뒤늦게 봉사자들을 투입했지만 그 수가 턱없이 부족했다. 에볼라의 특성상 공기 중으로는 퍼지지 않아 다행이었지, 만약 도시 지역에 본격 유입되었다면 더 많은 사람이 죽었을 것이 분명하다.실패 원인을 뒤집으면 성공 비법이 된다. 빌 게이츠는 노력 여하에 따라 전염병 확산을 억제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첨단 과학기술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정보를 주고 받을 스마트폰이 있다. 사람들의 위치와 이동 경로를 볼 수 있는 위성지도도 있다. 병원균을 조사하고 백신과 약을 개발할 수 있는 발전된 생물학도 있다. 의지만 있다면 이런 첨단기술을 동원해서 국제보건 시스템을 충분히 개선할 수 있다.
빌 게이츠, “군대 제도 참조하라”빌 게이츠는 군대 제도를 참조할 것을 권한다. 모든 나라들은 만약의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쓴다. 항상 준비가 되어 있는 상비군, 필요에 따라 소집할 수 있는 대규모 예비군이 있다. 나토는 신속히 급파할 수 있는 이동부대가 있고, UN도 평화유지군이 있다. 모의 실험을 위해 워 게임도 거르지 않는다. 전염병을 다룰 때에도 이렇게 똑같이 해야 한다. 빌 게이츠의 진위가 군대 수준의 전염병 방위군을 만들자는 것인지, 군대를 전염병 방어에 투입하자는 것인지, 아니면 군대와 의료진이 협업하자는 것인지는 확실치 않다. 사실 뭐든 상관없다. 중요한 것은 인류의 진정한 적이 얄미운 이웃 나라인지, 지긋지긋한 테러범인지, 아니면 정체불명의 전염병인지에 대한 국제적 합의이다.정녕 인류의 적은 미사일이 아니고 미생물이다. 전염병의 공포는 어쩌면 인간이 자초한 것인지 모른다. 전염병을 막을 시스템에 투자하지 않고 전염병이 비켜가기만을 바랐기 때문이다. 빌 게이츠는 세계은행의 추정을 인용해 만약 전 세계적 독감이 퍼진다면 세계의 부가 3조 달러 이상 증발하고, 수백만의 사망자가 나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정도 피해면 충분히 투자할 이유가 있어 보인다.아웃브레이크(1995), 12몽키즈(1995), 나는 전설이다(2007), 눈먼 자들의 도시(2008), 컨테이젼(2011), 연가시(2012), 감기(2013) 같은 영화들은 공통적으로 전염병의 공포를 다룬다. 영화는 곧 현실이라는데 아무래도 불안하다. 정부에서도, 또 언론에서도 올해 주의해야 할 전염병이 무엇인지, 사스나 메르스가 또 오는 것은 아닌지, 온다면 언제쯤인지 아무 말이 없다. 언제까지 마스크 쓴 사람만 보면 울렁증을 느껴야 하는지 모르겠다. 미리 준비하는 모습을 보이면 설사 대응이 좀 부실하더라도 면피가 가능하다. 기업들도 나서야 한다. 세상이 건강해야 돈도 더 잘 벌린다. 반 기업정서만 뭐라 할 게 아니다.
박용삼 - KAIST에서 경영공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을 거쳐 현재 포스코경영연구원 산업연구센터 수석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주요 연구분야는 신사업 발굴 및 기획, 신기술 투자전략 수립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