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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선왕 후원 속에 명성 떨친 이제현충선왕은 천하의 인재들과 당당히 겨뤄보라며 이제현을 적극 후원했고 황제에게 청해 원나라의 관직을 내리기도 했다. 황명을 받아 강남(양쯔강 이남) 지방을 순찰하는 길에 이제현을 동행시키는 등 그가 시야를 넓히고 다양한 경험을 쌓을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 주었다. 요즘으로 말하면 세계의 중심부에서 최신 이론을 배우고 현장 실무 경험까지 쌓게 한 것이다. 이러한 충선왕의 지우 속에서 이제현은 원나라 대학자들의 극찬을 받을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훗날 재상으로서 능력을 발휘하고 원나라와의 각종 교섭을 성공시키며 여말선초 성리학 발전에 중요한 기틀을 놓게 된 데에는 바로 이때 쌓은 역량과 인맥이 중요하게 작용한다.이후 이제현은 고려로 돌아와 관직 생활을 이어갔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충선왕이 실각하여 머나 먼 토번(티베트) 땅으로 유배를 떠났다는 것이다. 충선왕의 배경이 되어주었던 인종이 죽자마자 모함을 받은 것이다. 이제현은 원나라 정계 요로에 충선왕을 힘써 변호하는 한편 험난한 여정을 마다하지 않고 토번으로 달려갔다. 황제의 결정을 거역하는 것으로 비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천만한 행동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이제현은 원나라 승상 배주에게 편지를 보내는 등 충선왕을 구명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는데, 편지의 내용에 감동한 배주가 황제에게 감형을 청했다고 한다. 충선왕이 3년 만에 귀양에서 풀려난 데에는 이제현의 노력이 기여한 바가 크다. 충선왕이 자신에게 준 은혜에 최선을 다해 보답한 것이라 할 수 있다.이제현의 이 같은 충성은 다음 왕들에게도 고스란히 이어졌는데 그는 원나라가 고려를 직할로 편입하려는 시도에 강하게 맞서 이를 저지시켰을 뿐 아니라 연이어 닥친 혼란을 수습해냈다. 대표적인 것이 승상 조적의 반란이다. 충숙왕이 죽고 그의 아들인 충혜왕이 왕위에 오르자 심양왕 고를 지지했던 조적은 추종 세력을 규합해 반기를 들었다. 충혜왕이 금방 이들을 진압하면서 사태가 진정되는 듯 보였지만 이번에는 심양왕의 무고를 받은 원나라가 충혜왕을 소환한다. 자칫 충혜왕이 폐위되고 충역(忠逆)이 뒤바뀔 수도 있는 상황으로 고려조정은 초긴장상태에 놓였다.
이제현, 은퇴 후에도 공민왕 도와이때 이제현은 분연히 “나는 우리 왕의 아드님을 알 뿐”이라고 말하며 충혜왕을 수행해 원나라로 입조했다고 한다. 죽을지도 모르는 길이지만 심양왕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선왕 충숙왕의 장남인 충혜왕에게 충성을 바치겠다는 것이었다. 충혜왕은 일시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었지만 이제현의 필사적인 해명에 힘입어 다시 고려의 왕으로 복귀하게 된다. 몇 년 후 충혜왕이 원나라 사신에게 포박당해 끌려갔을 때에도 이제현은 즉각 원나라 조정에 항의하고 충혜왕의 사면을 요구해 관철시켰다.공민왕이 즉위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원나라에 머무르고 있던 공민왕이 귀국할 때까지 두 달 여의 권력공백기 동안 이제현은 도첨의정승(都僉議政丞)으로 국사를 책임졌다. 그는 혼란을 틈타 국정을 어지럽히고 이권을 도모한 세력들을 신속히 제거하여 민심을 안정시킨다. 고령을 이유로 은퇴한 후에도 홍건적이 침입하자 즉각 공민왕을 호종하는 등 이제현은 나라와 임금을 보호하는 일에 오롯이 평생을 바쳤다.이제현의 사례는 인재를 발탁해 키운 보스의 안목이 조직을 떠받치는 큰 기둥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살펴볼 만하다. 보스의 전폭적인 신뢰와 후원이 참모의 헌신을 불러일으켰다는 점에서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물론 충선왕이 이제현을 만권당으로 부르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그의 인품과 능력을 생각할 때 이제현은 고려의 훌륭한 신하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현이 국제적인 시야와 학문적 깊이를 더하고 원나라 조정에서도 존중해 줄 만큼 발언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충선왕과의 만남 덕분이다. 또한 만권당에서 충선왕으로부터 받은 은혜가 없었다면 충선왕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처럼 혼신을 다해 구명에 나서지도 않았을 것이다.더욱이 이제현은 관직생활을 좋아하지는 않았다. 뭇 소인이 더욱 치열하게 날뛰므로 자취를 숨기고 조정에 나아가지 않았고 권신들이 전횡을 휘두를 때에도 정계에서 물러나 방임하다시피 했다. 재목감이 되지 않아야 베이지 않고 나무로서의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는 뜻의 ‘역옹(?翁)’을 자처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런 이제현이 나라가 위기에 빠질 때마다 제일 앞장섰던 것은 충선왕에 대한 보은을 위해서가 아니었을까.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