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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수현의 바둑경영] 강자 앞에선 허허실실 전법으로 

 

정수현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
속내를 감추는 것이 병법의 기본... 감정적 대응 말고 전략적 대안 찾아야

▎이창호 9단은 소년시절부터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몇 가지 큰 사건이 터지면서 나라가 어수선하다. 외교와 내치 모두 불안정한 가운데 경제도 추락하고 있다. 그런데도 촛불과 태극기 집회는 계속돼 국론이 분열되어 있다.

이런 상황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든다. 한국에 과연 전략은 있는가?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눈치를 보며 생존해야 하는 한국은 고도로 전략적인 행보가 필요하다. 치밀한 전략이 없이는 살아가기가 쉽지 않은 처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지금의 행보는 전혀 전략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바둑으로 치면 실력이 낮은 하수의 방법을 쓰고 있는 것 같다.

‘돌부처’ 이창호의 포커페이스


싸움에 임할 때 무엇보다 자신의 속내를 쉽게 드러내지 않아야 한다. 이쪽의 카드를 다 보여주면 유리한 상황을 만들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법에서는 ‘궤(詭)’ 즉, 속이는 것을 기본으로 한다. 사회에서 남을 속이는 것은 나쁘지만 싸우는 경쟁 상황에서는 미덕이 된다. 그래서 병법의 고전인 [손자병법]에서도 적을 속이는 전략을 권장한다. 이순신 장군도 왜군이 아군의 허실을 탐지하지 못하도록 기만전술을 펼쳤다.

여기서 적을 속인다는 것은 이쪽의 전략을 알지 못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쪽이 무슨 전략을 고려하고 있는지 모르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전략을 흔히 ‘허허실실(虛虛實實)’이라고 한다. 허한 것이 실인 듯 보이기도 하고 실한 것이 허처럼 보여 적이 허와 실을 탐지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다. 허허실실 전법을 쓰면 상대는 곤혹스럽다. 때로는 이쪽이 신비스러워 보이기도 한다.

바둑에서 허허실실 전법으로 효과를 본 고수가 있다. ‘돌부처’로 불린 이창호 9단이다. 이창호 9단은 소년시절부터 얼굴에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로 유명했다. 그래서 돌부처라는 별명이 생겼다. 기자들은 그의 얼굴을 포커페이스라고 했다. 이 포커페이스는 이창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를 알기 어렵게 했다. 상대방 기사들은 허실을 드러내지 않는 이창호의 돌부처 얼굴 때문에 전략을 정하는 데 곤란을 겪었다.

[1도]는 예전에 소년 이창호와 일본의 다케미야 9단이 세계 대회에서 둔 바둑이다. 당시 후지쓰배 우승자인 다케미야 9단과 응씨배 우승자인 조훈현 9단간의 세계바둑챔피언 통합 대결이 있었다. 이 대결에서 조훈현 9단이 지고 말았다. 국내 팬들은 응씨배의 피로가 가시기도 전에 이런 시합을 붙인 것에 대해 아쉬워했다. 이 일이 있은 얼마 되지 않아 조훈현의 제자 이창호 4단이 다케미야 9단과 맞붙은 것이다.

당시 이창호는 갓 출현한 신예 기사여서 세계챔피언 다케미야는 잘 알지 못했다. 아마도 다케미야는 적당히 손을 봐줄 생각을 했을 것이다. 흑1로 하변에서 중앙으로 거대한 세력권을 폈다. 자신의 전매특허인 ‘우주류 포진’이다.

[2도] 그러자 소년 이창호는 백1을 하나 결정한 후 백3으로 흑진에 뛰어들었다. 우주류 포진에서 강공을 펼치려던 다케미야의 눈에 아래쪽 자신의 약점이 들어왔다. 그래서 흑8까지 보강을 했다. 선수를 잡은 이창호는 백9로 잽싸게 달아났다. 백 11까지 중앙 흑진이 무너져 백이 재미있는 형세. 여기서 기회를 잡은 이창호는 이후 단단한 운영으로 승리를 낚아내며 통쾌하게 스승의 복수를 했다.

당시 현장의 분위기를 전한 기자에 의하면 다케미야 9단은 전혀 표정이 없는 이창호의 모습에 곤혹스러워 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소년의 능력에 대해 잘 몰랐고, 무엇보다도 포커페이스에 대응 전략을 정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말하자면 이창호는 허실을 알 수 없게 해 전략적 우위에 선 것이다. 한국은 외교와 국방, 경제적인 면에서 어느 정도 허허실실 전법을 쓸 필요가 있다. 작은 나라에서 주변 강대국들을 상대하는 데 카드를 다 보여주면 장기판의 ‘졸’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전략적 행보를 하려면 무엇보다도 감정에 지배되어서는 안된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면밀히 분석하고 치밀하게 전략을 짜야 하는데, 감정이 앞서면 상황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래도 우리는 바둑을 두어야 한다

대국을 할 때 화를 내거나 들떠 있다면 좋은 바둑을 두기는 어려울 것이다. 이따금 화가 나서 돌을 꽝꽝 두들기며 두는 사람이 있는데 이런 사람이 이기는 경우는 거의 없다. 흥분된 상태에서는 정확한 상황 판단과 냉정한 수 읽기가 결여되기 쉽다. 감정이 눈앞을 가릴 때 효과적인 전략이나 멋진 묘수가 제대로 보일 리 없다.

그런데 한국인은 대체로 이성보다 감정이 우세하다는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정이 많은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의 잘못도 관대하게 봐주는 경우가 많다. 집안에 들어온 범인도 불쌍히 여겨 숨겨주려고 한다. 이치상으로 보면 죄를 지을 경우 법에 따라 적절한 처벌을 받는 것이 맞을 것이다. 물론 정이 많은 것이 나쁜 것은 아니다. 남과 친교를 맺을 때 도움이 된다. 외국인 중에도 한국인의 이런 점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러나 이런 것이 국가전략에까지 영향을 줘서는 안된다. 특히 국가 지도자는 감정적인 발언이나 행보를 삼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로 인해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다. 수뇌부가 감정에 치우쳐 속내를 모두 드러내면 상대의 전략에 맞설 카드가 없다. 허허실실을 쓸 수가 없는 것이다.

여러 문제에 전략적으로 대응하려면 또한 수 읽기가 필요하다. 현재의 상황을 정확히 읽고 효과적인 대안을 찾아내야 한다. 이것은 기업의 경영 전략이나 개인의 문제 해결에서도 마찬가지다. 모든 문제 해결은 사실상 가장 효과적인 대안을 찾아내는 것이다. 때로는 뾰족한 대안이 없을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지도자를 뽑으려는데 적임자가 없어 보이는 경우다. 이런 경우 기권을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이것은 현명한 방법이 아니다. 선택 가능한 대안 중에서 그래도 가장 유리한 쪽을 선택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요즘 우리는 대안을 찾기 어려운 여러 가지 문제에 휩싸여 있다. 북한 핵 개발, 중국의 사드 보복, 탄핵으로 인한 갈등, 일자리 부족, 경제 추락 등…. 게다가 인공지능 기술 경쟁으로 극심한 사회 변화까지 예고된다. 이런 문제들에서 분명한 해답은 없어 보인다. 원래 인간 세상의 많은 문제는 정답이 없는 불분명한 특징을 갖고 있다. 이런 문제들을 ‘비구조화된 문제’라고 한다.

그래도 우리는 바둑을 두어야 한다. 좋은 수가 없다고 장고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대안이 없는 가운데서도 지혜를 모으면 최선 또는 차선이라고 하는 수는 있게 마련이다. 우리 앞에 전개되는 상황을 세밀히 모니터하고 그것을 분석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대안을 모색해 효과적인 전략을 찾아내야 한다. 그 전략을 함부로 떠들면 안 되며 허허실실로 패를 알 수 없게 할 필요가 있다.

정수현 -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

1379호 (2017.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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