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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준의 디지털 인문학] 21C 격변 시대의 ‘등불’ 인문학 재발견 

 

김경준 딜로이트 안진경영연구원장

21세기 첨단기술의 시대에 전통적 인문학이 새로운 트렌드를 형성하는 역설적 상황이다. 역사·철학·문학에서 심리학·인류학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경영자의 필수지식 또는 직장인의 교양으로 부각되고 있다. 창의력이 중요해지는 융합시대에 다양한 인문학 분야를 접하면서 새로운 지식과 접근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려 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또한 과거 궁핍한 시절에는 당장 먹고 사는 문제에 집중해야 했지만, 일정 수준 경제가 발전하면서 인간과 사회, 문화와 예술로 관심사가 확대되는 것도 마찬가지 흐름이다. 하지만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인문학의 다양한 관점은 소화하기가 쉽지 않은 것도 현실이다.

인간의 행동을 탐구하는 사회과학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을 관측할 수 있고, 자연의 본질을 탐구하는 자연과학은 실험과 측정을 통해 객관적으로 접근할 수 있다. 그러나 인문학은 대상인 인간 본성 자체를 명확히 규정하기 어렵고 시간의 흐름과 처한 환경에 따라 변동하는 백인백색(百人百色)의 특성이 있다.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사피엔스(생각하는), 호모루덴스(놀이하는), 호모파베르(도구를 사용하는), 호모이코노미쿠스(경제하는), 호모폴리티쿠스(정치하는) 등 다양한 단어는 각각 인간의 특성을 나타내지만 또한 모든 특성을 포괄하지는 못한다. 나아가 역사·철학·문학 등에서도 각기 주장하는 수많은 논리와 입장은 모두 그 자체로 정당성과 완결성을 가지고 있게 마련이다. 나아가 일부에서는 인문학을 마치 21세기 혼돈 시대에 인간성을 구원하는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여기는 거품 현상까지 느껴진다. 이러한 배경에서 경영자와 일반인의 관점에서 인문학에 대한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접근방식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대표 기업의 글로벌 시장 진출이 본격화하면서 기업 경쟁력의 핵심이 과거 설비를 중심의 하드파워에서 기업문화, 혁신역량, 리더십과 같은 소프트파워로 이동했다. 이에 따라 소프트파워의 원천인 인간과 조직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장할 수 있는 접근방식에 대한 관심이 점차 커지고 있었다. 더욱이 일부 국내 기업이 글로벌 경쟁의 선두로 부상하는 가운데 과거의 추종자(Catch up) 전략이 한계를 보이면서 미래를 주도하는 선도자(First Mover) 전략으로의 전환이 불가피한 상황이 전개됐다. 나아가 21세기 글로벌 경제의 특징인 창의력·융합 등이 화두가 되는 디지털 혁명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면서 기업인들이 시장과 고객, 기술이라는 기존의 관점을 확장해 역사·철학·문화·예술을 통한 새로운 지식과 접근방식에 대한 아이디어를 얻으려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우리나라를 강타한 인문학 트렌드의 기폭제는 2011년 스티브 잡스의 아이패드 발표회장이었다. 1955년생인 스티브 잡스는 56세의 길지 않은 삶에서 PC·애니메이션·음악·스마트폰·태블릿·디지털 출판의 6가지 혁신을 주도했다. 하지만 초라한 출발에 굴곡진 삶을 살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시리아 출신 미국 유학생과 미국인 여대생 사이의 사생아로 출생해 입양돼 자랐고, 70년대 초반 대학 1년 중퇴 후 히피 생활을 하는 등 일종의 일탈기간을 거친다. 76년 애플을 설립하고 84년 매킨토시로 크게 성공했지만 이듬해에 애플에서 축출되었고, 디지털 애니매이션 사업을 시작해 토이스토리를 성공시키면서 96년 애플에 복귀했다. 2000년대 들어 아이팟·아이튠스·아이폰 등의 연이은 성공으로 오른 정점에서 세상을 떠나는 삶은 출생의 비밀, 성장기의 방황과 고난, 절정에서의 죽음 등 전형적인 영웅담의 서사구조를 담고 있다.

스티브 잡스는 2011년 3월, 아이패드2 발표회장에서 ‘사람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애플의 DNA는 기술(technology)을 자유교양(liberal arts) 및 인문학(humanities)과 결합시키는 데 있다고 언급했다(It is in Apple’s DNA that technology alone is not enough? it’s technology married with liberal arts, married with the humanities, that yields us the results that make our heart sing). 월터 아이작슨이 쓴 스티브 잡스의 정식 전기(正傳)에 “어릴 때부터 항상 저 자신이 인문학적 성향을 지녔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전자공학도 무척 맘에 들었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저의 영웅 중 한 명이었던 폴라로이드의 에드윈 랜드가 한 말을 읽었어요. 인문학과 과학기술의 교차점에 설 수 있는 사람들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그걸 읽자마자 저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결심했지요”라는 회고가 있다(에드윈 랜드는 1907년생으로 47년 폴라로이드 카메라를 출시한 혁신가이다). 스티브 잡스가 언급한 ‘기술과 인문학의 만남’은 우리나라에서 강력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잡스가 추구한 지향점은 우리가 통상적으로 사용하는 ‘문사철(文史哲)’의 인문학보다는 자유교양의 예술적 심미안에 가까운 개념으로 ‘기술과 예술’ 또는 ‘기술과 자유교양’의 만남을 통한 상상력과 아이디어의 확장으로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감성의 융합’에 해당한다.

최근 인문학 열풍을 타고 인문학을 공부하고 관련 소양을 갖추면 조직과 개인의 창의력도 높아지고 조직문화도 건전해진다는 단선적 논리로 접근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인간의 지식이 모두 그러하듯 지식 자체의 완전성에도 한계가 있게 마련이고, 인문학의 특성상 인간과 사회를 파악하는 입장과 논리도 다양하다. 인문학에 다가갈 때 균형감을 상실하고 편식하게 되면 협소한 세계관과 인간관에 매몰돼 고담준론에 머무르는 부작용도 생겨난다. 실제로 일부 회고적 인문학은 자연과 문명, 인간과 기술을 대립시키고 문명과 기술의 발전에 따라 상실되어가는 자연과 인간에 대한 추도사와 같은 분위기조차 풍긴다.

21세기 격변의 시대에 인문학을 통해 삶과 세상의 본질을 성찰하고 관점을 확장하려는 접근의 일환이라는 관점에서 인문학의 재조명은 반가운 현상이다. 하지만 매사가 그러하듯이 과유불급이고 균형이 필요하다. 인문학은 문명과 기술에 대한 대립각을 세우기 위한 것도 아니고 현실 문제에 대한 만병통치 약도 될 수 없다. 다만 인문학을 통해 개인의 삶과 조직의 현실을 긴 호흡으로 성찰하면서 현재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는 등대의 역할을 기대하는 것이 현실적이다.

필자는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1세기 글로벌 기업과 산업의 변화를 이해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융합형 경영전문가로 평가받는다.

1392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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