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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50주년 맞은 아세안] 반공연합에서 글로벌 성장 거점으로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회원국 전체 GDP 약 120배 늘어 ... 2020년까지 ‘정치안보공동체’ 등 설립 예정

▎8월 7일 오전(현지시간) 필리핀 마닐라의 ‘필리핀 인터내셔널 컨벤션 센터(PICC)’에서 열린 ‘아세안+3(한·중·일)’ 외교장관 회의에서 각국 외교장관들이 손을 맞잡고 있다. / 사진 : 연합뉴스
8월 8일로 설립 50주년을 맞은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에 세계의 눈길이 모인다. 애초 ‘반공연합’으로 출발했던 아세안은 지난 반세기 동안 ‘경제공동체’로 성격이 크게 변하면서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뤘기 때문이다. 한국과도 밀접한 경제 파트너다. 식민지 지배에서 갓 벗어난 저개발 지역의 국가연합으로 출발한 아세안은 발족 이후 현재까지 회원국의 전체 국내총생산(GDP)이 약 120배가 늘어 이제는 주요 ‘글로벌 성장 거점’으로 주목받고 있다.

아세안은 1967년 8월 8일 방콕에서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태국·필리핀·싱가포르의 5개국으로 창립됐다. 이후 1984년 브루나이가 추가 가입했으며 1995년 ‘어제의 적’이었던 베트남이 회원국이 됐다. 1997년에는 라오스·미얀마가, 1999년에는 캄보디아가 각각 가입해 회원국이 10개로 늘었다. 중국과 남중국해 해상 통항권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고 회원국 간에도 일부 문제가 있기는 하지만 아세안은 동남아의 구심점으로 확고하게 자리 잡으며 지역 발전을 견인하고 있다.

동남아 신생 독립 국가의 ‘말레이 민족 대통합’ 이상론에서 출발: 1967년 8월 8일 태국의 수도 방콕에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싱가포르·태국의 외무장관이 모여 아세안 설립 선언, 이른바 방콕선언을 채택했다. 아세안의 발족이다. 그런데 아세안의 발족까지는 우여곡절이 많았다. 이상론과 현실론이 충돌하기도 했다. 독특하게도 지역 경제통합을 위한 아세안의 발족은 신생 독립 국가들의 영토 분쟁에서 시작됐다.


아세안을 발족한 5개국 중 서방의 식민지가 된 적이 없이 독립을 유지했던 태국을 제외한 나머지 4개국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서구국가에서 독립했다. 필리핀은 1946년 미국으로부터, 인도네시아는 1949년 네덜란드로부터, 말레이시아는 말라야연방이라는 이름으로 1957년 영국으로부터 각각 독립을 이뤘다. 싱가포르는 1963년 영국에서 독립해 말라야연방에 가입했다. 당시 말라야연방은 싱가포르와 함께 보르네오섬 북부의 사바와 중북부 사라와크 지역까지 하나로 합치면서 나라 이름을 말레이시아로 바꿨다. 이 가운데 싱가포르는 1965년에 말레이시아에서 벗어나 독립 국가를 이뤘다.

그런데 북보르네오 섬의 옛 영국 식민지 사바 지역이 말레이시아와 통합하기 직전 바다 건너 북쪽의 필리핀이 영유권을 주장하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영토 분쟁은 필리핀이 독립을 얻기 전 미국의 자치령이던 시절(1935~1946년)부터 싹이 텄다. 독립 후 필리핀의 9대 대통령 디오스다도도 마카파갈 대통령(재임 1961~1965년)은 사바 영유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방안으로 필리핀과 말라야 연방이 국가통합을 이뤄 ‘대 말라야 연방’을 결성하는 구상을 발표했다.

이는 아세안 결성의 씨앗이 됐다. 아세안은 동남아시아 주민들의 민족적인 자각에서 비롯한 셈이다. 이를 위해 1961년 태국·필리핀·말라야연방이 결성한 동남아시아연합(ASA)이 맹아에 해당한다. 동남아시아의 이론적인 ‘말레이족’을 모두 합쳐 국가연합을 이루자는 ‘마필리도(말라야+필리핀+인도네시아) 통합 구상’의 영향으로 동아시아연합(EAN)라는 연합체도 생겼다. 이런 동남아 민족운동 연합체가 모두 발전적으로 해산하고 1967년 새롭게 발족한 것이 아세안이다. 당시 베트남전으로 동남아가 공산화 도미노를 우려하던 당시 지역에서 반공주의 입장을 보인 5개국이 힘을 합쳐 아세안을 결성한 것이다.

여기서 눈여겨볼 점은 ‘마필리도 통합 구상’이다. ‘마필리도’라는 개념은 필리핀 정치가로 자치령 시절 카마리네스 노르테 주지사와 하원의원을 각각 지낸 웬스슬라오 빈손스(1910~1942년)가 제안한 것이다. 그는 1941년 일본군이 필리핀을 점령한 이후 무장 항일게릴라 운동을 벌이다 체포돼 총살당했다. 그는 동남아의 말레이 인종을 통합해 ‘말레이 이레덴타(실지회복 또는 민족통일이라는 이탈리아어)’를 구성해 강력한 지역 통일체를 구성하는 이상을 꿈꿨다. 마필리도는 서구 강대국의 식민지화 과정에서 인위적이고 강대국 편의에 맞춰 국경선이 그어진 현실을 비판하고 동남아 지역의 인종을 하나로 묶는 구상이다. 이는 1896년 스페인군에 총살당한 ‘필리핀 독립운동의 아버지’ 호세 리잘(1861~1896년)의 꿈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실은 이상과 달랐다. 말레이연방은 옛 식민지 종주국 영국의 지도를 받아 인근의 옛 영국 식민지를 통합하는 과정에서 이에 반대하는 일부 지역에서 1962년 반란이 발생하자 영국군의 도움을 받아 진압했다. 내심 보르네오섬 북부의 영국 식민지를 차지해 이 섬 전체를 자국 영토로 삼고 싶었던 인도네시아는 이를 계기로 말레이시아를 ‘신식민주의’라고 비난하면서 사이가 틀어졌다.

상황이 이렇게 돌아가자 마카파갈도 자신이 구상을 수정해 새로운 통합국가의 범위를 인도네시아로 확대한 ‘대말레이시아 연방’ 구상을 내놨다. 그는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의 협력을 받아 말레이연방에 이를 제시했다. 하지만 말레이연방과 말레이시아연방의 초대 총리인 툰쿠 압둘 라만(재임 1957~1970년)은 이 제안에 양보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나타냈다. 이에 따라 이 이상적인 제안의 실현은 현실적으로 벽에 부딪혔다. 하지만 1963년 5월 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 대통령과 말레이시아의 라만 총리가 정상회담을 하면서 논의에 물꼬가 터졌다. 두 정상은 ‘대말레이시아 연방’ 구상을 바탕으로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의 3개국이 함께하는 지역협력체 구성에 합의했다. 이는 마카파갈이 내놓은 마필리도 제안의 현실화를 향한 첫걸음이었다.

6월에는 마닐라에서 3개국 외무장관 회담이 열려 마필리도의 설립과 경제·사회·문화 협력을 명기한 마닐라협정을 맺었다. 7월에는 3개국 정상이 참석해 마닐라선언을 통해 이를 확인했다. 마닐라선언은 북보르네오의 영국 식민지인 사바와 사라와크가 말레이연방에 귀속될지를 주민의 의사를 물어서 결정하기로 하고 이를 유엔에 요청했다.

이에 따라 1963년 유엔조사단이 이 지역에 파견돼 주민 의사 조사를 실시했지만 필리핀과 말레이시아의 옵서버 참가가 허용되지 않으면서 조사 실시가 불투명해졌다. 이런 와중에 라만 총리와 말레이연방 정부는 사바와 사라와크, 그리고 싱가포르가 참가하는 말레이시아 연방 구성을 발표해버렸다. 이는 마닐라선언의 합의를 어긴 것이었다. 말레이시아 연방의 구성이 발표된 이틀 후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와 국교를 단절했다. 동남아 통합을 위한 말레이 민족 대통합 구상은 이렇게 좌절됐다. 마필리도라는 이상은 영토와 자국이기주의라는 현실 앞에 여지없이 무너졌다.

이처럼 당시 동남아시아 지역 국가들은 내부적으로 정치와 경제가 불안정했을 뿐 아니라 신생국끼리도 갖가지 분쟁과 불화로 혼란의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상호 불신 속에 이웃나라는 ‘사촌’이 아니라 ‘우환’이었고 잠재적인 ‘위협’이었다. 작은 나라들은 서로 손잡고 도와줄 제휴 국가나 기구의 필요성을 절감할 수밖에 없었다. 공산주의라는 공동의 적도 눈앞에 있었다. 당시엔 베트남 전쟁이 한창이었기 때문이다. 남베트남과 공산게릴라 간의 전쟁이었지만 실상은 미국과 소련의 대리전이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는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주변 나라로 공산주의가 확산한다’는 도미노 이론이 적용될까 불안에 떨었다. 아세안이 설립된 가장 강력한 원동력은 공산화의 위협이었다. 당시 아세안 설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도네시아의 아담 말리크 외무장관은 “각 나라가 외부에서 오는 악영향에 맞서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한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반공연합에서 경제협력체 거쳐 경제안보사회문화 공동체로: 애초 범말레이족 연합 논의에서 시작해 현실적인 반공연합으로 발족한 아세안은 1975년 베트남이 공산화하고 미국이 이 지역에서 떠나면서 리콴유 싱가포르 총리의 말처럼 ‘권력의 공백’이 생겼다. 동남아 지역에 베트남과 캄보디아 등 공산정권이 차례로 들어서자 아세안은 반공연합 성격을 더욱 강화했다.


▎아세안 설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인도네시아의 아담 말리크 외무장관은 “각 나라가 외부에서 오는 악영향에 맞서 스스로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강한 힘을 기르기 위해서”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하지만 1990년대 초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가 무너지고 냉전이 종식되면서 아세안은 전략을 수정했다.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 등 사회주의 국가도 참가시키는 전략을 구사했다. 대립하지 말고 품으면서 아세안의 성격을 반공연합에서 경제협의체로 전환하기 시작한 것이다. 인도차이나를 전장에서 시장으로 바꾸겠다는 의도였다. 이를 위해 우선 1992년 아세안 자유무역지역(AFTA)을 결성하고 역내 관세를 단계적으로 인하하기 시작했다. 마침 대외개방 정책인 도이모이를 시작한 베트남을 시작으로 라오스·미얀마·캄보디아가 아세안의 품에 들어왔다.

10개국의 진용을 갖추면서 아세안은 규모와 세력 면에서 세계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2003년 정상회담에선 2020년까지 ‘정치안보공동체’ ‘경제공동체’ ‘사회문화 공동체’를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2015년 말에는 아세안 경제공동체(AEC)가 먼저 발족해 지역통합으로 큰 걸음을 성큼 내디뎠다. 아세안의 발전은 동남아 번영이 기반이다.

메가 FTA 추진하며 글로벌 경제 허브로 발돋움: 아세안 10개 회원국의 2016년 국내총생산(GDP) 총합은 약 2조8000억 달러에 이른다. 아세안의 야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여전히 목이 마르다. 아세안은 한국·중국·일본과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해 수출을 확대하고 있다. 여기에 아세안과 아세안+3 회원국인 한국·중국·일본, 그리고 인도·호주·뉴질랜드 등 모두 16개국이 참가하는 다자간 메가 FTA인 ‘역내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도 추진 중이다.


아세안은 회원국의 체제와 주민들의 문화적 배경이 상당히 균질한 유럽연합(EU)와 내부 구성이 사뭇 다르다. 초기 말레이족 주도의 통합 논의 때와 달리 현재는 민족(말레이족·타이족·킨족·크메르족·버마족 등)과 종교(이슬람·불교), 정치체제(민주주의 시장경제와 일부 완화된 사회주의 중앙통제경제)가 서로 다른 이질적인 국가들이 모여 있다. 이런 나라들이 모인 상황에서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한 장치가 ‘내정 불간섭’ 원칙이다. 이해관계가 다른 국가들 간의 충돌을 막는 아세안의 지혜다.

하지만 최근 중국의 부상으로 이에 대한 대응 방식을 놓고 아세안 국가 중에는 회원국 간에 분열 조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남중국해에 해상기지를 건설하고 해상영유권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는 중국에 대해 특히 관련국인 베트남·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 등은 예민한 입장이다. 하지만 일부 내륙국은 중국에 기우는 입장이다. 중국에 제안하는 원조나 경제협력, 인프라 건설 제안이 워낙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역내 교통망 정비 착착 진행 … 중화경제권 남방한계선 확장: 현재 중국과 아세안 국가는 메콩강 유역에서 국경을 넘는 교통망 정비 작업을 계획하고 있다. 중국은 윈난성 쿤밍에서 베트남 북부 하이퐁항, 태국의 수도 방콕을 잇는 고속도로 건설을 각각 계획하고 있다. 태국에서는 방콕에서 말레이 반도를 남북으로 종단해 남단의 싱가포르까지 잇는 철도 건설을 계획 중이다. 쿤밍에서 출발해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얀를 거쳐 방콕으로 이어지는 철도 건설도 계획하고 있다. 쿤밍에서 출발하는 철도는 고속철도로 건설될 예정이다 이는 중국이 추구하는 ‘일대일로’ 건설과 관련이 크다.

눈에 띄는 것은 인도차이나 반도를 동서로 횡단하며 아세안 회원국끼리 연결하는 교통망 건설 계획이다. 인도차이나 반도 동서 횡단 회랑이다. 베트남 중부의 남중국해 항구인 다낭에서 라오스와 태국을 서에서 동으로 가로질러 미얀마 동남부의 인도양 항구인 다웨이까지 잇는 고속도로가 계획 중이다. 베트남 남부의 호치민에서 캄보디아를 지나 태국의 방콕을 연결한 뒤 다시 미얀마의 인도양상 항구인 모울메인까지 달리는 고속도로도 계획 중이다.

이 도로가 활성화하면 해적들의 위협에 상존하는 말라카 해협을 회피하는 수송로와 원유 운반로가 만들어진다. 중국은 쿤밍에서 미얀마를 잇는 파이프라인 건설도 계획 중이다. 중국으로서는 아세안 지역, 특히 인도차이나 반도 교통 인프라 구축 사업에 투자해 엄청난 이익을 얻을 수 있는 셈이다. 아세안 국가들은 물류망이 생기니 그야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형국이다. 다만 이를 통한 아세안의 중국 경제 의존이 더욱 가속화할 가능성은 아세안이 중화경제권의 남방한계선 연장에 활용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창설 50년을 맞는 아세안의 앞길에 대한 국제적인 관심이 모이는 이유다. 한국 경제가 아세안에 눈길을 주는 이유이기도 하다.

1398호 (2017.0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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