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김경준의 디지털 인문학] 고체가 아닌 액체로서의 인문학 

 

김경준 딜로이트 컨설팅 부회장

조선왕조 말기의 혼란기인 1894년 전라남도 고부에서 군수 조병갑의 탐학에 항거해 녹두장군 전봉준의 주도로 농민봉기가 발생했다. 이를 배경으로 1962년 나온 신영균 주연의 영화 타이틀이 [동학난]이었으니 당시까지 통칭되었던 명칭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동일한 사건이 오늘날에는 ‘동학농민운동’ ‘동학농민혁명운동’ ‘갑오농민전쟁’ 등으로 지칭되고 있다. 최소한 동학난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사용하지 않는 것은 분명하다.

1980년대 초반 에드워드 카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가 인기를 끌었다.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문구로 유명한 책으로 역사를 역사가의 해석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한다. “역사가와 역사의 사실은 서로 꼭 필요한 것이다. 사실을 갖지 못한 역사가는 뿌리가 없는 셈이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 역사가가 없는 사실은 생명없는 무의미한 것이다.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의 부단한 상호작용의 과정, 즉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 이다.”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이며, 따라서 이러한 변화는 현재의 가치와 관점에 따라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해석돼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동학난’으로 불리었던 사건의 명칭이 변하는 배경이 설명된다. 1894년 농민봉기가 발생한 시점의 조선왕조 입장에서는 명백한 반란이므로 동학난으로 규정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이후 근대화의 관점에서 보면 농민봉기는 부패하고 무능한 정부에 대항해 구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질서의 수립을 요구하는 농민운동 혹은 농민혁명운동으로 성격을 규정할 수 있다. 농민봉기라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지만 이를 해석하는 관점은 변하고 재해석되기 때문에 명칭이 변경됐다고 설명된다.

저명한 과학사가 토마스 쿤은 1962년 출간한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과학의 발전도 직선적이 아니라 나선형적이며, 발전과정 자체도 동태적인 패러다임 변화라는 관점에서 설명했다. 예를 들어 ‘태양은 지구를 돈다’ ‘지구는 평평하다’와 같은 이론이 정상과학으로 인정받는 지배적 사고방식인 패러다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기존 패러다임이 설명하지 못하는 변수가 발견되고 이를 설명하려는 과정에서 기존의 정상과학을 부정하는 새로운 사고방식인 ‘지구가 태양을 돈다’ ‘지구는 둥글다’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한다.

신구 패러다임이 경쟁하고 갈등하면서 기존 정상과학은 위기를 맞고 과학혁명은 시작된다. 이 과정에서 대부분의 과학자들은 기존의 패러다임을 지지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공격하면서 일종의 과학자 사회 내부의 역학관계가 활성화된다. 그러나 새로운 패러다임의 타당성이 입증되고 지지자가 늘어나면서 기존 패러다임은 물러나고 새로운 패러다임이 정상과학으로 자리잡는다. 과학의 발전이란 이러한 역동적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진다.

실제로 폴란드 출신 코페르니쿠스가 1543년 ‘천체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논문에서 ‘지구가 태양을 돈다’라는 지동설을 주장할 당시의 정상과학 패러다임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이었다. 당시의 과학적 지식으로는 천동설을 뒷받침하는 증거도 많았고 지동설이 정확하다고 확정할 수 있는 근거도 부족했기에 대부분의 천문학자들은 세계관을 바꾸는 혁명적인 주장에 비난을 퍼부었다. 지동설은 코페르니쿠스가 세상을 떠나고 200년 후에 뉴튼이 만유인력(중력)을 발견하고서 정상 과학 패러다임으로 받아들여졌다.

과학적 분석을 토대로 인류 문명에 대한 경고로 자주 제기되는 석유와 자원의 고갈 문제를 예로 들어 보자. 서유럽의 지식인들로 구성된 로마클럽은 1972년 ‘성장의 한계’라는 보고서를 출간했다. 인구 증가, 공업생산, 식량생산, 환경오염, 자원고갈의 다섯 분야에 대해 1900년부터 1970년까지의 자료를 바탕으로 2100년까지 추이를 예측했고, 인구가 현재 속도로 증가하고 자원소비가 계속되면 현대문명은 100년 이내에 한계에 도달할 것으로 전망했다. 나아가 20년 후인 1992년 발간된 개정판에서는 ‘석유와 천연가스가 각각 2031년과 2050년에 고갈될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오늘날에 석유와 천연가스 가격이 오히려 하락해 관련 업계가 고통을 받고 있다. 이는 1972년 지식인들의 사고범위가 정태적이고 기술 변화의 가능성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도 셰일가스의 존재는 알았으나 상업적 생산기술의 잠재력을 과소평가했고, 당초 예상과는 반대로 탐사기술이 발달하면서 심해유전을 비롯해 확인된 에너지 매장량은 증가했다.

과학적 분석에 입각한 주장조차도 이처럼 동태적으로 논쟁을 거치면서 실체에 접근한다. 즉 과학도 고체처럼 고정적으로 존재하면서 지식의 축적에 따라 직선적으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정상과학과 새로운 비정상과학을 지지하는 과학자 사회 내부의 갈등과 경쟁을 거치면서 발전하는 동태적 과정이다. 역사를 비롯한 인문학도 고체가 아니다. 역사가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통해 재해석되면서 액체처럼 유동적으로 변화하듯이 인문학도 고체처럼 고정되지 않고 액체처럼 시간이 흐르면서 관점이 변화하고 지배적 패러다임이 교체된다. 또한 개인적 소양의 차원에서도 20대에 읽던 공자의 논어와 50대에 읽는 논어는 수용도가 다르다. 이는 시간이 흘러 나이가 들고 삶의 경험이 쌓이면서 동일한 콘텐트라도 이해의 폭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종교는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 주고 삶의 완성도를 높이는 순기능을 하지만 극단적으로 흘러서 광신이 되면 반대로 갈등을 일으키고 분열을 조장하는 역기능을 가져온다. 마찬가지로 지식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만 편협하고 왜곡된 지식은 오히려 인간의 현실적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양면성이 있다. 그나마 신앙의 대상인 종교의 교리는 속성상 불변의 진리를 전제하지만 인문학은 인간이 이해하는 세계관에 기반한 지식이기에 끊임없이 변화하고 재해석되는 영역이다. 완전하지 못한 인간의 지식은 끊임없이 확장되고 발전해야 하지만, 지식을 받아들이는 주체인 인간이 이러한 지식의 확장성과 변동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기존 지식에 매몰돼 새로운 지식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화석이 된다. 따라서 인문학을 포함한 모든 지식의 오류 가능성에 대해 일정한 여지를 두어야 새로운 사고와 변화를 받아들일 수 있다.

※ 필자는 딜로이트 컨설팅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21세기 글로벌 기업과 산업의 변화를 이해하면서 인문학에 대한 조예가 깊어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융합형 경영전문가로 평가받는다.

1413호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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