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김영란법과 '더치페이’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2016년 9월 28일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이 시행됐다. 얼마 전이 법의 시행 후 1년 간의 변화를 국회 예산정책처에서 발표했다. 이 부서가 지난해 4분기부터 올해 3분기까지 1년 간의 법인카드 사용내역을 조사한 결과 유흥업소의 법인카드 결제승인 금액은 1조78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8% 감소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일반음식점에서 쓴 금액은 17조6770억원으로 6.2% 증가했다. 고급 술집 소비가 준 반면 일반음식점 소비는 늘어난 것이다. 상품권 구입 규모와 특급호텔에서 사용한 액수는 더 줄어 전자는 14.0%, 후자는 8.7% 줄었다. 골프장 내 사용금액도 전년의 6.2% 증가에서 법 시행 후 0.3% 증가에 머물렀다. 다만 농축수산물 관련 카드 사용액은 2조7480억원으로 오히려 26.8%나 늘었는데 이를 보도한 언론 기사는 ‘선물에 대한 사회적 시선이 부담되면서 5만원 이하 농수산물 선물을 선호했기 때문’이라 분석했다.

‘청탁과 이에 관련한 부정과 비리를 예방한다’는 이 법의 궁극적인 목표 달성 여부는 시간이 훨씬 더 지나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위의 결과로 판단컨대 이 법 시행으로 사람들 간의 ‘교제’ 및 관련 소비 형태에 확실히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필자 주위에서도 ‘3-5-10’의 원칙을 크게 의식하고 있고 이를 준수하는 분위기가 많이 퍼져있는 것이 피부에 와 닿는다. 특히 ‘N분의 1’ 관행이 정착되는 모습이다. 얼마 전에는 고등학교 동창 하나가 자축할 일이 있어 공무원이나 교수, 기자가 포함된 동창을 초대해서 저녁 식사를 대접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술을 많이 마시면서 계산 시점에 1인당 3만원이 넘어설 것 같자 이들 직업에 종사하는 친구들이 ‘N분의 1’을 물어보고 각자 계산한 일도 있었다. 한사코 말려도 이른바 ‘더치페이’를 한 것이다.

그런데 이 더치페이란 말은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예전에 이를 미국에서 쓰는 용어라고 알고 있던 필자는 정작 미국인들은 알아 듣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사실에 조금 놀란 적이 있다. 중학교 3학년이었던 시절에 필자가 배우던 영어 교과서의 한 단원의 제목은 ‘네덜란드(The Netherlands)’였다. 그 내용에는 풍차와 긴 제방 이야기가 나온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그 단원에서 네덜란드를 가리키는 말이 ‘홀랜드(Holland)’가 있다는 사실과 함께 그 형용사가 ‘더치(dutch)’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필자의 경험은 차치하더라도 ‘김영란법’ 시행 이후 언론에서는 식당에서 ‘더치페이(Dutch Pay)’가 크게 늘었다고 보도하고 있다. 주지하다시피 ‘더치페이’란 식사나 서비스 등을 같이 누렸던 일행이 그 비용을 공평하게 분담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이는 사실 ‘콩글리시’ 즉 한국식 영어이다. 원래 이런 경제적 관행을 일컫는 영어는 ‘더치트리트(dutch treat)’이다.

이런 관행에 왜 네덜란드를 뜻하는 명칭이 붙여졌을까? 이를 알기 위해서는 네덜란드의 역사를 조금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네덜란드는 원래 게르만족이 사는 땅이었으나 로마가 점령해 오랫동안 지배했다. 이후 로마가 쇠퇴하자 이에 다시 게르만족이 남하하면서 이 땅은 게르만족의 수중에 다시 들어왔지만 신성로마제국, 프랑크 왕국, 스페인 등의 지배를 받으며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지 못했다. 하지만 종교개혁 이후 개신교 세력이 강해진 이 지역이 ‘종교의 자유’ 확보를 명분으로 16세기 말에 드디어 독립을 하게 됐다. 이미 상인의 세력이 강했던 이 지역의 독립 과정은 스페인과의 전쟁 등 험난했으나 독립 이후에는 해외 진출을 적극 추진해 17세기에 들어와 그 꽃을 피우게 되었다. 17세기 초 ‘동인도 회사’를 세워 동남아시아와 유럽과의 무역을 주도했으며, 인도네시아도 사실상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그 무렵 ‘서인도 회사’도 세워 신대륙 시장의 개척에도 적극적이었다. 이 시기에 오늘날의 맨해튼에 정착지를 건설하고 그 이름도 ‘뉴암스테르담’이라 지었다. 17세기 중반부터는 나가사키를 기지로 서양과 일본 간의 무역도 주도했다. 이렇듯 네덜란드의 함선들이 세계의 바다에서 크게 활약한 17세기는 이 나라의 황금기였으며, 당시 암스테르담은 세계 최대의 항구였다.

이런 네덜란드의 해외 진출 과정에서 가장 강력한 경쟁자로 등장한 것이 영국이다. 이 나라는 17세기 중에만 영국과 세 번의 큰 전쟁을 치를 정도였다. 이 세 차례의 전쟁에서도 영국이 이 나라를 제대로 이겨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당연히 영국 국민들 사이에서도 이 강력한 경쟁자에 대한 감정은 좋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더치’가 들어가는 단어는 무조건 부정적인 함의가 붙여지게 된 것이다. 실제로 20세기 초까지도 네덜란드 사람 앞에서 ‘더치’라는 말을 쓰면 ‘심각한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고 한다.

사실 이 ‘더치’라는 말은 나쁜 뜻이 아니다. 이 단어는 오늘날 독일인의 별칭인 ‘도이치(deutsch)’와 어원이 같으며 뜻도 그냥 ‘사람의’ ‘민족의’를 뜻하는 형용사이다. 원래 이 단어는 17세기 전까지는 독일인을 통칭하는 말로 쓰였다. 독일이나 네덜란드나 모두 신성로마제국 또는 프랑크 왕국의 일부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17세기 들어와서 이 지역 중 ‘낮은(nether)’ ‘땅(land)’, 즉 네덜란드에 사는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로만 통용되기 시작했다. 그전까지 현재의 독일 땅에 사는 사람들의 별칭은 ‘하이 더치(High Dutch)’, 네덜란드에 사는 사람들의 별칭은 ‘로우 더치(Low Dutch)’였다.

네덜란드인들은 뛰어난 상재(商才)를 가진 것으로 유명했다. 앞서 언급한대로 맨해튼에 맨 먼저 정착한 사람들도 이들이고, 정착생활 초기부터 이 지역에서 주식·채권 등을 거래하여 훗날 이곳이 세계의 금융수도가 되는 주춧돌을 놓은 주인공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동시에 셈도 철저해 식사를 같이 해도 각자가 자기 몫을 계산하는 것은 물론 손님을 대접할 때도 예외가 아니었다고 한다. 극심한 경쟁 관계였던 영국인들의 눈에는 이도 ‘각박하고, 지독한’ 관행으로 보였고, 이에 그들은 여기에다 아예 ‘더치트리트(네덜란드식 손님 대접)’라는 이름까지 붙일 정도였다.

최근 ‘김영란법’의 시행령을 개정하자는 움직임이 가시화됐다. 특히 중고가 농수산물에 대한 수요를 억압한다는 이유로 이 상한선을 올리려는 시도는 1차 좌절됐지만 조만간 관철된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이 법의 기본 취지와 효과는 그대로 유지될 것 같다. 다만 법 시행 이후 확산 추세에 있다는 ‘더치트리트’, 즉 ‘더치페이’가 앞으로도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릴 수 있을지는 좀 더 두고 볼 일이다. 체면을 중시하는 한국인들의 오랜 손님 접대 문화가 일개 법의 시행으로 바뀔 것이라고 예상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박정희 정부에 의해 한 때 없어질 것으로 보였던 ‘구정(舊正)’이 끈질긴 생명력으로 부활한 것이 그 방증이다. 하지만 이렇다고 해서 부정과 비리의 관행까지 같이 부활하지는 않길 바란다.

1413호 (2017.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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