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둑 기록 남긴 이순신: 한국은 바둑 최강국으로 군림해왔지만 아쉽게도 우리 조상들이 바둑에 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선비들이 읊은 바둑에 관한 시가(詩歌)는 꽤 많은데, 기보는 거의 없고 바둑을 둔 일화도 그다지 많지 않다. 그런 가운데 바둑을 두었다는 기록을 많이 남긴 이가 있다. 바로 성웅 이순신 장군이다. 이순신 장군은 [난중일기]에서 바둑 얘기를 10여 차례 하고 있다. [한국바둑인물사]의 저자 권경언 6단은 이 장군의 바둑에 관한 다음과 같은 언설을 뽑아냈다.‘5월 25일 맑음. 당관과 선전관들은 어젯밤 취기가 깨지 않았다. 아침에 역관 표헌을 청해서 명나라 장수가 하려던 말이 무엇인지 물은 즉 그것은 알 수 없고, 단지 왜적을 쫓아내는 것뿐이라고 하였다…(중략)…우수사와 병무를 의논한지 한참 만에 광양현감이 왔다. 최천보 이홍명이 와서 바둑을 두다가 갔다.’“9월 초6일. 맑다. 식후에 우영공 배에 가서 종일 이야기하다. 그러던 중 원공(원균)의 흉포한 사실을 듣고 또 정담수가 사실 무근한 말을 꾸며낸다는 말을 들었다. 가소로운 일이다. 바둑을 두고 돌아오다.’‘갑오년 4월 20일. 하루 종일 비가 쏟아졌다. 우수사 및 충청수사, 장흥부사, 마량첨사가 와서 바둑 두고 군사일도 의논했다.’이런 기록을 보면 이순신 장군은 부하장수나 관리들과 업무를 보고 난 후 바둑을 한 수 두었음을 알 수 있다. 바둑을 두면서 스트레스를 풀고 지인들과 친교를 나눴던 것 같다. 원균 등이 자신을 모함한다는 정보를 듣고 가소롭다고 했으나, 사실은 장군의 기분이 언짢았을 것이다. 그런 것을 바둑 속에 풀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학익진·장사진·횡열진 즐겨 사용: 바쁜 군무 중에도 바둑을 즐기며 기록을 남긴 이순신 장군은 기록문화 면에서도 칭송을 받을 만하다.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상류층의 많은 사람이 바둑을 즐겼지만 다른 이들은 그에 관한 기록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조금 아쉬운 것은 이순신 장군이 둔 바둑의 기보가 있었으면 하는 점이다. 그랬다면 당시의 바둑 양식과 수준을 판단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되었으리라. 또한 이순신 장군이 바둑에서 어떤 전략적 아이디어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궁금증도 해소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순신 장군이 기보나 적고 있을 만큼 한가한 입장을 아니었을 테니 이런 기대는 좀 무리다. 바둑과 이순신 장군의 공통분모를 찾아보면 ‘학익진(鶴翼陣)’이라는 것이 있다. 학이 날개를 편 것과 같이 생긴 포진이란 뜻이다. 이 장군은 학익진 외에도 장사진·횡열진을 즐겨 사용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둑에도 학익진으로 불리는 모양이 있다.
유리한 곳에서 싸워라: 이순신 장군의 군사전략을 살펴보았는데, 사실 바둑에서도 경쟁을 하는 전략은 같다. 경영이나 인생에서도 비슷할 것이다. 바둑에서도 고수들은 자신의 강점을 살려 이기려고 한다. 현대의 기성으로 숭상받았던 우칭위안 9단은 강펀치로 유명한 가리가네 8단과 대결할 때 정면으로 싸우지 않고 자기 돌 몇 점을 버리는 전법을 썼다. 말하자면 상대에게 약간의 미끼를 제공하고 대신 전투를 피하는 방식을 쓴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칭위안 9단은 가리가네를 4대1로 물리쳤다.환경적 특성을 이용하는 것은 바둑에서 거의 절대적이다. 바둑이론가들은 “유리한 곳에서 싸워라”라고 강조한다. 반대로 불리한 상황에서는 싸움을 피하고 화평책을 취하라고 한다. 자신의 든든한 배경인 세력이 있을 때 그것을 이용하라고 한다. 전투에서의 심리와 관련해서는 여러 가지 격언이 있다. 상대방이 강자라고 너무 겁을 먹지 말라는 ‘반전무인(盤前無人)’이란 금언이 있다. 또 절에 간 색시가 되지 마라고도 한다. 상대가 하자는 대로 고분고분 응하기만 해서는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바둑의 이런 전략적 사고는 경영 등 경쟁적 특성을 가진 여러 분야에 두루 적용할 수 있다. 경영 분야에서도 자신의 강점과 환경의 기회요인을 결합한 전략을 최고로 친다. 다만 경영 분야에서는 전략을 논할 때 심리적 측면에 대한 고려를 하지 않는다. 대신 리더십이론 등에서 부하직원의 동기유발과 조직행동 등을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