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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3) 오고대부 백리해] ‘몸종 백리해’를 ‘명재상 백리해’로 쓰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백리해의 진가 알아본 진나라 임금 목공 … 제 환공의 관중에 비유

풍몽룡이 정리한 [열국지(列國志)]는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그만큼 방대한 시기에 걸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특히 ‘동양의 그리스 신화’라 불릴 만큼 이야기의 보고이며 철학과 사유의 원형이 담겨있다. 작품의 배경은 불확실성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다. 문명이 전환하고,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가들은 부국과 혁신의 길을 모색했고, 사상가들은 인간과 공동체의 좀 더 나은 삶에 대해 고심했다.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지금 다시 [열국지]를 펼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일러스트:김회룡
“올해 연세가 어찌 되시오?”

“일흔 밖에 안 됐습니다.”

“애석하구려. 나이가 너무 많으시오.”

기다리던 인재와 만났지만 그는 이미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었다. 연로한 그와는 대업을 도모하기 힘들 거라는 생각에 임금은 아쉬움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자 노인이 말한다. “날아가는 새를 잡고 맹수와 맞서 싸우라고 하신다면 신은 분명 늙었습니다. 하지만 나랏일을 맡아보라고 하신다면 신은 아직 젊습니다. 일찍이 여상은 나이 여든에 문왕을 도와 주나라의 기틀을 세웠습니다. 그에 비한다면 신은 10년이나 어립니다.”

여상(강태공)은 은나라를 멸망시키고 주나라의 천하를 완성한 인물이다. 자신의 나이가 많은 것처럼 보이지만 여상보다 열 살이나 젊으니, 충분히 그에 못지않은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노인이 바로 진(秦)나라의 임금 목공(穆公)이 “과인에게 그대가 있는 것은 제 환공에게 관중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라고 극찬했던 백리해(百里奚)다.

“나랏일 맡기에는 아직 젊습니다”

백리해는 오랫동안 가난하고 불우했다. 집은 걱정하지 말고 뜻을 펼쳐보라는 아내의 배려에 세상으로 나섰지만, 계속 실패했다. 다행히 그의 능력을 알아준 건숙(蹇叔)을 만나 의형제를 맺었고, 건숙의 추천으로 우(虞)나라의 관직에 오른다. 건숙은 우나라 임금 우공의 수준을 낮게 평가하면서도 현명한 재상 궁지기(宮之奇)가 있으니, 잠시 몸을 의탁하라고 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우나라에 위기가 닥쳤다. 당시 북쪽 지역의 강자 진(晉)나라는 국경을 맞대고 있던 우나라와 괵(虢)나라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두 나라의 견고한 동맹에 막혀 좀처럼 기회를 얻지 못하자, 진나라는 계략을 꾸민다. 미인계를 써서 괵나라의 임금을 흔들어놓는 한편, 우공에게는 값비싼 뇌물을 보내 괵나라를 치기 위한 길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뇌물에 혹한 우공은 진나라의 제의를 받아들였는데, 궁지기가 “그동안 진나라가 감히 우리를 공격하지 못한 것은 우나라와 괵나라가 입술과 이빨처럼 서로 돕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괵나라가 망하면 내일 그 참화는 우리에게 닥쳐올 것입니다”라며 반대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유명한 고사성어인 ‘가도멸괵(假道滅虢, 길을 빌려 괵나라를 멸한다는 뜻으로, 진짜 의도를 숨기고 거짓 명분을 내세우는 것)’과 ‘순망치한(脣亡齒寒, 입술이 없어지면 이빨이 시리다는 뜻으로, 한 쪽이 없으면 다른 한 쪽의 존망도 위태로운 상황)’이 모두 이 사건에서 유래했다.

아무튼 우나라가 망하자, 우나라에서 벼슬을 살던 백리해도 포로로 붙잡혔다. 그는 망국을 막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우공에게 간언하는 것은 길에다 귀한 구슬을 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궁지기에게는 조만간 나라가 끝장날 것이라며 망명을 권유하기도 했다. 우나라의 종말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이라고 본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백리해 자신은 피신하지 않았을까? 그는 끝까지 우공의 곁을 지켰다. 무능하고 우매한 임금이지만 “그로부터 녹봉을 받아온 이상, 이렇게라도 보답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진나라에서 같이 일하자고 권유했을 때에도, 우공과의 의리를 지켜야 한다며 거절했다.

안타깝게도 백리해의 선택은 더 큰 고난으로 이어진다. 쓸모가 없는 바에야 먼 곳으로 추방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한 진(晉)나라는 그를 진(秦)나라 임금에게 시집가는 공주의 몸종으로 삼았다. 하루아침에 노비로 전락한 것이다. 백리해는 탄식했다. “천하를 구제할 뜻을 품었건만 밝은 임금을 만나지 못했다. 노년에 이른 지금, 노예나 다름없는 신세가 되었으니 이보다 더한 치욕이 어디 있으랴!” 자신의 처지를 참을 수 없었던 백리해는 도중에 도망을 친다.

달아난 백리해는 초나라로 숨어들었다. 이름을 숨긴 그는 소먹이꾼이 됐다. 그가 키우는 소는 날이 갈수록 살이 쪘는데, 그 솜씨가 얼마나 뛰어났던지 초나라 임금의 귀에까지 들어갔다고 한다. [장자(莊子)]에도 “백리해는 작위나 녹봉이 그 마음에 끼어들지 않았다. 그러므로 소를 먹이면 소가 살이 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해타산을 생각하지 않고 오직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좋은 성과를 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초나라 사람들에게 백리해는 어디까지나 소를 키우는 전문가였을 뿐이다. 그의 진가를 알아본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진(秦)나라가 백리해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도망친 몸종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가 당대의 인재라는 신하들의 추천이 있었던 것이다. 진나라 목공은 초나라에 후한 예물을 보내 그를 데려오고자 하였는데, 신하인 공손지가 반대한다. “그렇게 하시면 백리해는 올 수 없을 것입니다.” “무슨 까닭이오?” 의아해진 목공이 물었다. 공손지가 대답했다. “지금 초나라는 백리해의 뛰어남을 모르고 있습니다. 만약 임금께서 귀한 예물을 보내신다면 어찌 되겠습니까? ‘백리해가 어떤 인물이기에 진나라 군주가 이토록 높은 값을 치르고 그를 초빙하려 하는가’하고 생각하지 않겠습니까? 초나라는 백리해를 자신들이 직접 등용하지 결코 내어주지 않을 것입니다. 차라리 임금께서는 도망친 몸종의 죄를 묻겠다고 하십시오. 헐값을 주어 그를 사겠다고 말씀하시면 충분합니다.” 이에 진나라 목공은 양가죽 다섯 장을 주며 백리해의 송환을 요구했고, 초나라는 별 말없이 그를 보내주었다. 백리해가 ‘오고(五羖, 양가죽 다섯장)대부’라고 불린 것은 그래서이다.

무릇 귀하고 유용한 물건인데 소유자는 정작 그 값어치를 모르는 경우가 있다. 이 때 비싼 값을 제시해 괜히 가치를 높일 필요가 없다. 오히려 하잘 것 없는 것처럼 대해야 소유자가 쉽게 물건을 판다. 진나라는 양가죽 다섯 장을 주고 ‘몸종 백리해’를 사와 ‘명재상 백리해’로 썼으니, 몇 백배, 아니 그 이상의 남는 장사를 한 것이다.

사후에 백성이 생업 접을 정도로 존경 받아

이후 백리해는 목공을 도와 진나라를 번영으로 이끈다. 건숙과 유여 등 뛰어난 인재를 추천했고 무도한 양나라를 정벌했다. 기근으로 고통 받는 백성들도 적극 구제한다. [전국책(戰國策)]에 보면 백리해가 죽자 “아이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았고 방아 찧는 사람은 절구질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백성들이 생업을 접었을 정도로, 큰 존경을 받았던 것이다.

끝으로, 남은 이야기 하나. 백리해의 아내는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을 보낸 후,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아내 두씨는 아들을 데리고 고향을 떠났다. 밥벌이를 위해 이곳저곳을 떠돌아다니던 그녀는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백리해가 진나라의 재상이 되었다는 소식을 접했다. 천신만고 끝에 빨래하는 하녀가 되어 백리해의 집에 들어간 두씨는 “옛날, 님이 떠날 때 나는 슬피 울었습니다. 오늘, 님은 높은 곳에 앉아 있건만 나는 여기 떨어져 있군요. 슬픕니다. 부귀에 접어 이 몸을 잊으셨나요?”라고 노래를 불렀고, 놀란 백리해가 그녀에게 달려왔다. 수십 년 만에 부부가 다시 만난 것이다(두씨가 홀로 힘들게 키웠던 아들 백리시는 진나라의 명장으로 이름을 날렸다).

※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 들] 등이 있다.

1428호 (2018.0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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