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카산드라형 이코노미스트 ... 양치기형 이코노미스트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카산드라는 자기의 무시무시한 예언이 실현되지 않도록 열심히 소리치고, 설득도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웃기지마’였다. 아폴로의 저주가 확실하게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이솝 우화의 양치기 소년은 사심(私心)이 생겨 거짓으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그러다 정말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에는 “늑대야”라고 외쳐도 아무도 도우러 나오지 않아 자신의 양떼가 모두 늑대에게 먹히게 됐다. 어느 영어 번역본에는 심지어 양치기 소년도 늑대가 잡아먹었다고 되어 있다.
#1. 그리스 신화에는 ‘카산드라(Casandra)’라는 여성이 등장한다. 그리스가 멸망시킨 트로이의 공주로,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 왕비의 딸이다. 카산드라는 눈부시게 아름다워 그리스와의 전쟁 때 두 나라의 왕자가 오직 그녀의 환심을 사기 위해 트로이를 군사적으로 지원했다. 심지어 아폴로 신도 열렬히 구애할 정도였다. 자신을 모시는 신전에서 무녀로 일하던 그녀에게 반한 아폴로는 잘 넘어오지 않은 그녀에게 예언의 능력을 주겠다고 유혹했다. 대가는 잠자리를 같이 하는 것이었다. 이 제안을 받아들인 그녀는 예언의 능력을 얻은 후 마음이 바뀌었는지 아니면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는지, 아폴로가 끌어안자 그를 밀쳐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아폴로는 입맞춤하는 척 하면서 그녀의 입 안에 침을 뱉었다. 저주를 걸어 ‘설득력’을 빼앗은 것이다. 그래서 카산드라는 늘 미래를 ‘정확히’ 예언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말을 믿지 않게 됐다.

그리스와의 전쟁이 자기의 조국을 멸망에 이르게 하고 아버지인 프리아모스 왕도 죽임을 당할 것이라 예언했지만 트로이 백성들은 물론 자기 가족들도 그녀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카산드라는 자기의 무시무시한 예언이 실현되지 않도록 열심히 소리치고, 설득도 했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웃기지마’였다. 그리스와의 전쟁이 10여 년이 지속된 어느 날이었다. 트로이 군은 자기네 성 앞에 그리스 군들이 모두 사라지고 큰 ‘목마’가 서있는 것을 보았다. 트로이 군은 이를 그리스군이 패퇴하면서 준 트로이를 위한 선물이라 판단하고 환호했다. 그런데 카산드라가 이 목마를 성안으로 들여 놓으면 트로이는 멸망할 것이라 예언하며 만류했다. 사람들이 자신의 말을 또 듣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그녀를 조롱하고 놀렸다.

트로이 멸망 후 카산드라 자신의 운명도 당연히 비참해졌다. 점령군을 피해 아테네 신전으로 도망쳐서 신의 보호를 받으려 했다. 하지만 곧 ‘아작스’라는 자가 강제로 끌어내어 그녀를 범했다. 이후 그녀는 그리스 원정군의 총사령관인 아가메논의 첩이 됐다. 그러나 아가메논이 원정 중 바람이 난 그의 아내 클리타임네스트라와 애인인 아이기스토스가 아가메논과 카산드라를 살해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런 일까지도 카산드라는 모두 예언했다는 것이다.

#2. 이솝은 BC 6, 7세기에 살았다고 추정되는 그리스의 우화 작가다.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는데 후세에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와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그가 처음에는 사모스라는 도시에서 잔두스, 그 다음에는 라드몬이란 사람의 종이었다고 썼다. 사모스의 한 부자를 잘 변호한 공로로 이후 자유의 몸이 됐다고도 기록했다. 또 후대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본디 이디오피아 출신으로 흑인이라는 여러 증거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이런 그가 글로 남긴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의 사후 그가 ‘남겼다고 믿어지는 이야기’를 모아 이른바 ‘이솝 우화’로 정리한 것이다.

수백 개의 이야기가 모여있는 이솝 우화는 통상적으로 여러 동물이 등장해 교훈을 남기고 끝나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이야기 중의 하나가 바로 ‘양치기 소년과 늑대’이다. 양치기 소년은 주인의 양떼를 맡아 돌보고 있었는데 갈수록 일상이 지루하고 심심해졌다. 그래서 사심(私心)이 생겨 ‘재미를 볼’ 생각으로 거짓으로 늑대가 나타났다고 외쳤다. 이에 도우러 나왔다가 허탕치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재미있어 여러 차례 같은 짓을 했다. 그런데 정말로 늑대가 나타났을 때에는 “늑대야”라고 외쳐도 아무도 도우러 나오지 않아 자신의 양떼가 모두 늑대에게 먹히게 됐다는 이야기이다. 그리스어로 된 원전에는 나오지 않지만 한 영어 번역본에는 심지어 이 소년도 늑대가 잡아먹었다고 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의 신뢰를 잃으면 정작 중요할 때 도움을 받지 못한다는 교훈을 강조한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 이 무렵이었을 것이다. 당시 국제유가가 무섭게 치솟아 몇 달 만에 배럴당 130달러를 넘어서고 있었다. 유가가 계속 올라가면 한국 경제는 물론 세계 경제의 안위까지도 위협받은 상황이 심각하게 우려될 때였다. 월스트리트의 한 유력 투자은행은 유가가 연말까지 배럴당 200달러를 넘어설 것이라는 전망을 내놓아서 이것이 시장의 ‘컨센서스’가 되어가고 있었다. 당연히 국내에서도 이에 동조하는 여러 전망이 나왔다.

그런데 국내나 해외나 직업적인 이코노미스트들은 보통 나중에 전망 결과에 대해 책임을 추궁 당하는 상황을 우려한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내게 한 명의 외팔이 이코노미스트(an one-handed economist)를 달라”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다. 필자는 당시 한 민간경제연구소에서 임원급 연구원으로 재직하며 금융 및 글로벌 연구실을 맡고 있었다. 당시 전임 소장과 현직 소장도 모두 이른바 ‘양다리 전망’을 지극히 싫어하는 사람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필자도 유가에 대해 ‘외다리 전망’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리 전망을 해보아도 유가 폭등 현상은 일시적인 버블이라고 밖에 판단할 수 없었다. 당시 중국이 그해 하반기에 올림픽을 열면서 이에 대비한 인프라 투자 등의 목적으로 2000년대 중반부터 철강·시멘트 등 엄청난 양의 천연자원을 세계 각국에서 수입하면서 자원가격을 몽땅 올려놓고 있었다. 여기에다 미국에서 2006년 말부터 모기지 사태가 불거져 나오면서 이에 대비한다는 명목으로 미 연방준비제도가 대량으로 돈을 찍어 내면서 생긴 엄청난 유동성이 투기자금으로 가세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의 올림픽 준비가 끝나가면서 인프라 투자도 덩달아 줄어들고 있었다. 그래서 올림픽 개막 전후부터 유가가 떨어져서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내다봤다.

연구소 내부에서도 필자와 같이 일하는 몇몇 연구원 이 외에는 이를 믿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단지 당시 소장이 이런 전망에 귀를 기울여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필자의 연구소가 주최한 조찬 세미나에서 개인 자격으로만 이런 견해를 말했을 뿐이다. 그러던 중 [이코노미스트]의 한 기자로부터 연락을 받았다. 조찬 세미나 내용이 상당히 ‘설득력’이 있으니 기고해달라는 부탁이었다. 여러 번 거절했으나 공식 입장이 아니라는 전제 하에 남들의 견해인양 원고를 쓰기는 했다. 하지만 예기치 않게 이것이 시중에서 큰 파란을 일으켰다. 물론 다행히도 필자의 전망이 운 좋게 맞아 한숨을 돌린 바 있다. 필자는 이후 필드에서 떠났으나 요즘에는 민간연구소 업계가 당시와는 다르게 많이 위축돼 카산드라형(型) 이코노미스트들이 활동할 공간이 크게 줄어든 것 같아 안타깝다. 사족 하나. 그 투자은행은 왜 그런 전망을 내놓았을까? 당시 보도로도 그 투자은행은 유가의 추가 상승에 큰 돈을 ‘베팅’해 놓았다고 한다. 양치기 소년처럼 ‘사심(私心)’이 작용한 것이다. 사족 둘. 카산드라의 이야기에도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이코노미스트]에 박수를 보낸다.

1435호 (2018.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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