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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의 노하우: 선악판단의 문제가 제기될 때 바둑에서는 어떻게 처리를 할까? 몇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한 가지는 전후비교법이다. 이것은 문제의 수를 두기 전과 후의 전체 형세를 비교해 보는 방법이다. 그 수를 두기 전에는 백이 10집가량 유리했는데 두고 나서 보니 5집 정도 유리하다면 이 수는 백에게 좋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 방법은 정부의 정책이나 기업의 경영전략 등에도 적용되고 있다. 결과에 대한 성적표를 놓고 정책이나 전략이 좋았는지를 판단하는 수가 많다.이 방법은 유력한데 단점이 있다. 사전에 미리 판단을 하지 못하고 사후에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점이다. 장독을 다 깨뜨린 후에 “이거, 좋지 않았네”라고 한다면 실패에 대한 보상을 받기가 어려울 것이다. 물론 경영에서는 실패를 성공의 어머니로 삼아 성공모델의 토대로 삼을 수 있을 것이나 국가정책은 다르다.또 하나의 문제점이 있다. 어떤 수의 결과에 다른 요인이 개입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주변 상황에 따라 그 수가 좋은 수나 나쁜 수로 판명될 수 있다. 정책의 성공이나 실패에 다른 변수가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프로기사들이 일반적으로 쓰는 방법은 공동연구라는 방식이다. 여러 명이 모여 선악판단이 어려운 수에 대한 토론을 한다. 바둑은 혼자서 싸우는 경기지만 기사들은 함께 모여서 연구하는 방식을 즐겨 쓴다. 말하자면 개인의 두뇌보다 집단지성의 힘이 더 크다고 보는 것이다. 그래서 프로기사들은 소소회나 충암연구회 등과 같은 연구모임을 만들어 공부를 한다.기사들이 바둑수에 관해 공동연구를 하면 대부분 결론이 난다. 전문가들이 모여서 이런저런 분석을 하며 토론을 하다 보면 수의 선악에 대한 결론을 내릴 수 있다. 공동연구에서 주로 하는 일은 문제의 상황에서 나올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예측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을 비교해 최적의 방안을 찾아내는 것이다.기사들은 이렇게 연구한 내용을 잡지에 발표하기도 하고 [충암연구회 보고서]와 같은 책을 내기도 한다. 이것은 정부의 정책연구보고서나 기업의 경영전략보고서와 같은 것이다. 이런 자료는 아마추어 바둑팬은 물론 외국의 고수들도 읽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정 전문가가 혼자 주장하는 내용보다 다수의 전문가들의 연구를 통해 나온 내용이 더 유익하고 신뢰성이 더 높기 때문이다.공동연구에서 한 가지 암묵적인 철칙이 있다. 누군가가 다소 엉뚱한 주장을 한다고 해도 면박을 주거나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전에 일본의 어떤 연구회에서는 후배기사가 약간 이상한 의견을 내자 “그 따위 수가 어디 있어?”라고 선배 기사가 호통을 친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공동연구에서는 이런 일이 거의 없다.
인공지능에 의뢰: 전문가인 프로기사들이 집단으로 연구를 했는데도 결론이 나지 않는 어려운 문제도 있다. 이럴 때는 당대 최고수에게 자문을 구한다. 비유하자면 경제 문제를 세계 최고의 석학에게 물어보는 것이다. 이것도 우리 언론에서 인터뷰 형식으로 종종 하는 일이다. 최정상에 선 고수는 전문가 중의 전문가다. 최고 실력자의 의견을 들어보는 것은 프로기사들에게도 유익하다. 예전에 이창호 9단이 최정상일 때 자문을 구한 적이 몇 번 있었는데, 그의 탁월한 분석력과 판단력에 탄복한 경험이 있다.요즘은 인공지능 프로그램이 나와 최고수의 역할을 대신해 준다. 바둑방송에서 AI 승부예측이라는 것을 두어 인공지능이 현재의 형세를 판단하도록 한다. 흑과 백이 이길 확률을 55% 대 45%와 같이 예측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은 짧은 시간 내에 여러 가지 시나리오에 대한 시뮬레이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런 예측이 가능하다. 인공지능의 이런 기능을 살려 실력향상의 보조도구로 삼는 기사들이 있다. 특히 중국 기사들의 경우 인공지능바둑을 통해 자신의 수에 대한 평가를 받아 보고 있다. 한국에서는 인공지능바둑에 대한 투자가 많이 이루어지지 않아 프로기사들이 사용할 만한 프로그램이 없는 실정이다.바둑수에 대한 선악판단을 하는 프로기사들의 노하우를 알아봤다. 새로운 정책이나 전략을 고려할 때 다수 전문가들의 공동연구나 최고수의 의견을 활용하면 선악판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다. 향후 바둑 분야처럼 인공지능의 자문을 받는 것도 유력할 것이다.
※ 필자는 1973년 프로기사에 입단한 후 1997년 프로 9단에 올랐다. 제 1기 프로신왕전에서 우승했다. 한국프로기사회장, KBS 일요바둑·바둑왕전의 해설자를 역임했다. 명지대 바둑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바둑 읽는 CEO』 『반상의 파노라마』 『인생과 바둑』 등 30여 권의 저서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