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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려되는 화폐가치 불안정성 

 

화폐가치가 안정돼야 가계와 기업이 미래지향적 경제활동을 추구할 수 있다. 화폐가치가 불안하면 각 경제주체들이 생산활동보다 투기활동을 선호하게 돼 경제순환이 왜곡되고 성장잠재력이 침식된다. 화폐가치 안정은 각 개인이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으며 사회에도 기여하는 동기양립(incentive compatibility) 체제 구축을 위한 필요조건이다.

화폐가치 불안은 대체로 ▶방만한 재정지출로 재정적자가 급속하게 확대될 때 ▶경기 부양 시기를 놓치거나 경기 침체의 골이 지나치게 깊어져 뒤늦게 통화량을 비정상적으로 팽창시킬 때 ▶대외지급능력이 부족해지면서 조그만 충격에도 환율의 변동성이 확대될 때 비롯된다. 한국 경제의 모습을 볼 때 이 세 가지 모두 만만치 않은 국면에 있다.

화폐가치가 흔들리면 위험과 불확실성이 커지며 사람들의 삶이 곤궁해진다. 1945년 8월 태평양전쟁 패전과 동시에 조선총독부는 미리 찍어 뒀던 ‘조선은행권’을 남김없이 살포해 통화량을 2배 이상으로 팽창시켰다. 가뜩이나 어려웠던 조선경제는 물가폭등 혼란으로 빠져들었다. 그들은 ‘국가를 무너뜨리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돈의 가치를 타락시키는 것이다’라는 레닌(V. Lenin)의 말을 신봉했는지 모른다.

화폐가치의 불안정성은 대체로 정부로부터의 위험과 불확실성이다. 정부의 기능은 가계와 기업이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게 하는 환경을 조성하는데 있다. 정부가 모든 것을 직접 해결하겠다고 욕심을 내다가는 재정적자를 확대시키고 유동성을 팽창시키며 나아가 대외지급능력 부족을 초래해 화폐가치 안정성을 해치기 쉽다.

우선 중장기 성장잠재력을 높이기보다 눈앞에 보이는 성적표에 급급해 성장을 직접 이끌려다 보면 방만한 예산 집행이 불가피해져서 재정적자가 초래된다. 확대재정을 세수로 메울 수 없게 되면 나중에는 발권력을 동원해야 하기 때문에 화폐가치가 불안해진다. 세수를 초과하면서까지 대중에게 재화를 무상으로 공급해 인기를 얻으려는 대중주의(populism), 사회주의 국가에서 흔히 나타나는 환상이다.

다음으로 경기 상황에 따라 유동성을 미조정해야 하는데 정책 대응에 실기하고 뒤늦게 경기 부양 욕심을 과다하게 내다가는 유동성을 과다하게 팽창시켜 화폐가치를 불안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보자. 경기를 부추기려 정책금리인 콜금리 목표를 2000년 10월 5.25%에서 2004년 11월 3.25%까지 끈질기게 내렸다. 성장률과 물가상승률을 감안할 때, 정책금리의 상대적 수준은 2018년 현재보다 더 낮은 셈이었다. 금리를 연속적으로 내리다 보니 유동성 홍수로 통화량이 장마철 냇물처럼 불어났다. 당시 정책금리를 내리면서 중앙은행 책임자는 “유동성 팽창에 따른 부작용은 미시대책으로 막으면 된다”고 했지만, 부동산시장은 이미 꿈틀거리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대외지금능력이 약화되면 대내외 충격을 완화하지 못하고 환율 변동폭이 확대돼 화폐가치 불안으로 이어진다. 1990년 후반 한국은 기업부채 규모 확대와 경상수지 적자 누적으로 해외 신인도가 하락하고 있었다. 외국 금융회사들은 한국에 대한 신용라인(credit line)을 줄이고 만기상환연장(roll-over) 비율을 조여 갔다. ‘국민소득 1만 달러’ 슬로건에 집착하던 정부는 기초경제 여건이 좋다는 말을 되풀이 하며 환율을 억지로 억누르려고 얼마 되지 않은 외화를 허공에 쏟아 부었다. 1997년 8월 기업의 대외부채를 정부가 책임지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하자 환율은 밟다 놓은 용수철처럼 튀어 올랐다.

2018년 현재 한국 경제의 모습을 보면 잠재성장률이 차츰 저하되는 가운데 실제성장률도 그에 못 미치는 안개에 싸여 있다. 당장은 그래도 세수가 잘 걷혀 재정수지를 맞출 수도 있지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의문이다. 소득불평등과 고용 악화를 시장이 아닌 재정으로 해결하려 한다면 미래의 재정 건전성을 논의하는 것은 무리다. 경기는 하강 기조에 접어들어 정책금리를 내려야 하는 당위성이 커감에도 정치권까지 금리 인상을 압박해 어쩔 수 없이 정책금리를 올리다가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위험이 커진다. 경기 자동조절 기능이 훼손된 다음에 때늦은 경기 부양을 위해 통화량을 마구 풀어야 하는 사태가 오지 않는다고 단정할 수 없다.

그래도 다행스러운 점은 대지급능력 면에서는 장기간 경상수지 흑자로 상당히 건실한 상황에 있다. 한국은행이 발표하는 국제투자대조표(IIP)에 따르면 2018년 9월 현재 해외에 갚아야 할 것과 받아야 할 것을 모두 제하면 3400억 달러 정도 여유가 있다. 그러나 경상수지 흑자가 특정 부문에 치우쳐 있는 데다 그 분야 경쟁력 우위가 계속될지는 불투명하다.

한국 경제가 마주하고 있는 환경변화를 생각할 때, 화폐가치 안정성이 앞으로도 확보될 것이라고 단정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생각건대, 기업부채 누적과 외환 부족으로 말미암은 외환위기를 그럭저럭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그나마 튼튼한 가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2018년 현재는 투기적 동기의 대기성자금이 대규모로 부유하는 동시에 가계부채와 자영업자 대출이 연간 국내총생산(GDP)을 훨씬 넘어서는 금융 불균형이 위험과 불확실성을 더 크게 하고 있다.

화폐가치 안정은 예나 지금이나 순조로운 경제순환을 위한 불가결한 조건으로 실물 부문과 금융 부문이 따로 움직이지 않고 조화를 이루어야 가능하다. 실물 부문과 금융 부문이 균형을 이루려면 금리·주가·환율 같은 금융시장 가격지표가 성장·물가·고용·국제수지 같은 거시경제 총량지표를 충실히 반영해야 한다.

화폐가치가 안정되느냐 불안해지느냐에 따라 가계와 기업의 경제적 선택은 달라진다. 먼저, 화폐가치가 안정되는 국면에서 큰돈을 노리고 빚을 내어 무리하게 투자하다가는 자칫 부채의 늪에서 헤어나기가 힘들다. 물가가 오르지 않으면 시간이 지나도 빚의 가치가 줄어들지 않기 때문에 무리하게 빚을 내다가는 지불불능 위험에 빠지기 십상이다. 저성장·저물가 시대에는 모험적 투자보다는 근검절약해야 경제적 승자가 될 확률이 높아진다.

다음으로 화폐가치가 흔들리는 상황에서 가계와 기업은 열심히 연구하고 노력하기보다 비생산적 투기활동을 벌이거나 불로소득을 찾아 두리번거리기 쉽다. 빚을 내어 투자하다가 설혹 실패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돈의 가치가 떨어져 레버리지투자 위험이 줄어든다. 고성장·고물가 시대에는 투자 기회도 많지만 빚 부담이 가파르게 줄어들게 마련이다.

가계와 기업은 화폐가치가 불안해지는 상황에서는 결코 정부에 의지할 수도 없고 의지하려고 해서도 아니 된다. 경제적 패자가 되지 않으려면 화폐가치 불안으로 말미암아 비롯되는 위험과 불확실성을 가끔이라도 가늠해봐야 한다. 정부 지출은 적정하게 유지되는지, 금융시장이 거시경제 상황을 제대로 반영하고 있는지, 대외지급능력은 어떤지 등의 변화 추세를 살펴봐야 한다. 개개인이 스스로 위험에 빠져들지 않으려 노력할 때 국민경제 전체의 불확실성 또한 무리 없이 극복할 수 있다.

- 신세철 경제칼럼니스트(전 금융감독원 조사연구국장)

1463호 (2018.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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