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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원경의 ‘IF’ㅣ부자를 꿈꾸는 당신에게(7)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다면] 돈으로 살 수 없는 참교육의 중요성 

 

사랑이 깃든 괴테 아버지의 교육 열정… 미켈란젤로에게 인문학 교육을 먼저 가르친 메디치가문

▎대한민국 상위층의 비뚤어진 교육열 등을 다룬 JTBC 드라마 [SKY 캐슬]의 주요 등장인물.
가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멋진 역사와 함께 자연이 아름다운 이탈리아 여행을 꿈꾼다. 손에 괴테가 쓴 이탈리아 기행을 들고 이탈리아 이곳저곳을 누비는 상상을 해보자. 독일의 대문호였던 괴테는 글이 잘 쓰여지지 않는 권태기를 여행으로 대신하며 재충전의 기회를 가졌다. 물론 그의 아버지의 권유도 한몫했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이 쓴 이탈리아 기행기를 아들이 읽도록 하고 자신의 자취를 따라 이탈리아 여행을 가기를 바랐다. 괴테의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그가 그린 그림에 감탄을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는 작가로서 뿐만 아니라 경제·과학·미술·음악·자연·정치 등 수많은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괴테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아버지와 똑같은 경로로 가야 했지만 훨씬 편하게 그리고 멀리 가야 했다.”

그에게서 아버지란 존재는 어떠했을까 생각해본다. 그는 이렇게 아버지를 소개했을 수도 있겠다. “내 아버지는 제법 많은 재산을 물려받아 황실고문관으로 그럴듯한 삶을 살았습니다. 덕분에 나는 최고의 가정교사로부터 과학·문학·종교·예술 등 다양한 과목을 제대로 배울 수 있었죠.”

서울대 의대에만 합격한다면…

재산은 있었지만 평생 뚜렷한 직업을 갖지 못한 괴테의 아버지는 자신이 귀족이 아니라서 신분에 콤플렉스가 있었다. 신분제 사회에서는 그렇게 생각할 충분한 이유가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아버지는 이런 말을 했다. “내 아들은 나와 달라야지요. 멋진 직업을 갖고, 귀족이 되어 높은 자리에 앉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의 이야기를 듣자 문득 요즘 장안의 화제인 JTBC 드라마 [SKY 캐슬]이 생각난다. 드라마는 서울대 의대에 합격한 ‘영재’가 부모에게 복수를 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7살 때부터 1년 365일을 죽도록 공부해야만 하는 아이에게 삶은 그야말로 지옥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영재가 태블릿에 남긴 기록은 고통의 잔상이었다. 자살하는 법을 웹사이트에서 찾아 남아있는 부모가 가능한 고통스럽게 만들겠다는 영재의 생각은 다소 자극적이지만,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부모에게 서울대 의대 합격증을 바치고 나간 아이의 절규와 엄마의 대화를 들어보니 가슴이 아프다.

“내가 아파도, 다쳐도, 쓰러져도 나 새벽 2시까지 학원으로 내몰았잖아. 나 1등 못하면 밥먹을 자격도 없다고 했어 안 했어? 나 성적 떨어지면 나가 죽으라고 했어 안 했어? 그 지옥 같은 생활. 그렇게 공부했으니까 서울대 의대 붙었잖아.”

“엄마는 그러고 싶어서 그랬겠어? 너 잘되라고….”

“나 잘되라고, 나 잘되라고 그랬다구? 서울대 합격증 줬잖아. 그게 소원이라며. 이제부터 내 인생 살 거야. 내가 살고 싶은 내 인생. 분명한 것은 서울대 의대는 엄마 아빠가 원했던 것이지 내가 원했던 것은 아니란 거야. 더 확실한 것은 이제 엄마, 아빠 아들로 살고 싶지 않다는 거고.”

드라마에서 엄마 이명주는 충격과 절망, 번민 탓에 권총으로 자살한다. 철저히 입시 코디네이터에게 사육을 당하며 사는 이른바 ‘있는 집 자식들’을 보며 시청자 중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그래, 저렇게 돈으로 쳐 바르니 다 되는 것이지. 돈이면 다 되는 것 아니냐고. 부모가 의사, 변호사니 머리도 그렇게 나쁘지 않을 거고.”

그러나 장애를 이기며 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서울대 의대 합격자도 있는 것을 보면 드라마가 현실을 모두 대변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자식들이 좋은 대학에 가기를 원하는 것은 대한민국 부모들의 꿈이다. 하물며 있는 집 자식에 부모가 의사, 변호사라면 그들은 자식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할까? 부부들 사이에서의 교육경쟁과 아이들 사이에서도 일어나는 치열한 입시경쟁은 드라마가 아니라 현실이다. 물론 대한민국 상위 0.1%의 부모들이 드라마처럼 모두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분명 의사 부모들 중에는 대부분이 자식이 자신보다 훨씬 못한 인생을 사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리라. 특히 배운 부모들까지도 자식이 다닐 대학에 따라 자신이 평가받는다는 생각을 하니 드라마가 주는 메시지가 상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용기 있는 부모 중 누군가가 이런 말을 했다고 생각해보자. “우리 자식 세대는 대개 우리와 같은 학벌을 가져도 더 못한 직업을, 더 작은 집에서 살 수밖에 없어요. 그 아이들에게 공부하면 다 된다는 비현실적 희망 고문을 멈추어야 하지 않을까요?”

입시 스트레스로 자살하는 한국 학생들을 생각해보자. 드라마는 명문가 사이에서 가장 높은 곳으로 가려는 욕망을 그리지만, 문제는 대한민국의 많은 부모가 이런 생각을 가질 수 있다. “내가 SKY(서울대·고대·연대)를 나왔는데 내 자식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드라마에서는 조기 유학간 딸(세라)이 부모를 실망시키는 게 겁나 가짜 하버드 학생으로 행세한다. 이를 안 변호사인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그런 일을 벌였다는 것을 도저히 상상할 수 없다며 딸의 뺨을 때리고 나중에는 자식이 아니라며 나가라고 한다. 사실 현실에도 미국의 유명 대학교에 동시에 붙었다고 해서 언론을 장식한 일이 있으니 드라마가 과장인 것만은 아닌 것 같다.

천재 끼를 가진 자식에 대한 과잉 투자로 어느 순간 아이가 정신 이상자가 된 것을 본 한 여인이 있다. 그(김주영)는 독기를 품고, 명문가 집안의 ‘자식에 대한 소유욕과 높은 기대’를 잘 이용해 보겠다고 입시 코디네이터로 철저하게 변신한다. 자신의 한을 풀기 위해 대한민국 0.1% 가정의 견고한 성을 허물고자 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가정파탄’을 불러오는 그의 존재는 대한민국의 비뚤어진 교육열에 경고장을 주는 모습이라 악녀로만 보이지는 않는다.

물론 드라마에는 과외 없이 인성만을 중시하는 부모와 학생들도 나와 대조를 이룬다. 현실에도 큰 돈 드는 과외 없이 SKY에 들어가는 학생도 상당수 있다. 그러면 괴테 아버지와 드라마에서처럼 입시경쟁을 하는 부모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일까? 드라마의 부모가 괴테의 부모처럼 자식의 성공을 꿈꾸며 온갖 투자를 하는 것은 같은 점이라 하겠다. 그런데 우리는 돈을 들인다고 자식이 다 서울대 의대에 가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모든 투자가 성공적인 결과를 내는 것은 아니라는 걸 명심해야 한다.

괴테 아버지에게서 배우는 교훈


▎괴테는 자서전에서 그가 남달리 훌륭한 환경에서 출생했지만, 아들의 교육과 성공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가 있었음을 알린다.
어느 부모는 괴테의 아버지와 본인들의 투자법이 어떤 점에서 다른지에 대해 궁금할 수 있겠다. 비밀을 알기 전에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읽는데 그가 1786년 10월 어느 날, 2000년 간 세계의 수도였던 로마를 방문한 대목에 눈이 간다. 괴테가 콜로세움, 개선문, 그리고 시스티나 성당에 그려진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게 된 장면에서 다른 상상을 해본다. 문득 미켈란젤로는 어떤 가문에서 어떤 교육을 받았을지가 궁금하다. 혹시 미켈란젤로도 누군가 강력한 후원자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두 가지 비밀의 문을 생각하며 우선 괴테의 집의 문을 활짝 열어 보자. 김종원 작가의 [내 아이 기적의 필사법]의 내용을 각색해 본다.

어린 괴테가 살았던 집의 2층에는 집의 경관을 해치는 창문이 있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괴테의 아버지는 일부러 창문 하나를 더 만든다. 그의 아버지의 의도는 무엇이었을까? 요즘 같으면 밀실을 만들어 소음을 방지하는 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햇볕이 잘 들어오는 게 공부하는 데 도움이 되는 걸까 매우 궁금해진다. 혹시 길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이 어린 괴테를 감시하기 위해 만든 창문은 아니었을까? 하긴 그의 집 창문에서는 길가가 훤히 내려 보인다. 어린 괴테가 등하교하는 장면을 누구나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괴테의 집에서 일반인의 생각과 다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다른 풍경을 볼 수 있어요. 괴테의 집 사진을 유심히 관찰해 보세요. 창문 앞 팔을 기대는 부분이 심하게 닳아 있는 걸 알 수 있죠. 얼마나 자주, 오래, 아들을 바라보고 있었으면 나무가 움푹 들어간 걸까요? 추측하건대, 그가 창문을 하나 더 만든 이유는 아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 때문이 아닐까요?”

누군가는 돈만 생각하며 수많은 가정교사와 괴테의 멋진 집만 눈에 들어 올 것이다. 드라마를 보며 ‘모든 것이 돈이야’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과외를 하는 것을 나무랄 수는 없고, 필요한 경우 보충하는 게 문제될 것도 아니다. 문제는 그것이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만큼 모두가 ‘올인’하는 환경을 조성하기 때문에 발생한다. 우리는 진정 돈으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까? 그렇지는 않다.

괴테의 집에서 비밀의 열쇠는 쉽게 발견할 수 없는 창문 앞 움푹 들어간 곳이다. 이 지점이 돈의 힘을 넘는 곳이다. 돈으로 할 수 있는 건, 사실 돈이 있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아이의 재능을 깨우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은 대개 돈으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면 지나친 것일까? 창문 앞 움푹 들어간 곳에서 괴테 아버지의 사랑을 느꼈다면, 비약일까?

어린 괴테를 지켜보는 아버지의 심정이 창문 앞 나무가 마모되어가는 시간과 오버랩되어 따스함이 느껴진다. 그곳에서 괴테를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드라마의 비뚤어진 아버지의 자식사랑에서, 우리는 괴테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불행히도 느낄 수 없다. 자식을 오랫동안 바라보며 지켜주는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이미 사치가 되어버린 것일까? 괴테 아버지의 남다른 교육을 생각하니 한국의 일상적인 아버지의 모습과 대비된다. 흔히 어떤 아버지상을 원하느냐고 묻는다면 다를 수 있겠지만, 요즘은 친구 같은 아빠, 자상한 아빠를 원할 것 같다. 그중에는 ‘부자 아빠’를 원할 수도 있겠다. 사실 보통의 한국의 아버지는 측은한 존재다. 그들은 바쁜 일상에 쫓겨 새벽에 출근하고 늦게 귀가하는 데 익숙하다. 휴일은 잠으로 때우기에 아이들에게 ‘아버지’란 존재는 멀어져 가고 ‘벽’으로 남는다. 유교 문화권에서 아버지는 가부장적 존재로 남아 실천적 행동을 보여주기보다는 명령과 지배라는 전통적 사고방식을 내세운다. “교육이요? 무관심이 최고죠. 아빠 말 들으면 엄마랑 싸움만 나요. 할아버지의 돈, 아빠의 무관심이 자녀 교육에 최고라는 말이 왜 나오겠어요.”

자녀 교육은 엄마의 몫으로 고스란히 남는다. 세월이 흘러 아버지는 가족 속에서 소외된 자신을 발견하며 씁쓸한 황혼을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괴테의 아버지가 참 현명하게 느껴진다. 괴테 아버지를 생각하며 우리네 아버지들이 자식을 따뜻한 마음으로 안아보는 상상을 해본다. 아버지의 자식에 대한 제대로 된 관심은 무척 필요하다. 그런 생각을 하니 폴 앵카(Paul Anka)의 팝송의 가사 일부가 생각난다.

‘Everyday my papa would work to help to make ends meet(날마다 아버지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일하셨지요) / To see that we would eat, keep those shoes upon my feet(당신의 자녀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바라보시기도 하고, 신발도 신겨 주셨던 아버지) / Every night my papa would take and tuck me in my bed(또한 잠이 들 시간이 되면 내 침대 맡에 앉아 이불을 덮어주시고) / Kiss me on my head after all the prayers were said(나를 위해 기도해주시고 잘 자라며 키스를 해주셨지요) / Growing up with him was easy time just flew on by(아버지와 함께 한 세월은 쉽게 금방 지나갔어요) / The years began to fly, he aged and so did I(세월은 그렇게 흘러 아버지는 늙으셨고 저 또한 나이가 들었네요)’

우리네 일상을 노래하는 곡이라는 생각에 아버지의 따스함이 느껴지지 않나? 세월이 지날수록 고개 숙인 아버지가 되는 모습을 측은해하며 드라마와 달리 현실의 아버지와 자식 간의 관계가 좋아야 한다고 한 번 더 생각해 본다. 그렇지 않다면 자식이 서울대 의대를 간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 따스한 아버지의 덕택이었나? 괴테는 이탈리아에서 재탄생했다. 그는 그곳에서 다양한 예술체험을 하고, 자연·문학·과학·미술·음악 등 다방면으로 관심을 갖게 됐다. 괴테는 자서전에서 그가 남달리 훌륭한 환경에서 출생했지만, 아들의 교육과 성공을 위해 헌신한 아버지가 있었음을 알린다. 아버지는 직접 혹은 훌륭한 가정교사를 통해 어린 괴테에게 영어와 이탈리아어, 고대 언어를 가르쳤고, 미술·음악에서부터 승마·스케이트에 이르기까지 폭넓은 교육을 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접점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의 조화다. 아버지의 교육열 못지 않게 중요한 점은 괴테가 커다란 호수를 누비는 것처럼 포용력 있게 모든 것을 성공적으로 수용했다는 점이다. 아버지 덕택에 다양한 인간군을 만나면서 괴테는 사람에 대한 깊은 신뢰와 긍정적인 세계관을 갖게 됐다.

명문 메디치가의 미켈란젤로 키우기


▎메디치 가문의 부흥자이자 미켈란젤로를 키운 코지모 데 메디치.
다음 비밀의 문을 열기 전에 [SKY 캐슬]의 대사를 떠올려 본다. 삶을 살아가는 데 독서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괴테도 책읽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드라마 속에서 우주라는 남학생의 어머니(이수임)는 독서관과 관련해 아주 현실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들 우주가 스카이캐슬 옴파로스 독서모임에서 발표해야 할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너무 어렵다고 말하자 이렇게 말한다. “읽지 마, 때려 쳐. 토론도 좋지만 일단 재미있어야지.”

책이 갖춰야 할 기본 조건에는 정보 제공, 재미, 감동 중 어느 하나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가독성에 문제가 있다면 그건 차라투스트라의 팬이면 모를까 일반인에게 읽으라고 강권할 필요는 없다. 물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 몰입이 되는 사람에게는 다른 문제다. 각자의 취향이 다른 점을 잘 지적한 것이다. 고전을 좋아하는 사람은 고전을 읽으면 되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 고전을 읽을 의무는 없다.

하지만 미켈란젤로의 그림을 보는 것은 다르지 않을까? 피렌체를 오늘의 피렌체로 만든 것은 메디치 가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천재적인 경영능력과 정치수완으로 메디치가는 유럽 최고의 부자 가문이 됐다. 메디치가는 집을 지으면서도 귀족들이 많이 살고 있는 동네가 아닌 시장 바로 옆에 집을 지었다. 대중들이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배려하기 위해서였다. 메디치 가문의 부흥자인 코지모 데 메디치는 ‘겸손’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어느 날 그는 공원을 지나다 조각을 하는 어린 아이를 발견한다. 아이는 노인을 조각하고 있는데 이빨이 너무 가지런했다. 로렌조가 말했다. “이빨이 노인치고는 너무 젊은 것 같아. 다시 만드는 것이 좋지 않을까?”

다음날 소년은 기가 막힌 작품을 만들어 온다. 로렌조는 그의 아버지를 불러 아이를 양자로 삼겠다고 한다. 그가 미켈란젤로다. 명문가의 후원을 입은 미켈란젤로는 최고의 인문학 교육을 받으며, 인류를 위한 최고의 작품을 만들 수 있었다. 소년을 양자로 삼아 미술 교육 이전에 최고의 인문학 교육을 시켰다는 점에서 메디치가의 혈통의 우월함을 느껴본다.

우리는 지금 우리 자식들을 괴테나 미켈란젤로 같은 인물로 만들 수 있는 사회적 여건을 갖추고 있는지 묻고 싶다. 빚을 내거나 재산을 모두 쏟아부어서라도 내 자식 하나만은 최고의 대학에 보내야 한다는 부모들이 존재하는 한 대한민국은 스카이캐슬에서 벗어날 수 없다. 더욱이 메디치가 같은 명문가는 영원히 존재하기 어려우리라. 문득 드라마이지만, 정의의 사도 우주 어머니가 쓴 소설 ‘스카이캐슬’을 읽고 싶은 생각을 하며 지금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좋은 교육이란 무엇인가

만약에 내가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다면, 나는 괴테의 발자취를 따라서 그가 생각했던 인간에 대한 사랑을 느끼고 싶다. 그런 느낌을 생각하니, 드라마의 한 대목이 떠오른다. 과거 중학교 교생 실습 시절 우주 엄마 이수임은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연두라는 아이를 보호하고 싶었다. 부모도 포기한 아이라며 신경 끄고 날짜만 채우고 가라는 담임의 말에 이수임은 발끈한다. “살고 싶다, 살려 달라, 외치는데 손잡아 주셔야죠.”

담임에게 소리치던 이수임은 “연두야! 나한테 전화해, 내 번호 알지?”라고 외친다. 연두는 ‘선생님 도와주세요, 저 살고 싶어요’라는 문자메시지를 보내지 못한 채 트럭에 치이는 사고로 숨을 거두고 만다. 훗날 차를 갓길에 세우고 연두를 생각하며 하염없이 우는 이수임의 모습에서 높은 학벌과 지위를 가진 부모 밑에서 성적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스카이캐슬 속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의 운명이 서글퍼진다. 정답이 없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괴테처럼, 미켈란젤로처럼 돈으로 살 수 없는 참교육의 중요성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게 우리가 미래 세대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최소한의 도리이리라.

※ 필자는 국제경제 전문가로 현재 기획재정부 국제금융심의관이다. 대한민국OECD 정책센터 조세본부장, 대외경제협력관 등을 지냈다. 저서로 [한 권으로 읽는 디지털 혁명 4.0] [식탁 위의 경제학자들] [명작의 경제] [법정에 선 경제학자들] 등이 있다.

1468호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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