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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 1년째 표류 중인 애플 ‘배터리 게이트’ 국내 소송, 왜?] 버티기로 일관한 애플, 증거자료도 내지 않아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미국 소송전에선 서류 650만장 제출… 집단소송·디스커버리제도 활성화 필요성 재차 거론

▎애플이 ‘배터리 게이트’에 대한 모든 책임을 인정하면서 내걸었던 사과문. / 사진:petapixel.com 제공
지난해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애플의 ‘배터리 게이트’ 이후 국내에서 남몰래 웃고 있는 쪽은 다름 아닌 애플인 것으로 본지 취재 결과 확인됐다. 배터리 게이트로 피해를 입은 국내 소비자들이 대규모 공동소송(민사)을 제기하고도 1년째 해결의 실마리를 찾지 못한 채 이중고를 겪고 있어서다. 그 사이 애플은 미국 본토에서와 달리 책임 회피로 일관하면서 소비자들을 한번 더 당혹스럽게 만들고 있다. 통상 대기업과 소비자 간의 소송전에서 소비자 권익 보호에는 소극적이라는 인상을 줬던 국내에서의 사법적 관행이 개선돼야 한다는 지적이다.

6만3000여 원고인단이 소송 제기했지만…

앞서 국내에선 배터리 게이트에 반발한 소비자 총 6만3767명이 지난해 3월 법무법인 한누리에 관련 소송을 맡기고 원고인단으로 참여했다. 이는 2014년 KB국민카드·NH농협카드·롯데카드 등 신용카드 3사의 개인정보 유출 관련 손해배상 소송전 때의 원고인단 규모(약 5만5000명)를 넘어선, 국내 단일 사건 사상 최대 규모의 원고인단 구성이었다. 이에 한누리 측은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애플 본사와 애플코리아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애플이 ‘아이폰’ 성능을 고의로 떨어뜨리는 업데이트를 시행해 소비자들의 손해를 유발한 것은 국내 민법상 채무불이행과 불법행위에 해당하고, 업데이트 부작용을 알고도 알리지 않은 것은 소비자기본법 위반에 해당한다는 취지였다. 손해배상 청구액은 약 127억7000만원으로 원고 1인당 20만원씩이었다.

당시 애플은 2016년 12월부터 아이폰 운영체제(iOS) 업데이트를 통해 배터리 잔량이 적은 상태이거나 낮은 온도일 때, 고의로 공지 없이 구형 아이폰의 운영 속도를 떨어뜨린 사실이 드러나 논란의 중심에 섰다. 애플의 배터리 게이트라는 이름으로 각종 외신과 온라인을 통해 파장이 커지자 애플 본사는 2017년 12월 이런 사실을 모두 인정하고 팀 쿡 최고경영자(CEO)가 공식 사과했다(이후 애플은 글로벌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배터리 교체 지원에 나선 바 있다). 이처럼 애플이 잘못을 시인한 직후 소송이 제기되면서 소비자인 원고 측을 옹호하는 사회적 목소리가 높았다. 일각에선 소송전을 계기로 애플이 유독 국내에서 소비자들을 냉대했던 관행이 바로잡히기를 바란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그러나 2월 27일 법조계 취재 결과 이 같은 국내 배터리 게이트 소송전은 1년째 진전 없이 표류 중인 것으로 확인됐다. 법원이 여러 건으로 분리해 지정한 변론기일이 있지만, 피고인 애플 측이 증거조사를 위해 법원으로부터 요구받은 소송 관련 서류를 제출하지 않는 등 일관되게 제대로 된 대응을 하지 않고 있어서다. 이에 당초 법원이 잠정적으로 지정한 최종 판결일인 2월 21일이 지났는데도 1차 변론조차 없었다는 것이다. 소송전을 맡은 한누리의 조계창 변호사는 “소송을 제기한 지 1년이 다 되도록 재판 한 번 제대로 열리지 않았다”며 “재판부에서 어떤 결정을 낸 바가 전혀 없다”고 말했다.

애플이 국내 재판에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는 이유는 단적으로 얘기해 ‘여기서는 그래도 문제가 없어서’다. 조 변호사는 “증거서류 수집을 위한 원고의 ‘문서제출명령 신청’에도 피고(애플) 측은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거부’ 의견만 낸 채 어떤 서류도 내지 않고 있다”고 했다. 이는 미국·영국 등지의 영미법에선 충분하게 보장된 ‘디스커버리(Discovery)’라는 제도가 국내엔 수많은 논의에도 제대로 도입되지 않은 것과 관련이 깊다. 디스커버리제도는 소송을 제기한 원고에게 피고가 보유하고 있는 각종 정보에 광범위하게 접근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보장해주는 제도다(피고의 소송 ‘기각결정’이 기각됐을 때 발동). 이뿐 아니라 모든 관련자들을 사전 신문(訊問)할 권리까지 준다. 주로 의료기관이나 기업, 국가기관 등을 상대로 개인인 원고가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을 때 증거 확보가 어려운 한계점을 보완해주는 것이 목표다.

영미법과 달리 독일·프랑스를 중심으로 하는 유럽 대륙의 법, 즉 대륙법을 따르는 한국은 이 제도가 활성화하지 않았다. 원고 측이 자료 공개 요청을 해도 피고 측이 요청에 부응할 의무가 없다. 국내에선 원고 측이 피고 측에 비해 제한된 자료만 가진 채 열악한 조건에서 소송을 진행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여기에 이번 소송전에선 외려 원고 측만 까다로운 법적 절차 ‘덫’에 걸린 상태다. 이번 소송전은 원고나 피고가 2인 이상인 경우를 의미하는 공동소송으로 진행 중이다. 그런데 이 경우 원고 측은 소송 자격을 입증하기 위해 소송위임장에 인감날인과 인감증명을 첨부해야 한다. 더욱이 애플은 원고인단 개개인의 ▶아이폰 구매 이력 ▶iOS 업데이트 이력 ▶단말 내 일련번호 등 정보 제출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따라서 6만3000여 명이라는 대규모 인원이 이를 모두 일일이 내야만 하는데, 현실적으로 쉽지 않은 일이라는 게 한누리 측의 주장이다. 법원도 이 단계에서 일괄 ‘보정명령’만 내린 채 소송을 더 진행시키지 않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결국 소송전이 이처럼 지지부진해진 것은 애플이 국내 사법 절차상 허점을 잘 파고들어 버티고 있기 때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이와 달리 미국에선 애플의 과실(過失)을 바로잡기 위한 소송전이 순조롭게 진행 중이라는 게 법조계의 해석이다. 한국과 달리 미국에선 ‘집단소송’ 제도 하에 여러 건의 소송전이 병합 진행되고 있어서다. 집단소송제는 다수의 피해자 중 일부인 대표당사자가 가해자를 상대로 소송을 하면, 나머지 피해자들은 별도 소송 없이도 그 판결로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제도다. 소송에 원고인단으로 참여하지 않아도 판결 효력을 공유할 수 있어서다. 이 때문에 원고 측은 국내에서처럼 수만 명이 인감증명 등을 요청받지 않고도 소송에 자유로이 임하고 있다.

디스커버리제도가 병행되고 있는 것도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법조계 한 관계자는 “미국 법원은 피고 측인 애플 본사로부터 현재까지 약 650만장의 서류를 제출받아 증거조사에 나서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디스커버리제도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이 관계자는 “국내에선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만 2004년 제한적으로 도입돼 특정 기업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주주들이 집단소송을 일부 제기한 바 있지만, 14년 간 총 10건만 제기돼 그중 3건에서만 원고 승소 판결이 났을 만큼 승소율이 낮다”며 “문제 개선을 위해선 일반법으로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할뿐더러 디스커버리제도 역시 활성화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집단소송과 달리 공동소송 땐 불리함 많아

대량 소비와 대량 유통, 여기에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으로 대기업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가 피해를 보게 되기가 쉬워졌음에도 국내법은 관행적으로 이를 외면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오히려 피해자인 소비자들만 절차적 어려움에 직면하기 쉬운 구조라는 얘기다. 익명을 원한 다른 법무법인의 한 변호사는 “집단소송제 도입을 떠나서 법원이 공동소송 때는 ‘귀찮은데 어떻게 하면 이걸 억제할까’ 관행적으로 그렇게만 보는 분위기가 있다”며 “투입한 시간과 비용만 낭비하는 경우가 많아서 단 한 건의 소송을 진행하더라도 부담이 많다”고 토로했다.

법조계에선 이대로라면 이번 소송전도 진전 없이 기일만 끌다 흐지부지될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있다. 실제로 대진침대의 라돈 검출, BMW의 차량 화재와 같은 세간을 분노케 한 사건이 최근 잇따라 발생하면서 여러 건의 공동소송이 제기됐지만 다수 피해자들은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라며 승소를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는 사이 일부 기업들은 해외에서와는 180도 다른 무성의한 태도로 소송전에 임하면서 피해자들을 두 번 울리고 있다. 사회적으로 또 다시 높아진 집단소송제 확대 도입 등의 요구 목소리에 정부와 국회가 응답할 때라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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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74호 (2019.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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