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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짝 열린 정의선 시대] 주력사 대표 맡아 그룹 장악력 강화 

 

이창균 기자
현대차·현대모비스 대표, 기아차·현대제철 사내이사… 경영권 승계 작업도 탄력 받을 전망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정몽구 회장의 뒤를 잇는 ‘정의선 시대’를 활짝 열었다. 지난해 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을 맡은 데 이어 핵심 계열사인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대표에 올라 그룹 장악력을 더욱 강화했다. 투기자본인 엘리엇의 공격으로 주춤했던 경영권 승계 작업도 속도를 낼 전망이다. 물론 도전과제도 만만찮다. 둔화된 실적을 끌어올리는 한편 미래 차 개발 경쟁에도 나서야 한다. 그가 단순히 창업주의 3세가 아니라 능력 있는 오너 경영인이란 평가를 계속 받을 수 있을까.


▎현대차·현대모비스의 대표로 선임된 정의선 현대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 / 사진:현대차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총괄 수석부회장이 3월 22일 현대자동차와 현대모비스의 대표이사에 올랐다. 이날 오전 정기주주총회에 이어 열린 임시이사회에서다. 정 수석부회장은 지난 3월 15일 열린 기아자동차 주주총회에서는 사내이사로 선임됐다. 이미 기아차 대표(2005~2009년)를 지낸 정 수석부회장은 기아차 비상근이사에서 이번에 사내이사로 전환하면서 그룹 장악력을 더욱 강화했다는 평가다. 현대제철의 사내이사이기도 한 정 수석부회장은 이로써 지난 1999년 현대차 입사 이후 20년 만에 그룹의 핵심 4개사를 동시에 맡게 됐다. 고령이라 최근 공식석상에 거의 모습을 보이지 않는 정몽구 회장의 뒤를 잇는 ‘정의선 시대’가 활짝 열린 셈이다.

현대차그룹은 차량 생산규모 기준 세계 5위, 보유자산 기준 국내 2위다. 현대차는 이런 그룹에서 명실상부한 핵심 계열사이며, 현대모비스는 그룹 순환출자의 핵심 고리 역할을 하는 계열사다.

현대차는 기존 정몽구·이원희(사장)·하언태(부사장) 3인 각자대표 체제에서 정 수석부회장까지 포함된 4인 각자대표 체제로 전환한다. 현대모비스는 정 수석부회장과 함께 대표로 새로 선임한 박정국 사장까지 정몽구·정의선·박정국 3인 각자대표 체제가 됐다.

디자인 경영으로 브랜드 가치 끌어올려


1970년생인 정 수석부회장은 99년 현대차 구매실장(이사)으로 입사하면서 경영수업을 시작했다. 이후 약 20년 간 기아차 대표는 물론 현대모비스 부사장, 현대차 부회장 등을 역임하며 경영 일선 경험을 쌓았다. 지난해에는 총괄 수석부회장으로 승진하면서 일반 부회장들과 급을 달리 했다. 그 사이 정 수석부회장은 ‘젊은 리더’로서 국내외에서 잇따라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내며 경영능력을 인정받았다.

2006년 기아차의 피터 슈라이어 전 아우디·폴크스바겐 디자인 총괄 책임자(현 기아차 사장) 영입을 주도해 디자인 경영으로 브랜드 가치를 끌어올린 게 대표적이다. ‘K’ 시리즈 등의 디자인을 젊은 감각으로 재정립한 기아차는 “무색무취”라는 대내외 혹평 속에 영업손실로 고전하던 과거를 뒤로하고 시장의 호평을 받으면서 2008년 흑자로 전환했다. 현대차그룹이 연매출 50조원대의 글로벌 기업으로 거듭나는 원동력이 됐다. 슈라이어 사장은 정 수석부회장에 대해 “디자인 차별화를 매우 강조해 수시로 의견을 교환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2009년 부회장으로 승진해 현대차로 자리를 옮겨서도 고급차 브랜드 ‘제네시스’의 국내외 출시를 주도해 또 한 번 성과를 냈다. 그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외부 인사 영입, 조직 개편까지 모든 과정을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차 관계자는 “2015년 11월부터 해외에서 선보인 ‘G80’ ‘G90’ 등의 제네시스 라인업이 지난해 10월 기준 글로벌 누적 판매량 20만대를 돌파했다”고 말했다. 정 수석부회장은 이런 성과에 힘입어 단순히 창업주의 3세가 아니라 능력 있는 오너 경영인이란 평가를 받아왔다. 재야 시절 ‘재벌 저격수’로 유명했던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도 2017년 취임 직후 공식석상에서 “기아차를 회생시킨 정 부회장의 능력에 대해 시장에선 의구심이 거의 없다”고 평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정 수석부회장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대표로 선임되기까지 험로를 거쳐와야 했다.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 지분을 도합 1조원어치 넘게 보유하고 있는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단기 고수익 실현을 목표로 글로벌 시장에 투자하는 개인모집 투자신탁, 나쁜 의미로는 투기성 자본) 엘리엇 매니지먼트(이하 엘리엇)가 주주권 행사를 이유로 정 수석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행보에 제동을 걸어서다. 앞서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와 현대글로비스의 분할 합병이 핵심인 지배구조 개편안을 지난해 3월 발표했다. 경영권 승계를 염두에 둔 개편안이었다. 그러나 엘리엇은 주요 의결권 자문사들과 함께 이 개편안이 다수 주주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반대하면서 개편안을 무산시켰다.

주총에서 엘리엇의 맹공 막아


정 수석부회장은 당시(지난해 5월) “소통 노력이 부족했다”며 “여러 의견을 전향적으로 수렴해 새로운 개편안을 내놓겠다”고 진화에 나섰다. 이번 주주총회에 직전에도 엘리엇은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주요 주주 사이에서 잇단 ‘흔들기’와 ‘힘겨루기’를 시도했다. 지난 1월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에 주당 각각 2만1967원, 2만6399원의 고배당을 요구하면서 두 회사 이사회가 제시한 배당 방안에 반기를 들었다. 또 자기 측 인사 각각 3인과 2인을 두 회사에 사외이사·감사로 추천하는 등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엘리엇은 2010년 이후 아시아 기업들을 주된 타깃으로 삼고, 주주권 행사 명분 이면에서 ▶대주주의 지분율이 낮거나 ▶지배구조 개편이 시급하거나 ▶최근 실적이 나빠진 회사를 집중 공격한다는 평을 받았다. 잘 되면 오너의 지배력을 약화시켜 기업 장악을 노릴 수 있고, 거기까진 어렵더라도 주가 급변을 유도해 싸게 사서 지분율을 높이거나 비싸게 되팔아 시세차익을 거두는 등의 성과를 낼 수 있어서다. 현대차그룹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지난해와 달리 이번에는 현대차그룹 측이 엘리엇의 공격을 잘 막아내면서 주주총회를 순조롭게 마무리했다. 그룹 관계자는 “미래 경쟁력 저해와 기업가치 훼손 우려가 있는 제안이라는 명분을 내세우자 글래스루이스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 국내외 주요 의결권 자문사들이 우리 손을 들어줬다”고 설명했다. 현대차와 현대모비스의 2대 주주인 국민연금공단까지 두 회사의 주주총회 안건에 모두 찬성하면서 엘리엇은 고배를 마셨다.

이로써 곧 이어질 지배구조 개편을 통한 정 수석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작업도 탄력을 받게 됐다. 때마침 노사관계에도 훈풍이 불면서 정 수석부회장에게 힘이 되고 있다. 현대차 노조는 3월 12일 성명을 내고 엘리엇이 무리한 배당 요구를 철회할 것을 요청했다. 기아차 노사도 3월 18일 통상임금 합의안에 서명하면서 8년 간 이어진 법정 싸움에 마침표를 찍었다.

2023년까지 45조원 투자해 분위기 반전 노려


이렇게 정의선 체제가 더욱 굳어졌지만 정 수석부회장에게 주어진 과제도 만만찮다. 지난해 현대차는 전년 대비 영업이익이 반 토막(4조5747억원→2조4222억원)이 나는 충격적인 성적표를 받아들었다. 미·중 무역 분쟁 장기화, 원·달러 환율 하락, 세계적 보호무역주의 기조 확산과 같은 각종 악재에 시달린 결과다. 그룹의 판매 전략 전반에 오판이 있었다는 비판도 잇따랐다. 현대차그룹의 부진에 한국 자동차 산업은 지난해 국내 생산량이 2.1% 감소하면서 세계 7위로 밀려났다.

올해도 쉽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 신용평가사 무디스는 최근 보고서에서 올해 자동차 산업 전망을 기존 ‘안정적(stable)’에서 ‘부정적(negative)’으로 하향 조정하면서 지난해 대비 성장 전망치를 기존 1.2%에서 0.5%로 낮췄다. 최대 시장인 중국은 2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지난해 역성장한 데 이어 올해도 역성장이 우려된다. 강성진 KB증권 연구원은 “현대차그룹이 정 수석부회장 주도로 중국 내 일부 공장 구조조정, 전략 라인업 개편 등으로 위기 극복에 나설 것”으로 내다봤다.

현대차그룹은 동남아를 비롯한 신흥시장 개척, 자율주행차 같은 미래형 자동차 분야 공략에도 힘을 쏟을 계획이다. 이를 위해 2023년까지 총 45조원가량 투자한다는 구체적 방안도 제시했다.

[박스기사] 현대차그룹 경영권 승계 시나리오는 - 지분 직접 매입? 현대글로비스 이용? 지주사 체제 전환?


현대차와 현대모비스 대표에 올랐지만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상 정의선 수석부회장의 장악력은 아직 강력하지 않은 편이다. 지난해 11월 발표된 분기보고서 기준으로 현대차 지분율이 2.35%, 기아차 1.74%에 불과하다. 그룹 지배구조의 최고 정점에 있는 현대모비스 지분율은 0%다. 논란 없이 경영권 승계를 마무리하려면 예전보다 더욱 복잡한 고차방정식을 풀어야 한다. 이와 관련 몇 가지 시나리오가 전문가 사이에서 거론되고 있다.

우선 정몽구 회장과 정 수석부회장이 기아차와 현대제철 등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직접 매입해 순환출자 고리를 끊는 방법이다. 은경완 메리츠종금증권 연구원은 “현대차의 최대주주인 현대모비스에 대한 지배력 강화가 오너 일가로선 필수적인 수순일 것”이라며 “직접 순환출자 지분을 사들여 이 문제 해결을 시도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현대모비스의 현대차 지분율은 21.43%다. 이 경우 두 사람의 자금력 확보가 관건이다. 계열사들이 보유한 현대모비스 지분을 모두 매입하려면 약 4조7000억원이 필요하다. 두 사람이 이미 보유한 지분가치를 제외해도 1조1000억원가량을 더 마련해야 한다. 정 부회장이 19.46%의 지분을 보유한 현대오토에버가 3월 28일 유가증권시장에 상장하면서 확보할 자금을 더하고, 현대모비스 일부 지분을 추가 매각해 대응할 수 있다는 시나리오다.

현대글로비스를 중심으로 지배구조 개편에 나설 가능성도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정 수석부회장은 현대글로비스 지분 23.29%를 보유한 최대주주. 그만큼 이점이 있다. 다만 현대글로비스가 그룹 내 일감 몰아주기 의혹을 받아왔던 기업이라 정부와 시장에서 보는 눈이 곱지 않을 것이라는 점, 기존의 현대모비스 위에 현대글로비스만 얹어져 비효율적인 옥상옥(屋上屋) 구조가 될 수 있다는 점은 부담 요소다.

지주회사 체제로의 전환 시나리오도 거론된다. 상대적으로 자금이 덜 들거나 세무적인 측면에서 유리해서다. 앞서 롯데그룹과 현대중공업그룹 등이 지주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경영권 승계에 속도를 냈다. 현대차그룹도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의 세 회사를 각각 사업회사와 지주사로 분할하고 사업회사끼리 합병해 지주사 체제로 전환해 오너 일가 중심의 지배구조로 재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선택지에선 비(非)핵심 자산 매각이 필수라 현대캐피탈과 현대카드 같은 그룹 내 금융 계열사를 매각해야 한다. 하지만 포기하기 쉽지 않은 계열사들이라 가능성이 크지 않다는 분석도 나온다.

-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1477호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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