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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펙트 스톰’의 선험적 예후 

 

태풍과 폭풍은 다르다. 강풍과 강우를 동반하는 태풍은 여름에 많이 발생한다. 거센 바람에 추위와 눈이 겹치는 폭풍은 봄이나 여름에는 잘 오지 않는다. 풍력 12등급의 매우 강한 바람인 태풍은 ‘싹쓸바람’이고, 폭풍은 ‘왕바람’이라는 순우리말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거의 쓰이지 않는다. 지구촌 곳곳에서는 태풍도 달리 부른다. 저마다 언어나 표현방식이 다르기 때문이다. 아시아권에서는 태풍, 카리브해에서는 ‘폭풍의 신’이라는 뜻의 허리케인 (Hurricane), 인도양에서 발생하는 것은 사이클론(Cyclone)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연안에서 발생하는 태풍을 그곳 원주민은 윌리윌리(Willy Willy)라는 의성어로 부른다. 역시 열대성 사이클론이다.

폭풍이나 허리케인 등 악천후로 표기되는 영어의 ‘스톰(Storm)’은 구체적으로 말하면 거칠고 파괴적인, 특히 지표에 영향을 미치는 대기의 교란된 상태다. 실례를 들어 비를 머금은 폭풍(Rainstrom), 바람 폭풍(Windstorm), 우박 폭풍(Hailstorm) 그리고 눈 폭풍(Snow-storm) 등이 있다. 때론 비유적으로 정치·경제·사회의 동요나 혼란 상태를 나타내는 용어로 쓰일 때가 많다.

2000년 조지 클루니와 다이앤 레인이 출연한 영화 [퍼펙트 스톰(Perpect Storm)]은 실화를 바탕으로 했다. 퍼펙트 스톰이란 위력이 세지 않은 태풍이 다른 자연현상을 만나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태풍으로 변하는 현상을 말한다. 1991년 미국 동부 해안을 강타한 태풍에 휘말린 ‘안드레아 게일(Andrea Gail)호’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 [퍼펙트 스톰]으로 더욱 유명해진 용어다.

만선의 꿈을 안고 출발한 게일호 일행은 뉴잉글랜드 어선들이 주로 조업하는 일반적 어로수역을 벗어나 풍요로운 어장으로 소문난 플레미시 캡(Flemish Cap)까지 진출하기로 한다. 그때 ‘그레이스’로 명명된 남쪽의 태풍 전선 허리케인이 대서양으로 북진하면서 다른 두 개의 기상 전선과 충돌할 위기에 빠져 죽을 고비를 넘긴다는 줄거리. 이 사고로 게일에 승선했던 6명의 선원을 포함해 12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처럼 퍼펙트 스톰(초강력 폭풍)은 본래 기상용어다. 위력이 크지 않은 개개의 태풍이 다른 자연현상과 동시에 발생해 엄청난 파괴력을 뿜는 현상을 뜻한다. 경제용어로는 여러 나라에서 재정위기, 경기 침체 등 다양한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나타나며 거대한 경제위기를 초래하는 상황을 말하기도 한다.

어둡고 비관적 경제 전망을 내놓아 ‘닥터 둠(Dr. Doom)’이라는 별명이 붙은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가 쓰기 시작했다. 루비니 교수는 2011년 7월, 미국 경제의 이중침체(Double dip), 유럽의 경제위기, 중국의 경제 경착륙 등 악재가 겹쳐서 빠르면 2012년, 늦어도 2013년까지는 세계 경제가 퍼펙트 스톰을 맞이할 수 있다고 예견했다. 물론 예고된 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최근 미국과 중국의 갈등이 무역분쟁에서 환율·안보 문제로까지 번지면서 세계 경제에 혼란이 가중되자 각국 중앙은행이 대비에 들어갔다. 미국의 고율 관세로 촉발된 글로벌 무역 갈등이 증폭되고 미국과 중국의 경제가 둔화 국면에 들어섰으며 독일을 비롯한 유럽 경제도 신통찮아 세계 경제에 퍼펙트 스톰이 불어닥칠 수 있다는 위기감이 커졌기 때문이다. 루비니 교수는 지난해부터 세계 경제에 퍼펙트 스톰이 임박했다고 다시 한번 경고해왔다.

퍼펙트 스톰은 복수의 크고 작은 악재가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 직면하게 되는 경제위기 상황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 됐다. 원래는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자연현상을 뜻하지만 지금은 국가적 차원 또는 세계적 차원에서 직면하는 심각한 경제위기 상황을 비유하기 위해 ‘퍼펙트 스톰’이란 용어를 쓰고 있다.

미국발 퍼펙트 스톰은 2008년에 일어났었다.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다. 2008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 사태는 사전징후 없이 갑자기 벌어진 일이 아니다. 그 이전 10여 년 동안의 경기 호황에 힘입어 주택가격이 가파르게 상승하고, 주택담보대출도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과정에서 대출 변제 능력이 부족한 저소득층에게도 엄청난 비우량 주택담보대출이 제공됐다. 악재가 이미 도사리고 있었던 셈이다. 이른바 하인리히 법칙(Heinrich’s Law)이다. 큰 사고가 일어나기 전에 반드시 유사한 작은 사고와 사전징후가 선행한다는 선험적인 법칙이다.

흔히 ‘1 : 29 : 300의 법칙’이라고 한다. 평균적으로 한 건의 큰 사고(Major incident) 전에 29번의 작은 사고(Minor incident)가 발생하고 300번의 잠재적 징후(Near misses)가 나타난다는 것이다. 2007년부터 급락하기 시작한 주택가격 탓에 대출금을 갚지 못하는 가계가 속출하면서 주택을 압류당한 개인은 거리로 나앉고, 대출금 미상환에 따른 금융회사의 파산으로 이어졌다. 리먼브라더스(Lehman Brothers)·AIG 등이 대표적인 피해자였다.

미국 정부가 긴급 구제금융에 나서면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회오리가 불어닥치기 시작했다. 미국발 금융위기는 실제로 유로존(Euro Zone)을 비롯한 전 세계로 번져갔다. 스페인·포르투갈·그리스 등 남유럽 약체 국가들부터 연쇄적으로 경제위기를 맞게 된다. 이들은 여전히 자산가격 폭락, 심각한 국가부채와 실업률 등 이중삼중의 악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사정도 예외일 수 없다. 성장이 둔화한 중국이나 마이너스 성장시대에 돌입한 일본 그리고 저성장·저고용의 늪에 빠진 한국 등이 퍼펙트 스톰에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우리가 진짜 퍼펙트 스톰에 직면한 것일까.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지난 10여 년간 툭하면 퍼펙트 스톰을 경고해왔던 건 사실이다.

다만 이번에는 예후가 심상치 않다. 일본과 무역분쟁, 미국·중국 무역전쟁에다 일촉즉발의 홍콩사태 등은 수출 위주 우리 경제와 금융시장에 불안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나 독일 경제 침체, 아르헨티나 주가 급락 등 유럽과 중남미 시장의 변동성도 우리 수출과 금융시장에 충격을 줄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흔들리는 글로벌 거시경제나 금융시장이 우리 부동산시장에 미칠 파장과 대책도 폭넓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는 경제시스템 전반에 미칠 파급효과와 우선순위에 따라 선택해야 한다. 퍼펙트 스톰이 몰려올 때는 단편적 대책이 아닌 시스템적 대응이 절실하다.

- 정영수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부국장)

1500호 (2019.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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