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노블레스 말라드’의 먹구름 

 

프랑스와 영국이 100년을 맞서 싸운 이른바 ‘백년전쟁(Hundred Years’s War)’이 끝날 무렵, 도버 해협의 항구도시이자 프랑스의 요충이었던 칼레(Calais)가 영국에 함락된다. 칼레 시장은 “목숨만은 살려 달라”고 사절단을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보내 자비를 구했다. 그러나 영국은 단호했다. 감히 대영제국에 덤빈 책임을 묻겠다는 것이었다.

“다만 칼레 시민의 목숨을 보장한다는 조건으로, 도시 대표 6명만 교수형에 처하겠다”고 통보해왔다. 칼레 시민들은 과연 누가 먼저 목을 내놔야 할지 술렁이기 시작했다. 도시가 온통 긴장과 혼란에 빠진 상황에서 칼레 시의 으뜸가는 부자인 ‘생피에르(St Pierre)’가 맨 먼저 교수형을 자청했다. 이어 시장, 상인, 법률가 등 귀족들이 줄줄이 나선다.

그들은 처형을 받기 위해 스스로 교수대에 모였다. 그러자 지도자급 6명의 희생정신에 감복한 에드워드 3세는 형을 집행하지 않고 그들을 모두 사면했다. 이렇게 해서 높은 신분에 따른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가 탄생한다. 이는 곧 서구사회를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되었고, 근대에 이르기까지 이 같은 도덕의식은 계층 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이처럼 사회 고위층 인사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 높은 신분에 걸맞은 대접을 받으려면 명예(Noblesse)만큼 의무(Oblige)를 다해야 한다는 뜻이다. 이미 초기 로마 시대에도 왕과 귀족들이 보여준 투철한 도덕의식과 솔선수범하는 희생정신이 있었다. 로마 사회에서는 사회 고위층의 공공봉사와 기부·헌납 등의 전통이 강했고, 이러한 행위는 의무인 동시에 명예로 인식되면서 자발적이고 경쟁적으로 이루어졌다.

미국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도 만만치 않다. 엄청난 희생자를 낸 한국전쟁 당시 미국 참전용사 중 142명이 미군 장성들의 아들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입증된다.

“많은 것을 받는 사람은 많은 책무가 요구된다((Much is given, much is required).” 미국 제35대 대통령 존 F. 케네디가 1961년 1월 20일 대통령 취임 연설에서 한 말이다. 미국 최대의 할인유통매장인 ‘월마트’ 창업주는 대를 이은 근검절약 정신으로 유명하다. 창업자 샘 월턴은 유통 사업으로 억만장자가 됐지만, 자녀들은 가게에 나와 일한 만큼만 용돈을 주고 자신도 낡은 트럭을 손수 몰고 다녔다.

근대에 이르러서도 이러한 도덕의식은 계층 간 갈등을 해결할 수 있는 최고의 수단으로 여겨졌다. 실제로 1, 2차 세계대전에서는 영국의 고위층 자제가 다니던 이튼칼리지 출신 중 2000여 명이 전사했고, 포클랜드전쟁 때는 영국 여왕의 둘째 아들 앤드루가 전투 헬기 조종사로 참전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회 지도층이 국민의 의무를 실천하지 않는 문제를 비판하는 부정적인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사회 저명 인사나 소위 상류계층의 병역기피가 매우 오래된 병폐로 자주 입에 오르내린다. ‘오너 리스크(Owner risk)’에 대한 여론의 준엄한 심판은 일부 경영진의 ‘갑질 사건’에서 불거져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이제 우리도 도덕적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높은 신분에 걸맞은 대접을 받을 수 없는 사회로 다가서고 있다.

지도층의 의무를 강조하는 ‘노블레스 오블리주’처럼, 부자에게도 사회적 책임이 뒤따른다는 논리가 최근 확산하고 있다. 영연방 유대교 최고지도자인 조너선 삭스(J. Sachs)가 처음 소개한 개념으로, 특히 금융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리세스 오블리주(Richesse Oblige)’가 그것이다. 부(富)를 누리는 계층이 치러야 할 의무다.

한국에서는 과연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얼마나 지켜질까. 거꾸로 기득권 세력이 권력을 이용하여 세도를 부리는 행위인 ‘노블레스 말라드’는 없을까. 프랑스어로 귀족을 뜻하는 노블레스(Noblesse)와 아프고 병든 상태를 뜻하는 말라드(Malade)의 합성어로, 기득권 세력이 힘을 믿고 각종 부정부패를 저지르는 행위를 말한다.

‘부모 간 인턴 주고받기, 00외고 유학반, 상류층 금수저 모임….” 최근 조국 법무부 장관의 임명과 별개로 검찰은 조 장관과 관련된 여러 의혹에 대해 수사를 진행 중이다. 조국 장관 딸 조모씨의 ‘인턴 품앗이’ 의혹도 그중 하나다. 보도가 사실이라면 ‘유학반’은 ‘스펙 부풀리기’의 복마전인 셈이다. 입시 전문가들과 외고 졸업생들에게 물어봤다. 유학반은 다 ‘금수저’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의 노블레스 말라드를 더 말해 뭘 하겠는가.

“금융권은 과도한 탐욕과 도덕적 해이를 버려야 합니다.” 전 금융위원장 한 분은 기자들에게 미국의 ‘월가 시위(Occupy Wall Street)’를 언급하면서 한국 금융권에 일침을 가한 적이 있었다. 이제 우리 금융권에도 지도층의 의무를 강조하는 리세스 오블리주가 절실하다는 것이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5만여 개의 기업이 쓰러졌다. 그냥 망한 것이 아니라 은행에 큰 빚을 남겼다. 금융회사들까지 파산 위기에 내몰리자 정부는 공적자금을 투입해 손실을 막아줬다. 리먼 브러더스 사태 때도 마찬가지. 구제금융을 받고 기사회생한 금융회사들이 거액의 연봉과 성과급으로 흥청거리는 건 아닌지.

‘알지 못하고 맞을 일을 행한 종은 적게 맞으리라. 무릇 많이 받은 자에게는 많이 요구할 것이요 많이 맡은 자에게는 많이 달라 할 것이니라.’ 신약성서(누가복음 12장 48절)에도 나온다. 가히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원전이라고나 할까. 핀란드에는 소득 수준에 따라 벌금을 내는, 이를테면 노블레스 오블리주 법(法)이 있다. 한 백만장자가 자동차로 시속 40㎞의 제한 구간을 약 70㎞로 달렸다가 일반 서민의 10배가 넘는 8700만원의 거액을 벌금으로 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정부와 여당은 당정 협의를 열고 ‘재산 비례 벌금제’ 도입을 추진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행위 불법 및 행위자 책임 기준으로 벌금일수를 정하고 경제적 사정에 따라 벌금액을 산정, 불평등한 벌금제도를 개선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학계에서는 “같은 행위에 대해 벌금을 차등화하는 것이 헌법상 평등권을 침해하는 게 아닌지 위헌 논란이 나올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다. 이도 저도 우리에겐 먼 나라 얘기일 뿐일까.

- 정영수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부국장)

1504호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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