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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10) 극한 상황에서 기개 내보인 이홍장] 총격 받고도 협상장 나가 여론 돌려 

 

일본과 시노모세키조약에서 배상금 등 낮춰... 치욕적 조건이었지만 피습 전보다 완화

▎‘동양의 비스마르크’이자 외국 침략자와 내통한 매국노라는 뜻의 ‘한간(漢奸)’으로도 불린 이홍장.
이홍장(李鴻章), 중국어 발음으로 하면 리훙장은 문제적 인물이다. 미국의 18대 대통령을 지낸 율리시스 그랜트는 이홍장을 영국의 글래드스톤, 독일의 비스마르크와 더불어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세 명의 지도자로 꼽았다. 많은 사람이 그를 ‘동양의 비스마르크’라 불렀고 근대 중국의 1인자, 중국의 근대화를 위해 헌신한 정치가로 평가하는 데 주저함이 없다. 그러나 이런 평가도 만만치 않다. 외국 침략자와 내통한 매국노라는 뜻의 ‘한간(漢奸)’. 재물을 좋아했던 노회한 권력가. 워낙 이미지가 상반되다 보니 그에 대해 정확히 판단하기가 쉽진 않지만 이것 하나만큼은 분명하다. 19세기 후반의 중국, 그리고 동북아시아는 그를 빼놓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는 것.

근대 중국의 1인자 vs 노회한 권력가


▎1896년 영국 방문 중 솔즈베리 총리(왼쪽)와 함께한 73세의 이홍장. 그는 청일전쟁 패배 이후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권력자가 아닌 외교사절로 서구열강을 순방했다.
이홍장은 1823년 1월 중국 안휘성에서 태어났다. 23세 때 저명한 학자이자 정치가 증국번의 제자가 되었고 스승을 따라 태평천국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중국의 대표적 근대화운동인 양무운동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는 특히 군사·외교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했는데, 덕분에 승진을 거듭해 북경과 천진, 하북성, 하남성, 산동성를 총괄하는 직예(直)총독에 임명됐다. 산동성 이북 지역의 통상외교, 군무를 관장하는 북양대신도 겸직했다. 사실상 중국 전체의 통상, 외교, 대외방어를 책임졌다고 보면 된다.

그런데 1894년 청나라와 이홍장에게 거대한 시련이 닥친다. 조선 땅에서 발발한 청일전쟁에서 청나라가 참패한 것이다. 7월 25일 일본 군함의 포격을 받은 청군 군함 제원(濟遠)호가 침몰해 700명의 청군이 수장되었고, 7월 28일 아산전투에서는 청나라 육군이 일본군에게 대패했다. 다시 9월 15일 평양전투에서 청군은 2000여 명의 육군을, 9월 17일 압록강 입구에서 벌어진 해전에서 청은 5척의 군함과 800여 명의 병력을 잃었다. 이 밖에도 크고 작은 전투를 통해 이홍장이 강군이라며 자랑했던 부대들이 괴멸 당하다시피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동북지역의 여러 항구, 군사기지들이 일본군에게 점령되면서 1895년 2월 청나라는 결국 일본에게 항복하고 만다.

청군이 대패하고 ‘섬나라 오랑캐’라며 무시했던 일본에 머리를 굽히는 치욕이 견디기 힘들었을 테지만 누군가는 뒷수습을 해야 하고, 이홍장은 강화교섭을 위해 일본 시모노세키로 향했다. 당시 이홍장을 만난 일본 측 전권대신 이토 히로부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10년 전 공을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이렇게 말했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유신을 통해 부국강병을 실현해가고 있으니 청나라도 속히 개혁을 하시라고. 그 때의 충고를 왜 좇지 않은 것입니까?” 자신의 말을 듣지 않아 이렇게 되지 않았냐는 비아냥거림이었다. 그러자 이홍장이 대답했다. “노력했습니다. 일본이야 단기간 내 개혁이 가능하겠지만 중국과 같은 대국은 많은 시간이 걸립니다.”

그런 이홍장의 자존심을 비웃기라도 하듯 일본은 무리한 요구를 제시했다. 조선에서 손을 떼고, 대고(大沽, 발해만의 중심 항구)·천진·산해관을 내어놓고 3억냥의 배상금을 지급하라는 것이었다. 청나라의 최대 요충지이자 수도 북경으로 들어가는 관문을 넘기라는 것으로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요구였다. 청나라의 4년치 수입을 초과하는 3억냥 역시 감당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이홍장이 조건을 완화시키고자 노력했지만 일본은 요지부동이었다. 요즘 어떤 글들을 보면 이홍장이 ‘협상이 결렬되었다며 멸망을 각오하고 끝까지 항전하는 길밖에 없다’는 전문을 본국에 보냈고 이를 감청한 일본이 깜짝 놀라 요구 조건을 낮췄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그 사실을 입증할 만한 기록을 찾기 힘들다. 대신 이홍장은 이 때 자신에게 발생한 사건을 이용해 담판을 유리하게 이끌었다. 그가 괴한에게 피습된 사건이다.

3월 24일 협상회의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던 이홍장에게 오야마 로쿠노스케라는 일본 젊은이가 총격을 가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저 거물을 저격해 유명해지고 싶었던 정신 나간 철부지의 소행이었다. 어쨌든 이 총격으로 탄알이 이홍장의 왼쪽 광대뼈 아래를 뚫고 들어가 왼쪽 눈 밑에 깊이 박히는 중상을 입었다.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한 사고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일본 정부는 당황한다. 일본 땅에서, 일본 사람이 심각한 외교 문제로 비화될 범죄를 저질렀으니 말이다. 이에 일왕은 어의를 보내 치료를 돕게 했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일본 정부의 고관들이 찾아와 정중하게 사과했다.

하지만 단지 여기까지였다면 협상내용은 크게 변화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간의 편의를 봐주는 정도? 이홍장에게 선물을 주는 정도? 그 수준에서 일본은 물러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홍장이 단호하게 행동하면서 일본 내 여론, 나아가 국제 여론까지 변하게 된다. 이홍장은 당장 탄알 제거 수술을 받고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들의 권유를 뿌리치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국가의 위태로움이 경각에 달려 있는 상황에서 평화를 성사시키는 일이 지연되어서는 안 된다. 어찌 나 때문에 시간을 지체하여 국사를 그르칠 수 있겠는가? 죽으면 죽었지 지금 탄알을 뽑을 수 없다.” 그러면서 붕대를 감고 바로 협상장으로 나섰는데 피가 흘러 옷을 적셨지만 “만약 내가 죽어 이 나라에 득이 된다면 나는 기꺼이 죽을 수 있다”라며 태연했다(여기서 이홍장의 말은 양계초(梁啓超)가 지은 [논이홍장(論李鴻章)]의 내용을 기준으로 함).

이러한 이홍장의 행동이 언론 등을 통해 알려지면서 청나라에 대한 동정여론이 늘어났고 국제사회에서 일본이 너무 가혹한 요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비등해졌다. 그때껏 꿈쩍도 하지 않던 일본 정부도 요구 조건을 일부 양보하게 되는데, 국내외 여론이 부담스러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배상금은 3억냥에서 2억냥으로 감액되었고, 3년 내에 배상금을 지급할 경우 이자는 면제하는 것으로 타결됐다. 일본에 할양하는 땅도 중국 동북 봉천성 남부의 일부 지역과 대만, 팽호(澎湖)열도의 섬들로 조정됐다. 여전히 중국으로서는 치욕적인 조건이었지만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이홍장 피습 이전의 요구보다는 상당히 완화된 것이었다. 이것이 이른바 ‘시모노세키조약’, 중국 표현으로는 ‘마관조약’이다.

의사 만류에도 피 흘리며 협상

시모노세키조약을 체결한 후 이홍장은 중국에서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국토를 일본에게 내어준 매국노라는 공격이 집중됐다.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더구나 청일전쟁을 초래하고 청일전쟁이 패배한 데는 이홍장의 책임이 매우 크다. 그러나 이 강화 담판만 놓고 본다면 이홍장은 나름의 최선을 다했다. 그가 자신에게 닥친 피습사건을 적절히 활용하고 담대하게 협상에 나서지 않았더라면, 이를 통해 여론전에서 승리하지 못했더라면 일본의 배상 요구는 절대로 줄어들지 않았을 것이다. 극한 상황에 내몰리더라도 담대함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 담판의 돌파구가 될 수도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07호 (2019.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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