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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담배 퇴출 새 국면 맞나] 폐 손상 원인 물질 국내엔 반입되지 않아 

 

미 질병통제예방센터, 비타민E 아세테이트 지목… 업계 “사용 중단 권고 과하다” 비판

▎사진:© gettyimagesbank
정부가 폐 손상 가능성을 들어 내린 ‘사용 중단’ 권고로 사실상 퇴출 수순을 밟고 있는 액상형 전자담배가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가 최근 액상형 전자담배 관련 폐 손상의 원인으로 비타민E 아세테이트를 지목하면서다. 비타민E 아세테이트는 대마 추출 성분인 테트라하이드로카나비놀(THC)을 기화하는 데 쓰이지만, 국내에선 불법 성분으로 분류돼 반입이 되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에 따라 전자담배 업계에선 “정부가 전자담배 유해성 검사도 없이 거짓 정보를 흘리면서 국내 전자담배 사용을 막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비타민E 혼합물은 불법, 정부 조치 과했나


미국 CDC는 지난 11월 8일 보고서에서 액상형 전자담배 관련 폐 손상 환자로부터 무작위 추출한 손상 부위 정밀 검사 결과 환자 모두에서 비타민E 아세테이트를 발견했다고 밝혔다. CDC는 “비타민E 아세테이트는 끈적이는 점액성 형태의 물질로 폐에 달라붙는 특징이 있다”면서 “비타민E 아세테이트를 흡입하면 정상적인 폐기능을 방해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아울러 비타민E 아세테이트는 THC를 흡입하기 위해 전자담배 액상을 임의로 변형하거나 개조한 액상에서 발견됐다고 전했다. 임의 변형을 가하지 않은 액상형 전자담배는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CDC의 발표는 정부의 사용 중단 권고에 맞서온 전자담배 업계의 주장과 일치한다. 전자담배 업계는 그동안 “THC와 비타민E 아세테이트는 ‘마약류 관리에 관한 법률’에 따라 국내 반입이 불가능한 성분”이라며 “국내에 시판되는 전자담배는 안전하다”는 주장을 계속해왔다. 2015년부터 액상형 전자담배 시장이 형성됐지만, 최근 들어 전자담배에 의한 폐 손상 사례가 불거진 것도 말이 안 된다는 게 업계 주장이었다. 실제 액상형 전자담배 시장은 2014년 66t(액상 수입 물량 기준) 규모에서 2015년 86t으로 1년 만에 30% 넘게 증가했고, 지난해 324t으로 커졌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즉시 사용 중단 권고를 내렸던 정부는 한걸음 물러섰다. 보건복지부는 지난 11월 11일 편의점 등 담배판매점에 액상형 전자담배 판매 관련 협조 요청 내용을 담은 공문을 내린 것으로 확인됐다. 공문에는 “미국에서 액상형 전자담배 사용 후 폐 손상을 호소한 사례의 대부분이 제품을 비공식적인 경로로 구하거나, 제품을 개조해 액상을 임의로 섞어서 쓴 경우”라며 “제품을 변형하거나 개조하거나 액상을 임의로 혼합해서 쓰지 말라”는 안내 요청이 담겼다. 전자담배 업계 관계자는 “임의 혼합이 아닌 경우 사용해도 된다는 뜻”이라고 말했다.

한국보다 먼저 액상형 전자담배 규제에 나섰던 미국도 대응 수준을 낮춘 것으로 드러났다. 미국 정부는 청소년 건강에 심각한 위험요인으로 부상한 가향(flavored) 전자담배를 금지하겠다고 공언했지만, 가향 전자담배 규제에 관해 더 검토가 필요하다는 태도를 보이며 실질적 행동에 나서지 않고 있다. 앞서 향을 첨가한 전자담배를 아예 금지하겠다고 큰소리친 것과는 딴판이다. 지난 11월 11일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 계정을 통해 “전자담배 딜레마를 놓고 수용 가능한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 의료 전문가, 각주 당국자, 전자담배 업계와 만날 것”이라고만 알렸다.

정부가 객관적 근거 없이 가향 전자담배를 규제하는 등 소비자 선택권을 침해하면서 상황이 계속 악화했다는 지적도 나온다. 클리프 더글라스 미국 암학회 흡연관리센터 이사는 11월 14일(현지시간) 영국 왕립학회에서 열린 ‘2019 전자담배 서밋’에서 “미국 및 각국 정부가 액상형 전자담배 관리에 대해 사실상 손을 놨다”며 “일방적으로 규제를 강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그는 이어 “애매모호한 규정과 일방적인 규제 때문에 오히려 논란이 커지고 있다”면서 “무조건적인 사용 중단 권고가 아니라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학계에서는 일반담배와 전자담배의 성분 분석과 함께 어떤 선택이 덜 유해한지에 대한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일반담배를 피우던 사람들이 액상형 전자담배로 전환하면 1개월 내에 혈관 기능이 개선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왔다. 제이콥 조지 영국 던디대학교 교수 연구진은 전자담배로 전환하면 혈관 건강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심장마비와 뇌졸중 위험을 줄일 수 있다는 연구결과를 미국심장학회지 최신호에 발표했다. 조지 교수는 “한달 이내에 혈관 기능이 크게 좋아진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했다. 2017년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는 역시 “궐련형 담배보다 액상형 전자담배의 유해성분이 적다”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이에 전자담배 업계가 적극적인 국면 전환에 나서고 있다. 정부가 액상형 전자담배 유해성 문제를 제기하자 대형마트와 면세점까지 줄줄이 판매 중단에 동참했지만, 보건복지부 공문이 발부되는 등 재판매 가능성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국내 전자담배 기업인 하카코리아는 액상형 전자담배인 ‘하카시그니처’의 기체 성분 검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하카코리아 관계자는 “전자담배는 담배 기화 때 발생할 수 있는 발암물질이 궐련형보다 적다”면서 “THC 성분과 폐 손상 원인으로 밝혀진 비타민E 아세테이트 성분은 절대 포함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국내 전자담배 업계는 업계의 의견을 대변하는 연합단체도 출범시켰다. 기존의 한국전자담배협회와 한국전자담배산업 협회가 의견을 모아 한국전자담배총연합회를 구성했다. 최근 정부가 전자담배의 유해성을 주장해 산업이 어려움에 빠지자, 이에 공동 대응하기 위한 조치다. 현재 액상형 전자담배는 정부의 사용 중단 권고로 유통에 이어 생산까지 막힌 상태다. 한국전자담배협회 관계자는 “사용 중단 조치는 대국민 발표를 통해 진행해 놓고 소비자 주의를 당부하는 공문은 판매처와 제조사에 보냈다”면서 “정부 조치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정부 “식약처 유해성 검사 결과 지켜볼 것”

그러나 정부는 지난 10월 23일 발표한 사용 중단 권고를 유지한다는 방침이다. 지난 9월 CDC의 ‘액상형 전자담배 폐 손상 역학조사’에서 폐 손상 환자의 10% 정도는 니코틴만 들어간 제품을 사용했다는 내용이 명시돼 있기 때문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가습기 살균제 사태에서 얻은 교훈은 유해성 입증 이후의 대처는 늦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라면서 “마리화나 성분이 없는 일반 액상형 전자담배에서도 환자가 나와 선제적으로 중단을 권고했다”고 전했다. 또 보건복지부 관계자는 “CDC가 비타민E 아세테이트를 폐 손상 원인으로 지목한 것은 맞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다”라면서 “식약처 결과에 따라 후속 조치를 결정할 것”이라고 밝혔다.

- 배동주 기자 bae.dongju@joongang.co.kr

1511호 (2019.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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