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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공방에 휩싸인 고래 고기 

 

포경선 피코트(Pea coat)호의 선장 에이허브(Ahab, 그레고리 펙)는 모비 딕(Moby Dick)이라는 흰 고래의 공격을 받아 한쪽 다리를 잃고 반미치광이가 된다. 그는 복수의 일념으로 인도양을 누비다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백경(白鯨)’을 기어코 찾아낸다. 거대한 고래가 나타나자 쩔쩔매는 선원들을 밀쳐내고 손수 작살을 던진다. 그러나 작살에 딸린 줄이 그의 의족에 얽혀 고래의 등에 몸이 말려든다.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물속 깊이 잠수했다가 물 위로 솟구치며 배를 박살 내고, 다시 잠수했다가 물 위로 떠오르기를 반복한다. 거의 익사상태가 된 에이허브 선장은 미친 듯이 날뛰며 외쳐댄다. “내가 고래를 잡았다. 내가 백경을 잡은 거야.”

곧이어 백경은 배를 들이받아 침몰시키고 고래 자신도 상처를 입은 채 유유히 사라졌다. 에이허브 선장도 몇 차례 물 위로 솟구치다가 영영 자취를 감추고 만다. 한 인간과 거대한 백경의 투쟁을 웅장하게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할리우드 영화(1956년)는 허먼 멜빌(Herman Melville)의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었다. 멜빌은 포경선에서 일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백경]을 썼다. 백경은 19세기 미국 문학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처음 출간한 1851년 당시엔 주목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사후에 널리 알려지면서, 영국의 한 도서관에서는 해양소설이 아닌 ‘고래학(Whale science)’으로 분류될 정도로 관심이 컸다. 지구 역사상 가장 몸집이 크고, 포유류인 데다 폐로 숨을 쉰다는 점에서 인간과 닮은 고래는 지능도 높아 보호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1986년부터 우리나라는 고래사냥을 금지했다. 지금은 고래고기를 맛보기 어렵지만, 필자가 기자 초년병이었던 1970년대 초만 해도 서울 무교동에 널린 게 고래 고깃집이었다. 고래 고기 마니아인 선배들을 따라 얼떨결에 들어갔다가 고기가 입맛에 맞지 않아 김치 깍두기로 소주를 들이켰던 추억뿐인데, 손님은 늘 붐볐던 것 같다.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이 있다. 고래처럼 힘센 사람들끼리 싸우는 바람에 상관없는 사람이 피해를 볼 때 쓰는 말. 무심결에 한 내 행동으로 다른 사람이 곤란을 겪을 수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는 의미도 있다. 반대로 ‘새우 싸움에 고래 등 터진다’라고도 한다. 역시 관계없는 다른 사람이 피해를 본다는 의미는 같다.

그런데 고래 고기가 정치 쟁점화할 줄이야.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질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른바 ‘울산 고래고기 사건’이 새삼 핫 뉴스로 떠올랐으니 말이다. 2016년 경찰이 고래 축제를 앞두고 불법 고래 고기 유통업자를 적발해 검찰에 송치했는데, 검찰이 포경업자에게 고래 고기 상당 부분을 되돌려줬다는 것이 문제의 발단이다. 전·현직 검사가 두루 얽히면서 고래 고기 업자가 검사 출신 변호사에게 거액을 건넸다느니 하는 의혹에 휩싸이다가 급기야 검·경 수사권 갈등으로 번졌다. 이 사건은 공교롭게도 지방선거를 몇개월 앞둔 시점이어서, 조정에 나선 청와대가 울산시장 후보자를 당선시키기 위한 ‘정치 개입’한 게 아니냐 하는 야당 측 공세에 휘말려 있다. 청와대가 울산 지역에 관해 관심을 기울인 이유가 ‘고래 고기 사건’ 때문이 아니라는 것이 야당 측 주장이다. 정부와 여당은 터무니없는 정치공세라고 맞받아쳤다. 서로 증언이 엇갈려 사건의 실체는 수사에 따라 드러날 것이나, 파장은 만만치 않아 보인다.

뜻하지 않게 불거져 나온 고래 고기는 우리나라에서도 길고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영국 BBC 방송은 선사시대 바위 그림인 국보 제285호 울산 반구대 암각화(Bangudae Petroglyphs) 등을 근거로 “한반도가 세계 최초로 고래잡이를 한 곳일 것”이라고 방송한 적이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긴수염고래·범고래·돌고래 등 다양한 종류의 고래 그림과 함께 창과 그물 등으로 고래를 잡아 해체하는 모습까지 고래 관련 그림이 10여 개의 바위에 새겨져 있다.

우리나라는 1986년부터 33년째 모든 종류의 고래에 대한 포획을 금지했다. ‘고래의 지속 가능한 이용’을 목적으로 한 국제포경위원회(IWC, International Whaling Committee)가 멸종 위기에 놓인 고래 12종에 대해 상업포경을 유예하자 아예 모든 고래잡이를 막은 것이다. 그러나 지금도 울산·포항·부산 등 일대에선 고래 고기가 유통되고 있다. 오래 전부터 고래 고기를 먹어온 식(食)문화가 유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유통되는 고기는 다른 고기를 잡는 그물에 함께 잡힌, 이른바 ‘혼획(混獲)’된 고래에서 나온다. 하지만 불법 포경도 적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울산 장생포에는 1889년 처음으로 고래 해체장이 설치돼 100년 가까이 근대적 포경 활동이 이뤄지기도 했다. 농식품부 관계자는 “포경 금지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이웃 일본보다 더 큰 포경선을 갖추고 활발히 고래잡이를 벌였다”며 “그러나 지금은 단 한척의 포경선도 남아있지 않은 상황”이라고 밝혔다.

그러던 정부가 고래잡이 허용을 IWC에 요청한 것은 주변국의 여건 변화에도 기인한다. 오랜 식문화를 버릴 수 없는 울산 등 동 남해 일대 주민들의 줄기찬 요구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일본이 포경 허용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부터다. 일본은 상업포경이 막히자 그동안 과학적 조사를 위한 고래잡이인 이른바 ‘과학 포경(Scientific whaling)’으로 고래 고기를 공급해왔다. 연간 1000여 마리를 연구 목적으로 잡은 후 슬그머니 고래 고기를 유통한 것이다. 일본 정부는 이미 2018년 12월 판매용 고래잡이를 허용하는 이른바 상업 포경 재개를 위해 국제포경위원회(IWC)를 탈퇴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실제로 지난해 7월부터 고래잡이가 재개됐다. 일본은 1988년부터 상업 포경을 중단한 바 있다. 이후 고래 자원을 조사하기 위한 조사 포경만 진행해왔다.

일본 정부가 식용 고래를 포획할 목적으로 IWC에서 탈퇴하기로 결정하면서 국제사회의 비판은 거세졌다. 일본은 그간 IWC에 상업포경을 허용해 달라고 줄기차게 요청해왔다. 일본의 고래 소비량은 1960년대에 연간 23만t 이상이었다. 그러나 일본 언론은 상업포경을 재개한 데 대해 반(反) 포경 단체 등에서는 비판의 소리가 잇따르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울산 장생포 고래박물관에는 오늘도 관광객이 줄을 잇고 있다. 박물관 근처 일부 음식점에서는 고래 고기를 팔고 있다는 광고전단이 눈에 띈다. 고래포획은 금지돼 있지만, 어쩌다 그물에 걸린 고래를 공식적인 허가절차에 따라 파는 고기라니 마니아들은 군침이 돌 만하다.

- 정영수 칼럼니스트(전 중앙일보 편집부국장)

1515호 (201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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