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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8 to 5’ 근무제] 직원은 저녁이 있는 삶, 회사는 생산성 극대화 

 

포스코 등 대기업과 금융권 잇따라 도입… “근로문화 더 개선 필요” 지적도

▎사진:© gettyimagesbank
국내에서 ‘8 to 5’ 근무제가 확산되고 있다. 오전 8시에 출근해서 오후 5시에 퇴근하는 제도다. 아직 ‘9 to 6’, 즉 오전 9시에 출근해 오후 6시 퇴근하는 근무제가 일반적이지만 새 근무제 유행으로 기존 근로문화에 변화의 물결이 소용돌이칠지 주목된다. 12월 12일 재계에 따르면 국내 최대 철강 기업 포스코그룹은 11월 16일부터 교대 근무자를 제외한 모든 상주 직원의 출퇴근 시간을 1시간씩 앞당기는 8 to 5 근무제를 시행했다. 제도 적용 후 첫 평일 출근일인 11월 18일부터 많은 직원이 오전 8시에 맞춰서 우르르 출근했다가 오후 5시가 되기가 무섭게 하나둘씩 퇴근길에 오르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약 한달이 지난 지금은 새로운 근무제에 적응한 직원들이 ‘저녁이 있는 삶’에 조금씩 적응하면서 업무 집중도도 높이고 있다.

포스코, 11월 16일부터 시행

포스코 한 계열사 경영지원 부서에서 일하는 A씨는 “오후 6시에 퇴근하던 땐 부서 분위기상으로도 그렇고 집에 가기까지 시간적 여유도 없어 친한 직원끼리 간단히 저녁식사를 하고 퇴근하거나, 끝나고 2차 회식까지 가는 경우가 많아 다음날까지 피곤한 상황이 이어졌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새 근무제 정착 후 자연스레 곧바로 집으로 향하게 되면서 틈틈이 자기계발까지 시도할 수 있게 됐다는 설명이다. A씨는 “지금은 오후 5시 퇴근 후 바로 집으로 가서 가족들과 함께 저녁식사를 할 수 있게 됐고, 집 근처 학원에서 1시간씩 수강하면서 평소 관심 있던 일본어 공부를 하고 있다”고 전했다. 다른 직원 B씨도 “제도가 바뀐 직후 헬스장에 등록해 아직까지는 잘 다니고 있다”며 “예전보다 체력적으로 나아지고 있는지 일할 때도 능률이 오른 느낌이 든다”고 말했다.

이런 새 근무제는 포스코뿐 아니라 최근 들어 산업계와 금융권 전반에서 속속 도입되고 있다. NH투자증권은 올 4월부터 오전 8시~오후 5시 근무를 기본으로 하는 PC 오프제를 도입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지면 직원들이 쓰던 PC 화면에 ‘업무를 마무리할 시간이 됐다’는 내용의 공지문이 올라온다. 현대중공업그룹도 현대중공업 등 3개 계열사의 공식 업무 시간이 오전 8시~오후 5시다. 오후 5시부터 10분 단위로 업무 시간 종료를 알리는 메시지가 직원 PC에 뜬다. 홈플러스 역시 오전 8시~오후 5시 기본 근무의 자율근무제를 시행 중이다. 대부분의 직원이 8 to 5로 일하되 원하는 경우 부서장과 상의해 조금씩 조율할 수도 있다. 예컨대 이보다 빠른 오전 7시에 출근해서 오후 4시에 퇴근하는 것도 가능하다.

정확한 ‘8 to 5’가 아니더라도 비슷한 근무제를 도입한 곳은 많다. 효성그룹은 오전 8시 30분~오후 5시 30분 근무제를 하고 있다. 오후 5시 30분이 되면 퇴근 안내 방송이 나오면서 직원들이 하나둘씩 빠져나간다. 한화그룹도 계열사 한화케미칼이 오후 5시 30분이면 자동으로 회사 PC가 꺼져서 따로 연장근무를 신청하지 않은 경우 퇴근해야 하는 제도를 최근 도입했다. 이들 기업·은행이 잇따라 8 to 5나 그에 준하는 근무제를 도입하고 있는 것은 최근 직장인들이 이른바 ‘워라밸(work-life balance, 즉 일과 생활의 균형을 뜻하는 신조어)’을 그만큼 중시해서다. 그리고 이들이 속한 직장들은 과거만큼 절대적으로 많은 근무량을 강조하는 대신, 정해진 근로시간 내에서의 생산성과 효율을 좀 더 중시하게 됐다.

도시에서 출퇴근 시간이 30분에서 1시간씩만 앞당겨져도 직장인들은 교통이 가장 혼잡해지는 시간대를 어느 정도 피할 수 있어 삶의 질이 대폭 개선되고, 그로써 정해진 근로시간 내의 능률 또한 오른다는 것이 8 to 5 예찬론자들의 이야기다. 실제 하나금융경영연구소가 지난 8월 펴낸 한 보고서에 따르면 서울시내 직장인 중 오후 6시 퇴근 비율은 42.8%나 됐다. 반면 오후 5시 퇴근 비율은 20.0%라 이때 퇴근하면 6시에 퇴근할 때보다 상대적으로 나은 교통 상황을 맞을 개연성이 커진다.

국내에서 주당 법정 근로시간을 기존 68시간에서 줄인 주 52시간 근무제가 정착되고 있는 것도 8 to 5 확산 트렌드에 적잖은 영향을 미쳤다. 재계 한 관계자는 “과거엔 회사에서 이른 퇴근을 강조해도 자의로든 타의로든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는데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화하면서 누구나 일찍 퇴근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 됐다”며 “이왕이면 8 to 5 도입으로 ‘효과의 극대화’를 노려보자는 분위기가 확산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홈플러스 직원 C씨는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전에도 사내에 근로시간이 탄력적인 근무제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실제론 눈치가 보여 활용하는 직원이 많진 않았다”면서 “주 52시간 근무제 도입 이후로는 오후 5시 퇴근 등을 당연시하는 분위기가 형성돼 부담 없이 근무할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앞서 지난해 7월 근로자 300인 이상 사업장과 공공기관을 대상으로 주 52시간 근무제가 본격 도입된 바 있다. 문화체육관광부의 올 4월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의 63% 이상이 이런 근로시간 단축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한국은 2016년 기준 근로자 1인당 연간 근로시간이 평균 2069시간으로 OECD 34개 회원국 중 2위였다(1위는 멕시코로 2255시간). 장시간 근로가 높은 생산성으로 직결되진 않았다. 독일 근로자는 연간 1363시간으로 한국보다 706시간(51.8%)이나 덜 일했지만 생산성이 더 높은 것으로 집계됐다. 2017년 기준 독일 근로자의 시간당 생산성은 59.9달러로, 한국(34.3달러)의 1.75배였다고 OECD는 집계했다. 이 같은 배경에 지난해 주 52시간 근무제가 법적으로 도입된 데 이어, 민간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8 to 5 근무제까지 확산되면서 사회 전반적으로 생산성 제고와 경직된 근로문화 개선에 나서고 있는 것이다.

다만 갈 길은 아직 멀다는 분석이다. 우선 대다수 중소기업들에 8 to 5는 ‘그림의 떡’이다. 8 to 5는커녕 9 to 6라도 지켜지면 다행이다. 고용노동부는 12월 11일 브리핑에서 내년 1월부터 주 52시간 근무제 적용 대상인 50~299인 사업장에 대한 계도기간 1년을 부여한다고 밝혔다. 새 근무제 시행을 위한 준비 기간을 1년 더 준다는 의미다. 물론 주 52시간 근무제 자체가 내년 1월부터 50~299인 사업장에 적용되는 것엔 변함이 없지만, 해당되는 사업장 근로자의 대부분은 사실상 1년 더 기다리고 2021년에나 새 근무제를 적용받을 공산이 크다. 해당 사업장들은 한숨 돌렸다는 입장이지만 노동계는 실망감을 나타내고 있다. 2021년이면 문재인 정부 임기 말이 돼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을 힘 있게 추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또 그사이 대기업과 중소기업 근로자 간 ‘근무조건 양극화’ 심화가 우려된다는 것이 노동계의 지적이다.

중소기업에는 아직 ‘그림의 떡’

일각에선 8 to 5 근무제 자체의 실효성에 대해서도 의문을 나타낸다. 8 to 5 근무제로 일하고 있는 직장인 D씨는 “알려진 바와 달리 근로환경이 나아졌는지 썩 체감이 되지 않고 오히려 불편해진 느낌도 있다”고 전했다. 기획 부서에서 일하는 그는 “다음날 오전 8시까지 출근하려면 늦어도 밤 10~11시에는 잠자리에 들어야 해서 이전보다 여유가 줄었다”며 “어차피 업무량은 똑같은데 조삼모사(朝三暮四) 식으로 경영진이 생색내는 걸로만 보인다”고 지적했다. 직장인 E씨도 비슷한 의견을 보였다. E씨는 “출근은 빨라졌는데 퇴근 후 수많은 회식 자리는 없어지지 않고 남아 있어 부서원들이 (오후) 5시 반에 퇴근해 근처에서 시간 때우다가 저녁 회식 장소에 나타나는 촌극이 발생하고 있다”라며 “업무 외 시간에 친목 도모를 강요하는 기존 왜곡된 근로문화가 바로잡히지 않는 한은 몇 시에 퇴근한들 매한가지”라고 토로했다. 노민선 중소기업연구원 연구위원은 “근로자 간 자율적인 근로문화 개선 노력에 더해, 사업주가 근로자의 생산성 향상을 위한 노력에 대해서 성과를 공유하려는 노력 등을 강화하는 식으로 분위기를 이끌어가야 한다”고 분석했다.

-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1515호 (2019.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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