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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라는 말을 봉인하고 꿈과 미래를 말해야 할 때가 아닌가 

 

1984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하계 올림픽이 열렸다. 개막식에서 로켓 벨트를 장착한 남성이 공중을 유영하자 세계는 깜짝 놀랐다. “큰일이 났다. 최대의 위기다.” 개막식을 지켜본 도요타자동차 임원은 개발 담당자와 주요 부품업체 대표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간이 하늘에서 이동하게 되면 자동차 따위는 필요 없어질 거야!”

물론 이 임원도 올림픽 개막식에서 선보인 이 기술이 머지않은 시일 내에 상용화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간이 공중을 유영하는 모습을 보고도 이 기술에 주목하거나 상세한 내용을 알아보려는 간부가 없다는 사실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당시 도요타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판매량이 꾸준히 늘어나던 시기였다. 일본에서 ‘버블’이라고 불린, 이전에 없었던 호황이 시작되던 때이기도 했다. “회사가 잘 될 때야말로 함정이 기다리고 있다. 초절정에 달했던 기업이 어느 날 갑자기 몰락하는 사례는 얼마든지 있다.” 이 임원은 호황일수록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위기’를 강조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일본의 버블경제 붕괴가 시작됐다. 정치지도자는 물론 국민도 경제 침체가 20년이나 계속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못 했다. 일시적 조정인 줄 알았던 경기 침체가 ‘잃어버린 10년’이 됐고, 어느새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장기 문제가 되고 말았다. 이때 쯤부터 일본에서 위기를 강조하는 경영자가 많이 등장했다.

“전후 최대 위기다.”, “미증유의 위기다.”, “이대로라면 살아남을 수 없다.” 표현은 달랐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위기를 반복한 경영자가 적지 않았다. 문제는 많은 경우, 위기를 강조하면 할수록 위기가 깊어지는 악순환에 빠지고 말았다.

실적이 나빠진 상태에서 위기를 강조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경영자는 당장 성과를 높이기 위해 자산·사업을 매각하거나 인원 감축에 나선다. 이로 실적이 반등하면 좋겠지만, 기대에 미치지 못하하면 다운사이징(downsizing)을 반복한다. 위기가 만성화되는 것이다. 이렇게 많은 일본 기업은 비탈길을 데굴데굴 굴렀다. 장기 침체에 빠져 버렸다.

이와는 다른 시각으로 회사를 운영한 경영자도 있다. 손 마사요시(孫正義) 소프트뱅크 사장은 1990년대 “지금 일본은 전후 잿더미에서 아무 것도 없어진 상황을 연상시킨다. 지금이야말로 좋은 기회”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기존의 질서가 무너지고 게임의 룰이 바뀌는 순간을 소프트뱅크는 큰 기회라고 본 것이다. 소프트뱅크는 PC에 인터넷 시대가 도래한 시기에 성장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일본의 전통적 대기업이 부채 감축과 구조조정으로 고통에 시달릴 때 이동통신서비스, 금융, 전자상거래, 로봇, 인공지능(AI) 등 폭넓은 분야로 진출했다.

1990년대 도요타 역시 언제나처럼 앞을 향해 나아갔다. “글로벌 시장에는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 1984년 하계 올림픽 개막식을 보고 위기를 강조했던 임원은 1990년대 초 도요타의 최고경영자(CEO)로 취임했다. 직후 해외 생산을 단숨에 확대했다. 신임 CEO는 도요타의 자동차 개발 부서에 다음과 같은 지시를 내렸다. ‘달리면 달릴수록 공기가 깨끗해지는 자동차’, ‘미국의 서해안에서 동해안까지 단 한 번의 급유로 달릴 수 있는 자동차’, ‘사고를 내지 않는 자동차’.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의 일이다. 도요타가 세계적으로 히트한 하이브리드 자동차 ‘프리우스’를 출시한 것도 이 시기다.

도요타의 새 CEO는 실적이 좋은 때는 위기를 강조하며 임직원을 다잡았다. 이후 버블 경제가 붕괴하자 이번에는 ‘꿈’이라는 정반대 메시지를 냈다. 회사 전체에 불안감이 퍼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물론 허상이 아닌, 반드시 실현하겠다는 비전이다.

20년 전 도요타 CEO가 내린 지시를 지금 돌이켜보면 흥미롭다. 수소연료 자동차 등 친환경 자동차, 자율주행 자동차 등 최고의 안전 대응 자동차. 20년 전 모두 꿈이라고 생각했던 자동차는 지금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이렇듯 잃어버린 20년 동안 산업 부문에 재편과 구조조정의 쓰나미가 덮쳤다. 오래된 명문 대기업과 금융기업 대부분이 사라졌다. 한편으로는 이 고난의 시기를 극복하고 더욱 경쟁력을 높인 기업도 적지 않다. 또한 완전히 새로운 기업도 많이 등장했다.

위기만 강조한 리더 vs 희망의 끈 이어간 리더

그렇다면 위기에서 사라진 기업과 위기를 통해 더욱 강해진 기업의 차이는 어디에서 발생했을까. 위기만을 강조한 리더와 희망의 끈을 이어간 리더. CEO의 리더십과 생각의 차이가 이런 결과로 이어진 것은 아닐까.

에어컨 시장에서 크게 약진한 다이킨공업, 필름 카메라가 없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성장을 계속한 후지필름, 탄소섬유 및 의류용 신소재로 성공한 도레이, 정부의 힘을 빌리지 않고도 도쿄~나고야의 리니어 신칸센을 건설하기로 결정한 JR동일본…. 이들 기업의 CEO는 위기보다는 가능성과 기회에 눈을 돌렸다. 그리고 어려운 때일수록 꿈을 강조했다.

2020년 들어 한국의 경영자들로부터 위기 등 비관적 목소리가 많이 들린다. 유감스러운 일이다. 신문 등 매스미디어에도 위기라는 단어만이 눈에 띈다. 왜 그렇게 비관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일까.

올해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개최된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한국인이 1만명이나 방문했다고 한다. “많은 사람이 가는 것은 낭비며 의미가 없다”는 말도 많이 나온다. 그러나 필자는 이 소식을 접하고 감탄했다. 세계 최첨단 산업의 동향을 직접 보자는 의욕이 넘친다. ‘가봐야 의미 없다’는 비판보다는 훨씬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이런 열정과 활력이 있는 한 반드시 새로운 비즈니스가 생겨날 것이다.

한국의 대기업 중에 고전 중이거나, 성장 전략이 보이지 않는 곳들이 많다. 규제 때문에 새로운 비즈니스가 생기기 어려운 측면도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굳건하게 새로운 시장을 개척하고 있는 기업도 적지 않다. 한국 중소벤처기업부에 따르면 2019년 12월 기준 한국에는 11개의 유니콘 기업이 있다. 미국과 중국의 유니콘 기업 수에는 한참 뒤떨어졌지만, 영국·인도에 이어 세계 5위다. 독일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경제 환경이 어렵다는 것은 모두 알고 있다. 하지만 모두가 어렵다고 말할 때 기회도 잠들어 있다. 최근 92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이 4관왕의 위업을 달성했다. 전향적 마음가짐을 가지면 새로운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한국 경제는 지금이야말로 위기라는 말을 봉인하고 꿈과 미래를 말해야 할 때가 아닌가.

- 타마키 타다시 법무법인 광장 고문(전 니혼게이자이신문 서울지국장)

1523호 (2020.0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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