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재난기본소득의 불가피성과 시급성 

 

우리 사회가 코로나19의 공포에서 조금은 벗어났다는 느낌이다. 그 공포란 단순히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은 아니었다. 나를 죽음에 이르게 할 수도 있는 저 ‘코로나19’라는 바이러스가 도무지 정체불명이라는 데서 공포감은 유래한다.

죽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마스크, 손 씻기, 그 무엇도 확실한 답이 되진 못했다. 대구에서 확진자가 하루에 수백 명씩 늘어나면서 공포는 극에 달했다. 사람들은 외출을 삼갔고, 학교는 문을 닫았다. 밤마다 휘황한 불빛을 내뿜던 거리가 일순 텅 비었다. 이 고요가 공포감을 배가했다.

짙은 안개 속에서 두려워하던 우리에게 희미하나마 한 줄기 빛이 보였다. 아쉽게도 그것이 백신은 아니었다.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다소 생소한 표현이었다. 코로나19가 전 지구적 유행병으로 발전하면서 함께 퍼지고 있는 이 표현은, 묘한 마법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것 같다. 길거리에서 타인과의 신체 접촉을 가급적 피하는 것, 기침할 때 입을 막고 마스크를 쓰는 것, 필요한 게 아니면 외출을 삼가는 것, 가급적 집에서 식사하는 것. 이 모든 것이 사회적 거리두기다. 왜 그것이 필요한가.

서로 간의 거리를 둔다고 감염병 확산이 멈추는 것은 아니다. 단지 그 속도가 느려질 뿐이다. 하지만 속도를 늦추는 것, 바로 그것이 사회적 거리두기의 핵심이다. 비록 결과적으로는 같은 수의 사람이 코로나19에 감염되더라도 그 속도를 늦출 수만 있다면 우리가 가진 의료체계가 감염된 이들을 충분히 돌볼 수 있을 것이다. 확진자의 완치율도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백신 개발에 필요한 시간도 벌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발휘하는 마법이란 이런 것이다. 이 새로운 인식 덕택에, 타인과의 접촉을 삼가고 학교와 교회와 가게의 문을 닫는 것이 감염병 확산의 속도를 늦추기 위한 우리 자신의 주체적이고 전략적인 선택이 되었다. 그것은 더는 막연한 공포심에 의해 강제된 행위가 아니다. 우리 자신의 행위에 주체적으로 의미를 부여했으니, 이제 우리는 일정 한도 안에서 상황을 통제할 수도 있다. 새로운 취미를 개발하는 등 집에서 혼자 보내는 시간을 즐기는 방법을 고안하기도 하고, 재택근무의 장단점을 면밀히 따지면서 새로운 환경에 맞춰 삶을 재조직한다. 아는 것이 힘이고, 사회적 거리두기는 당분간 계속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 거리두기엔 이중적인 성격이 있다. 이동과 접촉을 통해 수입을 거두는 많은 이들의 삶을 위태롭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가장 취약한 집단을 이룬다고 해도 큰 무리가 없다. 카페, 서점, 식당, 학원, 운동센터 등 동네의 활기를 먹고 사는 작은 점포의 업주들과 거기 고용된 저임금 노동자들, 화려하게 빛나지는 않지만 학교가 원활히 돌아가는 데 없어선 안 될 다양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그들이다. 때때로 마을도서관이나 주민센터에 찾아와 우리의 메마른 삶을 촉촉이 적셔주는 인문·예술 강사들도 일이 끊겨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감염병으로 죽을 확률은 낮추지만, 경제적으로 죽을 확률은 높이는 게 아니냐는 생각마저 들 정도다.

재난기본소득은 ‘사회적 거리두기’ 성공 위한 물적토대

이러한 딜레마를 해결하고 사회적 거리두기의 맹점을 훌륭하게 보완할 수단이 있다. ‘재난기본소득’이다. 그것이 처음 제안되었을 때는 그야말로 ‘잠꼬대’로 취급되기도 했지만, 이후 김경수 경상남도지사,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 거물급 정치인들이 잇따라 주장하면서 재난기본소득은 우리 사회에서 들불처럼 번지며 빠른 속도로 지지세를 확장하고 있다.

나라 바깥에서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과 조지프 스티글리츠, 그리고 현재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경제학 교과서의 저자이자 보통 ‘우파’로 분류되는 그레고리 맨큐 하버드대 교수까지도 우리의 재난기본소득에 해당하는 안을 지지하고 나섰다.

재난기본소득의 기본 아이디어는 지금과 같은 전국적 재난상황에서 국가가 전 국민에게 일정액의 구호금을 일시에 지급하는 것이다. 위의 두 도지사는 100만원을 제시한 바 있지만, 액수는 얼마든 조정될 수 있다. ‘기본소득’이라는 이름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반대로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만, 엄밀히는 기본소득이 아니다.

기본소득은 모두에게 정기적으로 지급되는 정액 소득을 의미하지만, 재난기본소득은 일회성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름은 껍데기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코로나19의 확산을 제어하고 그 치사율을 낮추는 데 필요한 사회적 거리두기가 의도치 않게 많은 이들의 ‘경제적 치사율’을 높일 위험이 있다는 점, 그리고 재난기본소득이 그걸 낮춰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감염병의 확산을 늦추듯, 재난기본소득은 일부 사람들에게 몰아치고 있는 경제적 위기를 평탄화해준다. 재난기본소득은 사회적 거리두기가 성공하기 위한 물적 토대다.

재난기본소득의 핵심은 그 보편성에 있다. 모두에게 줘야 한다. 선별이 낫지 않나. 일반적으로는 그럴 수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 재난 상황에서 선별이란 필시 피해의 여부와 정도를 기준으로 할 것인데, 그런 선별은 현재 불가능에 가깝다. 가능하다 해도, 거기엔 인력과 비용이 많이 들고 시간도 오래 걸린다. ‘골든타임’을 놓치면 안 하니만 못하다.

그렇다고 재난기본소득이 선별성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세 가지 의미에서 그렇다. 첫째, 즉각적으로 실행 가능한 선별까지 배제하진 않는다. 예컨대 아동수당 수혜자인 7세 미만의 시민은 뺄 수도 있다. 이미 이들에겐 40만원을 추가지급하기로 결정됐다. 둘째, 김경수 지사의 안대로 지금 보편지급된 것을 나중에 소득세체계를 통해 일부 거둬들인다면 사실상 소득수준에 따른 차등지급이 된 셈이다. 셋째, 재난기본 소득은 단기적으로 위기의 폭발을 늦춤으로써 중장기적으로는 선별적인 지원책이 실효성 있게 펼쳐질 시간과 여건을 마련해준다. 이것도 재난기본소득과 사회적 거리두기의 중요한 유사성이다. 둘 다 시간을 벌음으로써 한정된 경제적‧의료적 자원을 고도로 선별적이고 집중적이며 효율적으로 쓸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데 봉사한다.

지금 코로나19에 대한 한국의 역학적 대응이 세계적으로 큰 호평을 받고 있다. 이러한 선도적 모범을 사회경제적 차원에까지 이어나가야 한다. 모두에게 보편적으로 지급하는 재난기본소득이 그 초석이다. 바로 여기에 그간의 모범적인 역학적 대응의 궁극적인 성공 여부도 달렸다. 시간이 없다.

- 김공회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1527호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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