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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광원의 인간과 조직 사이(32) ‘잔소리 대왕’ 리더의 심리] ‘당황’ 하셨나요? ‘위축’ 되셨나요? 

 

현재의 불안 원인 파악해야 ‘재능 있는 사람의 실패 대열’ 빠져나와

▎사진:© gettyimagesbank
3월이 지나고 4월이 시작되면 세상은 봄으로 가득하다. 하지만 이 봄날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 이들이 있다. 3월 말이나 4월 초에 진행하는 1분기 결산 평가회의에서 저조한 성과를 확인한 부서장들이다.(사장들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늘진 마음에서 나오는 긴 한숨이 시작된다. 1년씩 연장되는 ‘시한부 인생’이 겪어야 할 고개 넘기가 시작부터 험난해진다.

한숨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은 성과 수치 때문만이 아니다. 뭐라도 좀 해야 할 것 같아, “이런 걸 좀 해보면 어떨까?” 하고 직원들에게 말을 던지면 약속이나 한 듯 도리질부터 친다. 이건 이래서 안 된다고 하고, 저건 저래서 힘들다고 한다. “그러면 도대체 되는 게 뭐냐?”고 되물으면 이번에는 다들 묵묵부답, 눈만 꿈뻑하거나 고개를 숙인다. 숨이 막히고 답답해진다. 내심 믿고 있는 프로젝트가 몇 개 추진되고 있기는 하지만 세상일이라는 게 끝나야 끝나는 게 아닌가. 그래서 뭘 좀 더 해보자고 하는데 언제나 이 모양이다. 더구나 요즘 코로나19 사태로 한 달 앞이 어떻게 될지 모르는 판국 아닌가. 이대로 앉아서 죽자는 말인가.

리더의 이런 답답한 마음이 어느 임계점을 넘어서게 되면 회사 내의 ‘기후’가 바뀌기 시작한다. 바깥의 무르익어가는 봄기운과 달리 사무실 안은 점점 건조해지고 냉각된다. 바깥 세상에 꽃들이 늘어간다면 안에서는 조직을 이끄는 책임자들의 말이 많아진다. 좀더 열심히 해야겠다는 다짐과 ‘더 잘 할 수 있는데 왜 이것밖에 안 할까’ 하는, 구성원에 대한 불만이 뭉뚱그려져 수많은 말들이 마치 흩날리는 벚꽃처럼 사무실을 날아다닌다.

“내가 나 혼자 잘 살자고 이러는 거야? 자, 잘들 좀 해보자고!” 물론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짬밥’이 많을수록 속으로 뇌까린다. ‘또 시작이군.’ 리더들도 안다. 그래서 어느 임원의 말처럼 “말만 해서는 들어먹지를 않으니” 짜증도 내고 화도 낸다. 자신이 생각한 것보다 훨씬 많은 화를 내는 게 문제이긴 하지만.

‘잔소리 대왕’ 리더들의 공통점은 불안

구성원들로부터 ‘잔소리 대왕’으로 ‘찍힌’ 리더들을 만나보면 공통점이 있다. 이들의 잔소리는 구성원에 대한 불만으로부터 나오는 것 같지만 이 불만의 밑에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불안이 도사리고 있다. 잘 드러내려 하지 않지만 얘기를 나눠보면 마음 가득한 불안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해서 이 자리를 유지할 수 있을까’ 하는 위기의식이다. 물이 배를 띄우 듯 불안이 이들을 띄우고, 파도가 배를 몰아치듯 불안이 이들을 흔든다.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왜 그렇지 않겠는가. 1년 짜리 파리 목숨 아닌가. 더구나 1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여기까지는 누구나 그럴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중 진짜 위기 직전에 있는 이들이 있다. 말이 많은 리더일수록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뭔지, 그러니까 잔소리의 핵심이 뭔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 이들이 많지 않다. “진짜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물으면 뻔한 대답이 온다. “왜 이렇게 꿈뜬지 모르겠다” “성과가 저조해 큰 일이다.” 자신의 불안함에 다른 가면을 씌운다.

미국 로체스터 대학의 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가 실험 참가자들에게 교사 역할을 하게 했다. 1그룹은 그들이 가르친 학생들이 고득점을 받아야 한다고 강하게 지시했다. 2그룹에게는 그냥 잘 해보라고 했다. 그런 후 수업 내용을 녹음, 분석했더니 의미 있는 결과가 나타났다. 1그룹 교사들이 2그룹에 비해 말이 두 배나 많았다. 이들은 또 학생들의 말보다 자신들의 말을 우선했다. 문장에 ‘Have to, must, should’(해야 한다)를 3배나 많이 사용했다. 성과에 대한 압박을 받게 되자 자신도 모르게 학생들을 압박한 것이다. 잠깐의 실험에서도 이 정도였으니 실제로 압박을 받으면 어떨까?

이렇듯 불안은 압박에서 온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못된 성격이 따로 있기보다 대체로 상황이 그렇게 만든다. 시작점은 우리 뇌에 있다. 우리 뇌의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편도체(amygdala)는 분노, 공포, 증오 같은 생존에 직결되는 감정을 담당한다. 생존을 좌우하는 위험 감지 기능을 갖고 있어 아주 예민하다. 낯선 사람을 보면 10분의 1초 만에 저 사람이 좋은가, 나쁜가를 판별해 그에 맞는 행동을 하게 한다.

인간의 뇌라고 하는 전두엽이 생겨나기 한참 전에 이미 발달한 뇌 영역이라 지금도 무슨 일이 생기면 전두엽에 앞서 판단해서 우리 몸을 움직이게 한다. 우리가 첫인상에 휘둘리고, 공황장애에 시달리게 되는 것도 거슬러 올라가면 이곳에 이른다. 편도체 혼자 이러는 게 아니라 연관된 회로(circuit)들이 이런 결과를 만들어낸다.

한 마디로 편도체(회로)는 다섯 살쯤 된 어린아이와 비슷하다. 생존에 중요하다 싶으면 앞뒤 가리지 않고 빨간불을 켜서 에너지를 이곳에 쏟아 붓게 한다. 분석적이고 창의적인 기능은 말할 것도 없이 억제된다. 요즘 많이 쓰이는 심리적 안전감 또한 여기서 결정된다. 심리학에서 ‘내 안의 어린아이’라고 하는게 바로 이 편도체이다. 리더의 말이 많아지는 이유 역시 이곳에 기원을 두고 있다. 마음 속 어린아이가 빨간불을 켠 것이다. 평소 이성적인 사령관 역할을 하는 전두엽이 이에 동조하면 불안은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마음을 휘젓는다.

‘내 안의 어린아이’를 인정하자

‘내 안의 어린아이’는 이 세상 사람들 모두 갖고 있는데. 리더들의 마음 속 어린아이가 특히 유난한 이유가 있을까?

다른 건 몰라도 지위와 자동차는 한 번 높은 등급을 경험하면 낮아지기 힘들다. 낮아지면 창피나 굴욕을 느낀다. 더구나 지위는 40~50대에겐 삶의 모든 것일 수 있기에 이게 흔들리는 건 커다란 위협일 수밖에 없다. 철학자 같은 소설가 알랭 드 보통은 그의 책 [불안]에서 이런 말을 한다. 불안이란 자신의 존엄성이 위협을 받아 자괴감에 빠지거나 고통 받는 상황이라고. 자신의 존엄성이 지위에 있다고 여기는 이들에게 불안은 당연한 것이다. 지위는 한문(地位)과 영어(status) 모두 어원이 비슷하다. ‘땅 위에 서다(位, 라틴어 stare)’라는 뜻이다. 서 있는 곳이 흔들리는데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한 번 삐끗하면 회복할 수 없는 게 요즘 현실 아닌가.

더구나 우리나라는 나이 들어 막상 회사 문을 나서면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다. 평생 직업으로 여러 직장을 비교적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서유럽과 달리 우리는 직장이 직업이라 직장을 떠나면 끝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아도 요즘 어느 곳이나 조직개편 바람이 불면서 불안감이 증폭일로 아닌가. ‘왕국’이나 다름없던 사무실을 도서관이나 운동장처럼 만들지 않나, 임원실을 대폭 줄이지 않나, 갈수록 설 곳이 없어져 간다. “마음 둘 곳이 없다”는 말이 많아지는 게 괜한 엄살이 아니다.

이 예민한 어린아이를 진정시킬 방법은 없을까? 미국 서던 캘리포니아대의 뇌신경학자 안토니오 다마시오의 연구에 의하면 방법이 있기는 있다. 이성을 담당하는 전두엽이 ‘다섯 살 마음’을 인정해주는 것이다. 사후 합리화나 무조건 동조가 아니라 합리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 그럴 만 해’ ‘지금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야’ 같은 마음으로 달래주고 인정해주면 예민함이 낮아진다. 불안이나 분노를 줄여 심리적 안정을 가다듬을 수 있다.

다마지오 교수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하나같이 불안을 없애려고 하기보다 인정하는 게 좋다고 한다. 우리 생각과 달리 불안은 없어야 좋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불안은 다가오는 위협을 느껴 빨리 대응하게 하는 생존 필수능력이다. 편도체를 마비시킨 쥐는 괴롭혀도 대응할 줄 모른다. 바보 같이 당하고만 있다. 지나친 불안이 나쁜 것이지 불안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압박 땐 명시적 학습체계가 우리 몸 지배


▎말콤 글래드웰은 책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에서 ‘당황’과 ‘위축’은 완전히 의미가 다른, 사실은 정반대의 말이라고 했다.
문제는 리더라는 자리가 높은 곳에 있는 까닭에 기본적으로 불안정한 특성이 있는데다 리더라는 자리에 오르게 한 장점이 불안을 부추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대체로 일 잘한다는 말을 듣고 무난하게 리더가 된 이들은 세상 모든 어려움을 노력이나 열정으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할 수 있다’는 굳은 믿음의 소유자들이 많다. 그러니 그 자리에 올랐을 것이다.

하지만 묘하게도 바로 이 때문에 고통을 겪는다. 세상에는 할 수 없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요즘 창궐하는 코로나19 사태를 개인의 힘으로 막을 수 있을까? 그런데도 왜 미리 강구하지 못했을까, 이렇게 생각한다.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자책하거나 누군가에게 책임을 물으려 한다.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책해서 무슨 좋은 일이 있겠는가, 불가피한 상황을 누군가의 탓으로 몰아 한바탕 질책하는 게 누구한테 좋겠는가? 답답한 마음을 잠깐 해소할 수는 있어도 없애거나 줄일 수는 없다. 불안은 누른다고 없어지지도 않는다. 마치 연기가 그렇듯 누르고 숨길수록 더 기승을 부린다. 불안을 깨끗이 몰아내는 것도, 숨기고 회피하고 외면하는 것도 좋지 않다. 불안한 마음에 말을 쏟아내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좋은 방법은 불안을 인정하고 함께 가는 것이다. 마치 암을 무조건 박멸하거나 격퇴시키기보다 함께 가는 친구로 여겨야 암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다만 자신도 모르게 밀려들고 차오르는 불안이 어디서 시작되는지, 왜 이러는지 아는 게 필요하다. 아이가 울면 일단 안아주고 왜 우는지 알아서 대응하는 게 좋듯 말이다. 질문을 알아야 대답할 수 있는 것처럼, 원인을 알아야 제대로 대처할 수 있을 게 아닌가.

[티핑 포인트]라는 책으로 유명한 미국의 저널리스트 말콤 글래드웰이 쓴 [그 개는 무엇을 보았나]에 재미있는 얘기가 나온다. 1993년 윔블던 여자 테니스 결승전에서 체코의 야나 노보트나는 우승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3세트를 4대 1로 앞선 데다 서브권을 가지고 있었고 40대 30으로 이기고 있었다. 한 포인트만 따내면 세트 스코어는 5대 1이 될 것이고, 여세를 몰아 한 세트를 따내게 되면 꿈에 그리던 첫 우승을 할 수 있었다. 상대는 관록 있는 슈테피 그라프였기에 관중석은 꽉 찼고, 경기는 새로운 스타를 낳기 일보 직전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상황이 전개되었다. 자신 있게 넣었던 서브가 연속 실패하면서부터 경기가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했다. 몇 개의 실수가 이어지면서 5대 1이 되었어야 할 점수가 4대 2로 바뀌었다. 서브권을 가져간 그라프는 기운이 난 듯 4대 3으로 따라붙었다. 그렇다고 노보트나가 불리한 건 아니었다. 다시 서브권을 가져왔으니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결국 동점을 허용했고 그때부터 불안이 그녀에게 찾아들었다. 뜀뛰기와 혼잣말을 하는 것으로 떨치려했지만 그라프는 기회를 잡은 듯 경기를 역전시켰고 경기는 그렇게 끝나고 말았다. 노보트나는 한동안 거의 한 포인트도 따내지 못했을 정도로 속수무책이었다. 그녀는 준우승 트로피를 건넨 공작부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고 흐느껴야 했다. 노보트나는 그라프에게 졌을까, 아니면 불안에 속절없이 무너진 것일까?

사람은 압박을 받으면 흔들린다. 급박한 상황을 만나면 농구선수는 슛을 놓치고 골프선수는 스윙을 망친다. 우리는 이걸 당황했거나 위축되어서 그런 것이라고 말한다. 두 단어를 거의 같은 뜻으로 쓴다. 하지만 글래드웰은 ‘당황’과 ‘위축’은 완전히 의미가 다른, 사실은 정반대의 말이라고 한다. 물론 공통점도 있다. 의외로 많은 ‘재능 있는 사람들이 실패하는’ 이유로 작용한다.

우리는 뭔가를 배울 때 두 단계를 거친다. 명시적 학습과 묵시적 학습이다. 예를 들어 태권도에서 발차기를 잘 하려면 먼저 어떻게 하는지를 한 동작씩 배운다. 명시적 학습이다. 이걸 수천 번 연습하면 나를 위협하는 어떤 상황이 벌어졌을 때 나도 모르게 발차기를 하게 되는데 이게 묵시적 단계다. 명시적 학습이 의식적이라면 묵시적 학습은 의식 바깥, 곧 무의식에 속한다.

프로 골프선수의 스윙과 테니스선수의 스매싱은 대체로 묵시적이다. 워낙 연습을 많이 한 덕분에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런데 노보트나처럼 압박을 받으면 명시적 학습체계가 우리 몸을 지배한다. 하나하나 생각한다. 왜 실수했는지 따져보고 곱씹는다. ‘이번에는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지’ 하는 압박을 심하게 받아 공에 써야 할 신경을 자신에게 쓰다 실수가 또 다른 실수로 이어진다. 위축된 것이다.

위축될 땐 일부러 좀더 둔감해져야

당황은 말 그대로 본능이 의식에 앞서는 것이다. 물에 빠졌다면 나를 구하러 들어간 사람을 꽉 붙잡지 말아야 한다. 기본 상식이다. 그래야 구조하러 온 사람이 나를 데리고 나갈 수 있다. 하지만 허우적거리는 상황, 그러니까 당황하게 되면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놓지 않는다. 구조자를 꼼짝 못하게 해서 둘 다 불행한 결과를 만든다. 이렇듯 당황이 무의식적으로 잘못을 저지르는 것이라면, 위축은 지나치게 뭔가를 의식해서 또 다른 잘못을 만들어낸다.

압박을 심하게 받는 리더들도 이 둘을 자주 만나게 된다. 이 둘은 따로 찾아오는 게 아니라 앞서거니 뒤서거니 찾아든다. 마음에 걸리는 것에 신경을 쓰다 소심해지고 예민해져 자신도 모르게 ‘욱’ 하는 일이 일어난다. ‘내가 왜 그랬을까’ 하며 자책하고 노심초사하다 또 실수하고, 엉뚱한 일을 하거나 일을 엉망으로 만든 부하에게 하지 말아야 할 말을 확 내지른다. 위축될 때는 좀 둔감해지고 크고 깊은 호흡으로라도 마음을 넓혀야 하는데 그러질 못하고, 당황스러울 땐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쉽지 않다.

생각해보자. 혹시 말이 많아지고 있다면 나는 어느 쪽일까? 높아지는 짜증 섞인 목소리는 위축된 마음에서 나오는 걸까, 아니면 당황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걸까? 알아야 대처할 수 있다. 그래야 ‘재능 있는 사람의 실패 대열’에 끼지 않을 수 있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1528호 (20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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