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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기술·기업의 변혁의 계기변화는 계기가 없으면 감행되지 않는다. 스마트하게 일하는 법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뭘 굳이 유난 떨며 온라인으로 해야 해요?”라는 반응이 들려오곤 했지만, 코로나 이후의 일터에서는 이제 “뭘 굳이 유난 떨며 직접 만나서 해야 해요?”라는 반응이 기본이 될지 모른다.지금까지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실은 별로 그렇지 않다는 것을 서로 깨닫기 시작할 때 일상도 추억이 된다. 가끔은 지난 일상이 그립지만, 어느새 터널 속에서 긴 시간을 보내버린 우리는 이 새로운 어둠에 익숙해져 가고 있다. 행동과 심리 모두 변화는 시작되었다. 이 터널이 생각보다 길어진다면 그 변화는 항구적인 것이 될 것. 이 터널이 끝나는 날, 우리는 어떤 변화만을 남길지 의식적으로 선택할 수 있을까.비접촉 비대면의 리모트 컨트롤 경제는 대기업 친화적이고 기술 의존적이다. 자영업이나 프리랜서만 봐도 알 수 있듯 서민들의 경제권은 보통 고객과의 대면과 접촉이라는 부대낌을 통해 이루어진다. 따라서 작금의 사태는 구조적 피라미드의 하단부터 침습해 들어온다.그래도 희망도 기회도 보인다. 희망이란 최소한의 노블리스 오블리주라도 행사해야겠다는 기업가적 양심이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컨대 구글은 8억 달러를 기부하기로 했는데, 이 중 약 6억 달러가 중소기업과 각국 정부를 위한 광고 물량이었다. 작은 기업일수록 고객의 관심을 유지하는 건 힘든 일, 이처럼 대감 집 곳간을 푸는 구휼은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다. 국내 플랫폼들도 뒤따랐으면 한다.구찌와 프라다가 마스크를 만들고, GM과 포드 등은 인공호흡기를 공급하겠다 한다. HP는 3D 프린터로 필요한 의료용구들을 현장 제조하도록 집단 지성을 모으고 있고, 게임업계는 #PlayApartTogether라는 거리두기 캠페인을 세계보건기구(WHO)와 시작했다. 세계는 실로 오래간만에 아니 근대 역사상 처음으로 동일한 적 앞에서 단결하고 있다.기회도 있다. 위기는 보통 기술적 대변동을 열어젖힌다. 외환위기 후 광대역이, 금융위기 후 스마트폰이 사회를 바꿨다. 혼돈은 굳어버린 질서에 틈을 만든다. 그 틈을 비집고 나온 기업들이 새로운 플랫폼이 될 기회다. 역시 혼돈 속 소비자들은 지금 무엇이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큰 기업은 늘 혼돈이 키운다.방역과 같은 공공의료는 결국 정부의 몫. 국가적 위기를 민간이 도울 수야 있지만 주체가 될 수는 없는 일. 고도의 민간 역량을 가지고 있는 나라도 정권이 어떤 선택을 했는지에 따라 결과가 사뭇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일임을 세계인은 지금 실시간으로 보고 있다.현재 그나마 커브가 둔화된 곳은 중화권과 한국 정도인데 모두 미련할 만큼 엄격한 격리, 치밀한 추적을 반복했다. 이 되풀이는 행정력 총동원과 사생활 침해를 수반한다. 저렇게 동선을 드러내면 인권상 좀 그렇지 않나 쳐다보던 서방 국가들도 이제는 자국민들이 얼마나 무모해질 수 있는지, 그리고 그 철없음의 대가가 평시와 다르다는 점도 자각해 버렸다.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지금은 ‘위생’ 전쟁이라며 이동 금지령은 물론 물자 징발령까지 통과시켰다. 트럼프도 국방물자 생산법을 동원하고 독일 메르켈은 2차 대전 이후 가장 큰 도전이라고 하는 등 각국은 이미 전시 상태다. 개인의 생활도 개인의 자유도 근대 국가가 약속한 권리이지만 위기 앞에서 커진 정부에 그 권리는 징발된다.법이나 동원령이 무디고 더디기에 ‘규율 기술’도 동원된다. 이미 우리도 자가 격리 대상자에게 앱을 강제 설치시켜, 위치정보로 감시하고 있다. 중국은 적·황·녹으로 자신의 검역 상황을 알려주는 앱을 설치하지 않으면 이동을 막기 시작했다. 유럽 이동 통신사들은 코로나 바이러스의 확대를 감시하기 위해 고객 위치 데이터를 유럽위원회와 공유하고, 미국 정부는 모바일 광고로부터 위치 데이터를 받고 있다.이런 ‘중국식 안전감’은 세계로 뻗고 있다. 애초에 중국 우한에서 감염 폭발이 일어나게 된 원인이 중국식 통제의 불투명성 탓임을 알고 있지만, 세계는 빠르게 중국식이 되고 있다. 코로나 이후의 일상에서는 열감지 얼굴인식 카메라가 위험 인자를 사전에 솎아낼지도 모른다.
권위적 통제에 대한 불감증 확산정부의 통 큰 금융정책과 재정 출동도 당연시되는 시기다. 실물경제의 마비가 지속된다면, 각종 급부와 기본소득 논의 등을 넘어 ‘공적’ 물자의 배급을 원할 수도 있다. 정부가 커져야 한다면 투명하기라도 하기를 바라며, 북구식 사회주의에 대한 낭만을 키우기도 한다. 실제로 이 여파로 실직한 덴마크 가족은 올 여름 90%의 소득을 그대로 보전 받을 것이다. 물론 그들은 소득의 반절을 이미 세금으로 내왔지만.큰 기업과 큰 정부에 대한 기대와 의존이 가속된다면, 포스트 코로나 시대는 마치 중앙의 생명줄에 연결되어 고치가 되어버린 매트릭스의 인간들처럼, 새로운 형식의 요람형 이데올로기의 대두와 함께 시작할 수도 있다. 큰 정부에서 받은 급부로 큰 기업에서 생필품마저 배달 받는 삶. ‘히키코모리 경제(shutin economy)’가 트렌드가 될지 모르니 좀처럼 상쾌하지 않다.급히 커진 모든 것들은 권위주의적이 되기 쉽다는 역사 또한 잊어버리기 쉽다. 당장의 불안은 미래의 공포보다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필자는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겸 IT평론가다. IBM, 마이크로소프트를 거쳐 IT 자문 기업 에디토이를 설립해 대표로 있다. 정치·경제·사회가 당면한 변화를 주로 해설한다. 저서로 [IT레볼루션] [오프라인의 귀환] [우리에게 IT란 무엇인가]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