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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그녀의 키스 받아낸 ‘도어 인 더 페이스 전략( door-in-the face technique)’ 

 

마케팅·노사협상·다이어트에도 적용… 큰 요구 뒤 수위 낮추면 확률 커져

▎영화 ‘무기여 잘 있거라’의 한 장면
미국 플로리다주 키웨스트에는 ‘헤밍웨이의 집’이 있다. 소설 [무기여 잘 있거라]가 1929년 집필된 곳이다. 2층에는 한 여인의 사진이 걸려있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 밀라노의 미국 적십자병원에서 일했던 간호사 아그네스다. 그녀는 헤밍웨이가 사랑에 빠졌던 실존인물이다. [무기여 잘 있거라]의 영국인 간호사 캐서린 바클리의 모델이 됐다.

헤밍웨이는 19살의 나이에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구급차 운전병이었다. 부상을 당해 치료를 받던 중 아그네스와 사랑에 빠졌다. 결혼까지 생각했다. 하지만 부모님 집이 있는 미국 일리노이주로 돌아와 있는 사이 아그네스는 이별을 통보했다. 이탈리아 장교와 약혼했다는 것이다. ‘헤밍웨이의 집’ 문화해설사는 말했다 “헤밍웨이는 큰 실의에 빠졌었는데요, 그가 [무기여 잘 있거라]를 쓴 것은 그녀에게 복수하려고 썼다는 말도 있어요.”

[무기여 잘있거라]는 헤밍웨이를 베스트셀러 작가로 만들어 준 작품이다. 배경은 제1차세계대전. 이탈리아에서 건축을 공부하던 미국 청년 프리데릭 헨리는 구급차 부대 중위로 참전한다. 그는 이탈리아 고리치아 숙소 인근 영국군 병원에서 자원봉사 간호사 캐서린 바클리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전시의 사랑은 제한적이다. 구급차를 이끌고 고리치아 북쪽 전선에 투입됐던 헨리는 오스트리아군의 박격포 공격을 받는다. 중상을 입고 후방으로 이송된 헨리는 밀라노 미군병원에서 캐서린을 다시 만난다. 헨리는 완치될 때까지 캐서린과 꿈같은 시간을 보내지만 요양의 시간은 끝났다. 헨리는 임신을 한 캐서린을 남겨 두고 다시 전선으로 복귀한다. 하지만 그새 전세는 악화됐다. 독일군의 공격에 밀린 이탈리아군은 바인시차 고원에서 퇴각하고 헨리도 후퇴대열에 낀다.

전쟁은 잔인하다. 바로 옆에서 치즈를 나눠먹던 사병이 박격포 한방에 온몸이 찢어진다. 간신히 힘줄에 매달린 그의 다리가 갓 잘려나간 도마뱀 꼬리처럼 움찔움찔 거린다. 파편이 깊이 박힌 내 다리도 감각이 없다.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와 외로움은 역설적이게도 사람의 따뜻한 살갗을 찾게 만든다. 헨리는 휴가 내내 여자를 바꿔가며 만났지만 그때뿐이다. 솜전투(Battle of the Somme)에서 약혼자를 잃은 캐서린은 깊은 상처를 안고 있다. 둘이 만났을 때 사랑에 빠지는 것은 어쩌면 정해진 운명이었을 테다.

헨리는 캐서린을 두 번째 만났을 때, 키스를 시도한다. 하지만 캐서린이 매몰차게 헨리의 빰을 때렸다. 헨리의 눈앞이 번쩍한다. 눈물이 절로 나올 정도다. 헨리의 ‘진도’가 너무 빨랐을까. 그런데 반전이 일어난다. 캐서린이 “정말 미안해요”라고 사과를 한 것이다. 순간 헨리의 뇌리에 스치는 생각. ‘갑자기 전세가 뒤집혔구나!’

사람들은 큰 요구를 거절한 뒤에 그보다 훨씬 작은 요구를 하면 자신도 모르게 순순히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상대의 요구를 거절할 때면 그것이 아무리 합리적이라고 할지라도 마음 한구석이 편치 않은 게 있다. 그 같은 심리적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처음보다 훨씬 작은 요구는 수용한다는 것이다. 협상에서 이 같은 심리를 의도적으로 이용하기도 하는데 이를 ‘도어 인 더 페이스 전략(door-in-the face technique)’이라고 한다. 눈앞에서 문을 닫아버린다는 뜻으로 무안을 주게 만든 뒤 원하는 것을 얻는 협상전략이다.

예를 들어 A가 절친한 친구 B에 갑자기 1000만원을 빌려달라고 하자 B가 깜짝 놀라며 “미안하다”며 거절했다. 그런데 A가 며칠 뒤 다시 B에게 전화를 걸어 “100만원만 빌려줄 수 없느냐”고 재차 묻는다. 그러면 “알겠다”라는 답변을 들을 가능성이 크다. B로서는 1000만원은 너무 크지만 100만원이라면 빌려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저도 몰래 들기 때문이다.

헨리는 ‘도어 인 더 페이스 전략’을 썼다. 헨리는 미안해하는 캐서린에게 오히려 “잘 때렸어요”라고 말했다. 캐서린이 “다치게 할 생각은 아니었어요. 많이 아프죠?”라고 거듭 사과하자 “캐서린이 잘한 거예요. 난 아무렇지도 않아요”고 더 두둔했다. 캐서린은 더욱 무안해졌다. 그런 그녀를 보며 헨리는 생각한다. ‘이 게임에서 한수 앞서 있구나.’

한번 더 자신을 낮출 차례다. 헨리는 “지금 내 삶이 좀 웃기잖아요. 모국어도 사용하지 못하는 나라에서. 근데 당신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내 앞에 나타난 거죠”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캐서린이 손사래를 친다. “바보 같은 소리 하지 말아요. 내가 사과도 했잖아요. 우리가 잘 통한다는 것도 인정해요.” 그리고 덧붙이는 말. “괜찮다면 중위님께 키스를 하고 싶어요.”

헨리는 마침내 캐서린으로부터 키스를 요청받았다. 달콤한 프렌치 키스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 헨리는 캐서린에게 “한번도 누구를 사랑해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 이 정도면 ‘선수’다.

‘이번에는 네가 양보할 차례’라는 무언의 압력


▎어니스트 헤밍웨이
도어 인 더 페이스는 세일즈맨들이 주목하는 마케팅 기법이다. 처음에 비싼 제품을 보여줘 소비자들을 부담스럽게 한 뒤 그보다 낮은 가격의 제품을 보여주면 소비자들은 쉽게 지갑을 연다. 너무 비싼 제품이야 그렇다 쳐도 이것도 사지 못 한다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노사협상에서도 종종 이용된다. 노조는 총파업을, 경영진은 직장폐쇄 카드를 꺼내들고 강대강 대치를 하다 서로 한발씩 물러나 테이블에 앉는 경우다. 큰 요구를 했다가 수위를 낮추면 상대에게 ‘이번에는 네가 양보할 차례’라는 무언의 압력을 주게 된다. 다이어트 식이조절을 유도할 때도 ‘도어 인 더 페이스 전략’은 유용하다. 비만환자에게 맛없는 저지방, 저칼로리 음식을 섭취하도록 유도하는 방법은 뭘까? 처음에는 간식을 전혀 먹지 못한다고 했다가 나중에 간식을 먹을 수는 있되 저지방, 저칼로리로 한정한다고 말하면 잘 따른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바인시차에서 후퇴한 헨리는 캐서린과 재회한다. 폭풍우가 치던 밤, 둘은 스트레사에서 보트를 타고 밤새 노를 저어 스위스로 탈출한다. 탈영병이 된 헨리는 이탈리아에 더는 머물 수가 없었다. 스위스 몽트뢰 산촌에 정착한 두 사람은 행복한 시간을 보낸다. 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캐서린이 출산을 하다 숨을 거둔다. 헤밍웨이는 이 소설을 “내가 쓴 로미오와 줄리엣”이라고 평가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는 단순한 사랑 이야기가 아니다. 잔인하지만 허무한 전쟁의 이면을 낱낱이 고발하는 반전소설에 가깝다. 치즈를 먹다가 부상당한 뒤 훈장을 받고, 명령을 거부한 아군을 총 쏘아 죽이고, 부하는 아군이 쏜 실탄에 맞아 죽는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전쟁에서는 반복적으로 일어난다. “이거 정말 빌어먹을 전쟁 아닙니까”라고 외치던 부상병의 말은 헤밍웨이가 전쟁을 바라보는 시선과 닮아있다. 세계 유일의 분단국가로 항상 지정학적 위기에 시달리는 한국인으로서 마냥 남의 이야기처럼 들리지 않는 대목이다.

-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1533호 (20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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