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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호적수(6) 두경승과 이의민] 고려 무신정권 시기 명종의 생존법 

 

이의민 견제 위해 두경승에게 힘 실어줘… 적수다운 적수 만들지 못해 폐위

▎[고려사] 반역전에 실려 있는 이의민 열전의 일부분
100년에 걸쳐 지속한 무신정권은 고려사의 암흑기로 불린다. 문신은 대거 참살 당했고 왕은 허수아비가 됐다. 국정에 관한 지식이나 경험이 전혀 없는 무장들이 최고 권력자가 되면서 나라는 혼란에 빠졌다. 이왕 집권했으니 국가와 백성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다면 조금은 나았으련만. 올곧았던 경대승(慶大升, 1154~1183)은 3년 만에 요절했고, 똑똑하고 능력이 뛰어났던 최충헌(崔忠獻, 1149~1219)은 본인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만 관심을 쏟았다. 이의방, 정중부 등 다른 집권자들은 논평할 필요도 없다.

1183년부터 1196년까지 13년간 집권한(최씨 정권을 제외하면 가장 기간이 길다) 무신정권 제4기 지배자 이의민(李義旼, ?~1196)도 마찬가지다. 그는 1170년 정중부와 이의방이 일으킨 무신정변에 참여하여 장군이 됐다. 1173년 김보당이 폐위된 의종을 옹립하며 군사를 일으키자 이의민이 이를 진압했다. 그 과정에서 의종의 허리뼈를 부러뜨려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후, 경대승 집권기간에 경주로 몸을 피해 있다가 경대승이 죽자 명종의 요청으로 상경해 정권을 장악했다.

명종은 왜 이의민을 불렀을까? 권력의 공백을 틈타 왕권을 되찾을 기회였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의민을 추종하는 세력이 강력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명종은 그에게 힘을 실어줘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새로운 권력자에게 휘둘리느니 익숙한 사람을 파트너로 삼았다고 할까?

하지만 이의민은 용력만 뛰어났을 뿐 국정을 책임질만한 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포악하고 탐욕스러웠다. [고려사]에 따르면 ‘이의민이 백성의 집과 땅을 마구 빼앗으니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의민은 다른 무신 집권자에 비해 마음대로 권력을 휘두르지 못했다. 자기 세력을 챙겼지만 인사권을 장악할 수준은 아니었다. 이의민의 집권기에 명종은 일정 부분 왕권을 행사했고, 문극겸을 중심으로 한 문신들도 큰 어려움 없이 활동했다.

이의민의 도량이 넓어서? 그가 권력을 절제하고 정치를 잘해서? 절대 아니다. 이의민이 온전한 힘을 갖지 못하고 전횡을 일삼지 못했던 것은, 두경승(杜景升, 미상~1197)이 그를 견제했기 때문이다.

포악하고 탐욕스런 이의민 견제 위해 두경승 요직 임명

두경승은 무신정권기에 보기 드문 무장이었다. 무신정변이 일어나던 날에도 홀로 근무지를 지키며 소임을 다했던 두경승은 그의 기개를 높이 산 이의방의 눈에 들어 낭장으로 승진했다. 얼마 후, 김보당이 반란을 일으키자 선유사(宣諭使)가 되어 해당 지역을 빠르게 안정시켰고 국경을 어지럽히던 여진족을 제압했다. 20여 차례의 전투를 모두 승리로 이끌며 서경유수 조위총의 반란도 평정한다. 이 밖에도 그는 많은 무공을 세웠다. 그 공로를 인정받아 상장군(上將軍)에 올랐고, 이어 수태위(守太尉) 참지정사(參知政事) 겸 판이부사(判吏部事)에 제수됐다. 그뿐만이 아니다. 명종은 두경승을 삼한후벽상공신(三韓後壁上功臣)으로 책봉하고 고려의 최고위 관직인 문하시중으로 승진시켰다. 군권과 인사권, 거기에 더할 수 없는 영예까지 주어진 것이다.

이처럼 두경승이 연이어 요직에 임명되며 승승장구한 것은 그의 능력과 업적 덕분이지만, 무엇보다 명종의 의도였다. 두경승에게 힘을 실어줘 이의민의 대항마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의방과 정중부의 집권기에 두경승의 경력이나 명망이 부족했지만, 이제는 거물이 되었으니 충분히 가능한 시도였다. 더욱이 두경승은 조야를 막론하여 존경을 받았고 군부에도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이 있었다. 이의민도 두경승을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두경승은 이의민의 폭주를 견제하며 조정과 왕실을 보호하기 위해 노력했다.

물론, 이의민이 가만히 있지 않았다.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은 종종 충돌했다. 한번은 두경승의 벼슬이 자신보다 높다는 데에 불만을 품고 이의민이 두경승에게 욕설을 퍼부었다고 한다. 두경승은 웃기만 할 뿐 상대하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또한 〈고려사〉에는 이런 일화가 있다. 이의민이 두경승을 위협하기 위해 주먹으로 기둥을 치자 서까래가 흔들렸다. 이를 본 두경승 또한 벽을 내려치니 벽에 구멍이 뚫렸다는 것이다. 두 사람이 ‘내 주먹이 세니 네 주먹이 세니’ 하면서 수박희를 겨뤘다는 기록도 있는데, 최고 권력자의 대결이라고 하기에는 볼썽사납다.

다만, 이의민의 위세가 조금 더 강했던 것 같다. 두경승의 공신 책봉을 축하하는 연회에서 두경승이 노래하고 동료인 정존실이 피리를 부르자, 이의민이 “재상이라는 자들이 어찌 악공과 광대처럼 행동하는가?”라며 짜증을 냈던 것. 그에 따라 부랴부랴 잔치가 파했다는 기록이 있다. 요컨대, 어느 정도 힘의 우열은 있었지만, 서로를 넘어설 정도는 아니었다. 두 사람은 그렇게 긴장 속의 평화를 유지해갔다.

두경승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명종

이러한 팽팽한 대립은 최충헌이 이의민을 제거하면서 깨진다. 이의민을 죽이고 정권을 전복시킨 최충헌은 두경승을 예우하는 듯 하다 이내 체포해 먼 섬으로 유배를 보냈다. 두경승을 그대로 놔두면 자신들이 권력을 장악하는 데 방해가 되리라 생각한 것이다. 최충헌은 정변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명종을 폐위했는데, 두경승이 명종에게 충성을 바쳤던 것도 그를 숙청한 이유다.

이상 두경승과 이의민의 사례에서 주목할 것은 두 사람이 아니라 명종이다. 명종은 생존을 위해 이의민에게 정권을 넘겼지만 두경승을 키워 그를 견제했다. 이의민의 호적수라 불린 두경승이 버티고 있기 때문에 이의민은 다른 무신집권자처럼 전횡을 휘두르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평가지만, 국정운영도 무난한 편이었다.

하지만 단지 그뿐이다. 명종은 두 사람을 대립하게 해 자신이 숨 쉴 공간을 확보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두경승이란 훌륭한 신하를 제대로 활용하지 않았고, 두 축 중 하나가 무너졌을 때를 대비하지 않았다. 최충헌에 의해 이의민이 죽임을 당한 후, 명종과 두경승 모두 속절없이 무너지고 만 것은 결국 명종의 탓이다.

역사를 보면, 신하의 힘을 제어하기 위하여 왕은 그 신하의 적수를 만든다. 외척 윤원형에 맞설 인물로 이양을 키운 조선의 명종, 경주 김씨 가문의 위세를 누르고자 전략적으로 풍산 홍씨 가문을 육성한 영조, 노론의 영수 김종수를 견제하기 위해 남인 채제공에게 힘을 실어준 정조 등 그러한 사례는 무수히 많다.

이것이 성공하려면 적수다운 적수를 만들어야 한다. 또 왕은 그 후의 일들에 대해서 준비해야 한다. 단순히 ‘견제’만 시켜놓고 편하게 있으면 나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왕 본인에게도 해가 된다. 고려의 명종이 이를 잘 보여준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54호 (20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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