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삼성’ 경험한 창업가들의 도전엔 이유가 있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 7월 경기도 삼성전자 수원사업장에서 C랩을 통해 스타트업에 도전 중인 직원들과 대화하고 있다. / 사진:삼성전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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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를 글로벌 초일류로 키워낸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은 별세했지만, 삼성전자에 스며든 고인의 도전과 혁신의 DNA는 한국 경제 곳곳에서 자생(自生)하고 있다. 특히 인재 양성을 넘어 “사과나무를 심어야 한다”던 고인의 의지대로 삼성전자는 창업가 육성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삼성전자의 크리에이티브랩(Creative-Lab, 이하 C랩)이 대표적이다.삼성전자는 2012년 12월 창의개발센터를 만들고 C랩 운영을 시작했다. 당시 삼성전자 내부에 신규사업발굴팀이 운영되고 있었는데, 회사와 분리된 별도의 창업연구소를 설립한 것이다. 삼성전자가 C랩을 구축한 시점은 제18대 대선 정국으로, 경제민주화가 화두였던 시절이었다. 이른바 ‘재벌 개혁’ 담론으로 재계가 잔뜩 움츠러들었던 시기에 재계 1위 삼성은 미래를 위한 혁신을 감행했다.
5년내 재입사 기회, 실패 두려움 없애재계에선 C랩은 삼성 특유의 위기의식의 결과물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성장가도를 달리는 상황에도 안주하지 않는 위기의식으로 신(新)성장 동력 확보에 적극 나섰다는 것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지난 2013년 10월 ‘삼성 신경영 20주년’ 만찬에서 “자만하지 말고 위기의식으로 재무장해야 한다”며 “실패가 두렵지 않은 도전과 혁신, 자율과 창의가 살아 숨 쉬는 창조경영을 완성해야 한다”고 강조한 바 있다.2018년 C랩에서 분사(스핀오프)된 ‘에바’의 이훈 대표는 “대량 생산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대기업 특성상 소량 생산 체제인 스타트업 육성을 병행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며 “삼성전자는 내부에 있으면서도 완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되는 C랩을 통해 기존 사업을 안정적으로 이끌면서 역동적으로 스타트업을 키우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이라고 말했다. 이동식 전기자동차 충전기를 개발 중인 에바는 법인 설립 8개월 만에 네이버·한국전자통신연구원(ETRI)·슈미트(Schmidt) 등으로부터 12억원의 투자를 유치하는 등 시장에서 사업성을 인정받고 있다.실제 C랩 과제에 참여하는 삼성전자 임직원은 1년간 현업에서 벗어나 수원 ‘삼성 디지털 시티’와 서울 관악구 서울대학교 연구공원 내 ‘삼성전자-서울대 공동연구소’에 마련된 독립된 근무공간에서 스타트업 직원처럼 일한다. 각 팀들은 팀 구성, 예산 활용, 일정 관리 등 과제 운영과 관련된 업무도 자율적으로 결정한다. C랩에서 분사된 이후에도 직원들이 원하면 5년 내에 삼성전자로 재입사가 가능하다는 점도 특징이다.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는 일종의 ‘안전 장치’를 마련해 직원들이 과감하게 창업에 뛰어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한 것이다.C랩에서 2015년 분사된 ‘솔티드’의 조형진 대표는 “실패를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때문에 대기업에 있는 전문화되고 훈련된 인재들이 창업 현장에 뛰어들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라며 “C랩은 분사 이후 5년 이내 재입사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실패를 실패로 바라보지 않고 가치 있는 도전의 결과로 인정해주는 문화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C랩의 첫 분사 기업 솔티드는 스마트 인솔(깔창)을 개발하는 회사다. 스마트 인솔은 내장된 압력 센서를 통해 족저압, 무게 중심, 신체 밸런스 등의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분석한다. 이를 통해 골프 등의 운동 시 자세와 동작 교정이 가능하다. 이 회사는 지난 10월 19일 미국 골프용품 유통 기업과 40억원 규모의 제품 공급 계약을 체결하는 등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있다. 아마존의 연례 할인행사인 ‘프라임데이’에서도 골프 스윙 트레이너 분야 베스트셀러 1위를 기록하기도 했다.C랩에서 독립한 스타트업들은 삼성전자의 혹독한 검증 과정을 거쳐 탄생한다. 인공지능(AI), 자율주행 등 다양한 분야의 주제로 매년 1000개 이상의 아이디어가 제출된다. 이 가운데 실제 창업에 성공하는 과제는 손에 꼽는다. 1년 동안 수백 대 1의 경쟁률을 뚫은 아이디어만이 살아남는 것이다. 삼성전자 임직원뿐만 아니라 벤처캐피탈 관계자 등 외부 인사들의 평가도 받아야 한다. 이들 검증을 통과해 분사가 결정돼도 끝이 아니다. 약 3개월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야 한다. 세무, 회계, 특허 전략 등 실제 스타트업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교육을 받고, 이미 창업에 뛰어든 C랩 출신 대표들과의 만남도 갖는다. 삼성 직원에서 스타트업 대표로 변신한 이들의 비결을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조형진 대표는 “창업에 성공한 선배들과의 만남 등이 인상적이었다”고 했다.C랩에서 2016년 분사된 ‘웰트’의 강성지 대표는 “창업 과정에서 글로벌 기업 삼성이라는 롤 모델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이 C랩의 큰 강점”이라며 “삼성의 깐깐한 검증을 거쳐 창업하는 만큼, 다른 스타트업과 비교해 보다 확신을 갖고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다”고 했다. 웰트는 낙상 예방 알고리즘이 적용된 스마트 벨트로 세계 최대 규모의 가전제품 박람회인 ‘CES(세계가전전시회) 2020’에서 ‘웨어러블 테크놀로지’ 부문 혁신상을 수상했다.
2018년부터 5년간 외부 스타트업 300개 육성초기 자금뿐만 아니라 양질의 인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점도 C랩의 강점으로 꼽힌다. 통상 창업 초기에는 자금 확보만큼 어려운 것이 인력 충원인데, C랩 스타트업은 과제 초기부터 참여해온 인력들이 함께 창업에 뛰어든다.2017년 C랩에서 분사된 ‘룰루랩’의 최용준 대표는 “삼성에는 다양한 측면에서 양질의 인력이 많은데, 본인들이 동의하면 같이 팀을 꾸릴 수 있는 제도가 있어 많은 도움이 됐다”며 “실제 창업을 해보니, CTO(최고기술경영자) 등의 전문 인력을 외부에서 구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고 말했다.삼성전자는 2018년에는 국내 유망 스타트업을 지원하는 외부 스타트업 육성 프로그램인 ‘C랩 아웃사이드’를 도입했다. 이를 통해 2018년부터 5년간 외부 스타트업 300개 육성, 사내 임직원 스타트업 과제(C랩 인사이드) 200개 지원 등 총 500개의 스타트업을 키운다. 사내로 한정된 스타트업 육성을 사외로 확대해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를 활성화시키겠다는 것이다.C랩 아웃사이드는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동행 비전’이 반영된 대표적인 프로그램 가운데 하나로, C랩 아웃사이드에 선발된 회사들은 삼성 서울R&D(연구개발)캠퍼스에 마련된 전용 공간에 1년간 무상으로 입주하는 혜택을 누린다. 팀당 1년간 최대 1억원의 사업 지원금을 받을 수 있고 임직원 식당, 출퇴근 셔틀버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다. 삼성전자와의 사업 협력 방안을 모색할 수 있는 기회도 제공된다. 삼성전자는 우수 스타트업에 CES 등 세계적인 가전 전시회 참가도 지원한다.- 이창훈 기자 lee.changhun@joongang.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