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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선 심리학 공간] 오바마·잡스가 인생에서 제거한 ‘결정 피로’ 

 

같은 옷만 고집하는 유명인사, 사소한 일에 에너지 쓰는 것 싫어해

▎생전 블랙 터틀넥과 청바지만 고집했던 전 애플 최고 경영자 스티브 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모습.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 천재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전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 페이스북 창업자 마크 저커버그, 패션 디자이너 마이클 코어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매우 유명하다는 것, 그리고 늘 같은 옷을 입는다는 것이다. 스티브 잡스는 항상 블랙 터틀넥과 청바지를 입었던 것으로 유명하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회색 정장만 입고 다녔다. 버락 오바마가 회색이나 네이비 슈트만 입는다는 것도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마크 저커버그는 회색 티셔츠를 고집하고 마이클 코어스는 블랙 슈트만 입는다. 심지어 이 사람은 패션 디자이너. 왜들 이러는 걸까?

모두 같은 이유를 댔다. “뭘 입을지, 먹을지, 이런 결정은 하고 싶지 않다. 사소한 일에 방해를 받으면 하루를 잘 보낼 수 없다. 간단한 의사 결정을 하느라 에너지를 써버리면 다음 의사 결정을 할 때 능력이 떨어진다.” 오바마가 한 말이다.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매일 중대한 의사 결정을 해야 했던 그가 몸소 체득한 삶의 지혜인 듯하다.

“패션은 당신이 누구인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어 하는지 말해준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마이클 코어스. 미셸 오바마가 공식 사진을 찍을 때 이 사람이 만든 옷을 입곤 했다. 그런데 ‘패션 정체성’ 운운하는 그가 정작 본인의 옷엔 관심도 일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이런 말도 했다. “뭘 입을까 고민하느라 많은 시간을 쓰는 것, 내가 정말 싫어하는 일이다. 나에게 잘 어울리고 편안한 유니폼을 마련해 놓아 시간을 절약할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인생의 판도를 바꿔 놓는 일이 아닌가.” 만약 소비자들이 모두 그처럼 생각한다면 패션회사들이 줄줄이 도산할 것이다.

세계적 디자이너 평소 블랙 슈트만 고집

그런데 마이클 코어스의 ‘얄미운 모순’이 이해된다. 자신의 에너지를 멋진 옷을 만드는 일에만 집중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일 것이다. 이런 선택에 어떤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결정 피로(Decision Fatigue)’ 연구를 통해 알아보자.

결정 피로의 개념은 심리학자 진 트웽(Jean Twenge)이 결혼 준비를 하면서 생각해냈다. 미국에서는 결혼을 앞둔 커플이 신혼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리스트로 작성해 지인들에게 알려주는 관습이 있다. 이 부부에게 뭐가 필요할까? 이 물건은 이미 마련하지 않았을까? 이런 지인들의 고민을 효율적으로 해결해주는, 지극히 미국적인 관습이다.

하지만 이 리스트를 작성하는 예비부부는 의사 결정 과정에서 적잖은 어려움을 경험한다. 수건은 어떤 종류, 어떤 색으로 몇 개가 필요할까? 식칼, 토스터 오븐, 커피 그라인더는 어떤 게 좋을까? 행복한 작업이긴 하지만 평균적으로 100개가 넘는 항목들을 골라서 리스트에 올려야 하니 피곤할 수밖에.

웨딩 플래너와 리스트에 올릴 품목을 상의하느라 지쳐 있었던 트웽은 순간 연구 주제를 떠올렸다. “혹시 뭔가를 결정해야만 하는 것이 내 에너지를 고갈시키고 의지력을 약화하는 것은 아닐까?”

그는 실험실 책상 위에 펜, 양초, 티셔츠 등 물건들을 가득 올려놓고 학생들을 불러 실험이 끝나면 이것 중 하나를 선택해서 가질 수 있다고 말했다. 실험 집단에 속한 학생들은 여러 가지 자질구레한 결정을 해야만 했다. 검은색 티셔츠와 빨간색 티셔츠 중에 어떤 것을 선호하나요? 펜을 원하나요? 아니면 양초? 바닐라 향? 혹은 아몬드 향? 모두 점처럼 작은 결정이었다. 이와 달리 통제 집단에 속한 학생들은 아무런 결정을 하지 않고 그저 물건들을 둘러보기만 했다.

그러고는 모든 학생에게 의지력을 요구하는 과제를 수행하도록 했다. 누가 주어진 과제를 더 빨리 포기했을까? 자잘한 의사 결정을 해야 했던 학생들은 그럴 필요가 없었던 학생들에 비해 더 빨리 포기했다. 의지력이 감소했던 것이다. 의지력은 아껴서 써야 할 귀한 자원이다. 의지력이란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방해가 되는 행동을 억제하고 바람직한 행동을 촉진하는 능력이다. 의지력이 고갈되면 중요한 일에 집중할 수 없는 상태가 된다.

온라인 쇼핑만으로도 피곤함 느낄 수 있어

이 사람과 결혼할까? 혼자 살까? 회사를 그만두고 창업을 할까? 아니면 유학을 떠날까? 이 집을 팔고 이사를 할까? 개인에게 중요한 결정들이다. 상사의 부당한 처우에 항의할까? 그냥 참을까? 무겁고 불쾌한 결정이다. 이런 결정을 하는데 많은 에너지가 투입된다는 것은 모두 잘 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하거나 불쾌한 결정들만 의지력을 갉아먹는 게 아니다. 휴가를 동해안으로 갈까, 아니면 제주도가 더 좋을까? 오늘 점심으로 냉면을 먹을까? 아니면 삼계탕이 더 나을까? 김 부장? 아니면 이 과장과 함께 할까? 유쾌하고 사소한 결정들도 자기 통제의 힘을 약하게 한다.

온라인으로 물건을 사고 나면 제법 피곤할 때가 있다. 장바구니를 끌고 마트 구석구석을 돌아다닌 것도 아닌데 말이다. 하지 않아도 되는 고민, 예를 들어, 싸게 살 수 있는 묶음 상품과 비싸지만 수납공간을 차지하지 않는 낱개 상품 중에서 갈등하느라 그런 것 같다. 회의 자료를 만들 때도 글꼴의 종류와 크기, 색깔 등 디자인을 고민하느라 더 피곤해질 때도 있다. 그래서 언젠가부터 똑같은 물건들을 사고, 똑같은 글꼴을 쓴다.

‘나는 대통령도, 사장도 아닌데 사소한 결정에 들어가는 에너지마저 아껴야 하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런데 우리가 하루에 몇 개의 의사 결정을 하는지 따져 보면 그로 인한 피로감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코넬 대학의 연구에 따르면 음식과 관련한 의사 결정만 해도 매일 200개가 넘는다고 한다. 이것을 뚝 잘라 10분의 1만 인정해도 20개다. 일상의 다른 영역들에서 내려지는 선택을 다 고려하면 쉽게 100개가 넘을 것이다. 여기에 들어가는 작은 에너지를 모두 합치면 태산처럼 클지도 모르겠다.

굳이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자잘한 의사 결정들에 온종일 지속해서 에너지가 투입되고 있다면 좀 억울하지 않을까? 차라리 그 시간에 눈을 감고 음악을 듣거나 멍하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한숨 돌리면 어떨까? 선택의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자신의 모습을 포착해 보자. 그리고 질문을 던져 보자. ‘이 고민을 꼭 해야 하나?’ 중요한 결정이 아니라면 ‘결정하지 않는 방법’을 찾아보자. 내가 아닌 남이 결정하게 해도 되고 하나의 선택을 반복할 수도 있다. 결정 피로에서 벗어나서 의미 있는 일에 집중한다면 원하는 목표에 한 걸음 더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 필자는 연세대학교 객원교수, 심리과학이노베이션연구소 전문연구원이다. 스탠퍼드대에서 통계학(석사)을, 연세대에서 심리학(박사·학사)을 전공했다. SK텔레콤 매니저, 삼성전자 책임연구원, 아메리카 온라인(AOL) 수석 QA 엔지니어, 넷스케이프(Netscape) QA 엔지니어를 역임했다. 유튜브 ‘한입심리학’ 채널을 운영하고 있다.

1563호 (2020.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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