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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 호적수(19) 조익과 최명길] 조선시대 ‘부동산세’로 대립한 절친 라이벌 

 

예법·세제·외교 등에서 첨예한 갈등… 존중으로 합의와 협치 일궈

▎조익과 최명길은 청나라와의 화친에서도 대립했다. 영화 ‘남한산성’의 한 장면. / 사진:CJ E&M
인조 시대를 대표하는 두 재상, 조익(趙翼, 1579~1655)과 최명길(崔鳴吉, 1586~1647)은 자주 충돌했다. 우선 인조가 자신의 생부인 정원대원군과 생모 계운궁을 어떻게 대우할 것이냐를 두고서다. 인조가 선조의 후계자가 되었으므로, 왕통의 측면에서 선조와 인조는 부자관계다(중간의 광해군은 폐위되었으므로 빠진다). 예법에는 다른 사람의 대를 이으면 자신의 생부·생모는 숙부·숙모로 모셔야 한다고 되어 있다. 선조가 비록 인조의 할아버지이지만 법적으로는 아버지인 셈이고, 따라서 생부 정원대원군은 숙부로 불러야 하는 것이다.

왕가에선 ‘호부호형’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문제가 있다. 이 예법은 다른 사람의 양자가 되었을 때 적용하는 준칙인데, 그 다른 사람이 할아버지인 경우는 상정하지 않았다. 일반 사가에서는 아버지가 할아버지보다 먼저 죽더라도 손자가 할아버지의 대를 잇지는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왕실에서 ‘잇는다’는 것은 ‘왕위 승계’를 의미한다. 죽은 아버지를 왕으로 추존하여 둘 사이를 채우지 않는 한, 할아버지가 아버지가 되고 손자가 아들이 된다.

이렇게 되면 할아버지의 아들이자 나의 아버지인 존재가 사라지며, 할아버지와 생부가 형제가 되니(할아버지가 아버지, 생부가 숙부가 되므로) 천륜에 어긋난다. 따라서 최명길은 할아버지의 후사가 된 경우에는 생부를 아버지로 받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대해 조익은 보통 사람이라면 그 말이 옳겠지만, 왕실은 법도가 우선이라고 반박했다. 조익은 최명길이 공적인 의리(義理)에 사적인 관계를 개입시킨다며 비판한다.

다음으로 국가가 추진할 우선정책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당시 조선은 전쟁으로 인한 토지 황폐화와 인구감소, 계속되는 천재지변과 전염병 등으로 인해 국가의 세수입이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전후복구와 국방력 강화를 위한 재원이 필요하면서 나라의 재정은 위기에 봉착했다. 백성들도 개인의 생활환경이 매우 열악해졌을 뿐만 아니라, 세역(稅役) 부담이 커지면서 큰 고통을 겪었다.

이에 조정의 논의는 어떻게 하면 전체 세원을 늘리면서도 백성의 세 부담을 줄여줄 수 있을지에 맞춰진다. 최명길이 전국적으로 산출 가능한 토지의 결수를 측정하는 양전(量田)사업을 시급히 실시하자고 주장한 것은 그래서다.

양전은 세정(稅政)을 투명하게 하고 공정한 ‘근거과세(documentary taxation)’가 이루어지도록 한다는 점에서 백성의 삶을 안정시킬 수 있는 정책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누락된 인원과 토지를 찾는다는 것은 결국 세원을 늘리겠다는 뜻이다. 최명길이 “양전은 백성에게 세금을 걷어 위로 보태주거나 나라를 부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단지 백성의 부역을 고르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말하긴 하지만, 신규 과세대상(기존에 누락된 토지, 개간한 토지)이 된 백성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조익은 “근래에 나라에 일이 많아 백성에게 가해지는 부담이 극심해지고 있는데, 이러한 때에 토지를 측량해서 누락된 토지를 찾아내 세금을 올린다면, 지금 백성의 힘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을 것”이라며 최명길의 주장에 반대했다. 예컨대 갖은 노력을 다해 황무지를 개간하여 조그만 땅을 마련했다고 하자. 이제 겨우 입에 풀칠할 수준이 되었는데 여기에 세금을 문다면 가뜩이나 힘든 삶을 살아가는 백성들이 견딜 수가 없다는 것이다. 조익은 양전 대신, 공납부터 개선하여 민생을 안정시켜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데 두 사람의 충돌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병자호란 당시 최명길이 청나라와 화친을 주장하자, 조익은 “결단코 불가”라며 반대했다. 그는 “(전쟁에 져서) 우리가 불행히 화를 당한다 하더라도 곧바로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는 이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뜻을 굽히고 저들의 신하가 되면, 당장 씻기 어려운 치욕을 당하게 될 뿐 아니라, 그 뒤로도 헤아릴 수 없는 환란이 이어져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된다”고 하였다.

최명길이 “저라고 오랑캐와 화친하자고 주장하는 일이 즐겁겠느냐? 제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나라의 존망이 위태로우니 잠시 시간을 벌어 병화를 늦추고 안으로는 힘을 키울 계책을 도모하자는 것”, “무릇 신하된 자는 나의 임금을 편안케 하고 백성을 지키는 일이 우선이다. 척화의 주장이 고귀하다는 것을 제가 어찌 모르겠냐만 신하로서 작금의 정세를 살피지 않는다면 장차 종묘사직은 어디에 둔단 말인가?”라고 설득했지만 조익은 듣지 않았다.

조익은 최명길의 주장이 나라의 기강과 정신의 근간을 흔든다고 우려했고, 최명길은 조익의 생각이 “망국의 화를 재촉하는 것으로 정치를 담당한 재상이 절대 시행할 바가 못된다”라고 보았다.

소개한 사례 외에도 두 사람은 많은 사안에서 정치적 견해를 달리했다. 단순히 반대쪽에 선 것이 아니라 첨예하게 부딪혔고, 때로는 면전에서 격한 논쟁을 벌이며 얼굴을 붉히기도 했다. 한쪽이 부족했다면 금방 승패가 가려졌겠지만 인품이나 정치력, 학문능력에서 어느 하나 빠질 것이 없었다. 조익과 최명길 모두 우계 성혼과 사계 김장생의 학통을 이은 서인 주류의 적자이기도 했다. 서로가 서로에게 호적수라 불릴 만한 상대였다.

정치적으로 충돌했지만 서로 존중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사적으로 두 사람이 절친했다는 점이다. 최명길은 조익에게 이렇게 말한다. “제가 친한 사람이 적지 않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마음이 서로 통하는 사람을 따지면 장유, 이시백 두 벗과 그리고 형뿐.” 조익도 최명길이 죽자 “평생의 벗으로 골육인 형제와 다를 바 없다”고 추모했다.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 “서로 견해에 차이가 있어 합치되지 않으면 토론하길 멈추지 않았다”는 설명도 남겼다.

비록 생각이 다르고, 서로의 주장을 비판하는 등 종종 불편한 상황에 놓이기도 했지만, 언제나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했다는 것이다. 내 주장만이 옳다고 고집하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했고,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노력했다는 것이다. 덕분에 두 사람은 정치적으로 충돌하면서도 우정을 유지할 수 있었고, 서로 다른 입장에 서더라도 언제든 힘을 합칠 수가 있었다.

무릇 적수나 라이벌이라고 해서 그와 친구가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다. 또한, 친구라고 해서 생각이 다 같아야 할 이유도 없다. 유명한 친구 오성과 한음도 붕당으로는 서인과 북인으로 다르지 않았는가. 서로 다른 길을 걷고, 다른 주장을 펼치더라도 상대방을 존중할 수 있다면,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데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겠지’하며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면, 그리고 그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면, 우리는 친구와도 건강하게 경쟁할 수 있고, 적수와도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81호 (2021.0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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