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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웅의 무역이 바꾼 세계사(44) 역사 속의 리더들은 무엇을 공부했나? 

 

정부가 의대 정원을 3000명에서 2000명 더 늘린다고 발표하자 의사들이 집단행동을 시작했다. 다른 한편으로 우수한 이공계 학생들이 지원하는 연세대 반도체학과에서 합격생 220%가 의대에 간다고 등록을 포기했다.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인 한국의 의대 쏠림 현상은 현격한 소득격차와 경제적인 안정성 때문이다. 학생들 입장에서 안정적으로 돈 많이 버는 의대를 가는 것이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이겠지만, 공대 출신 기업인으로서 의대 쏠림 현상은 씁쓸하기만 하다.

▎김정웅 대표가 ‘저명한 리더들은 어떤 공부를 했을까’를 주제로 chatGPT를 통해 구현한 그림.
우리나라는 한국전쟁 이후 눈부시게 성장했지만 내재적인 모순 또한 많이 쌓였다. 저출산, 고령화, 저성장, 양극화 등 수많은 문제점도 하나하나 쌓여왔다. 그중 하나가 ‘의대 쏠림 현상’이다. 중국, 일본, 대만, 싱가포르, 인도, 미국, 유럽 어디를 봐도 한국처럼 도가 넘는 의대 쏠림 현상을 볼 수 없다. 미국 같은 선진국들도 의사와 판사, 검사가 사회 지도층을 이루고 있지만, 과학기술인, 기업인들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오히려 학부 과정에서 과학기술을 공부한 인재들이 더 우대를 받는다. 한국 대형 제조기업의 임원들과 이야기해보면 신입사원들의 업무 능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데, 주요한 원인이 우수한 인재들이 공대에 오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제는 유수 대학 졸업생도 기업이 원하는 수준에 미치지 못한다는 평이 많다.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제조업이 의대 쏠림 현상으로 미래가 어두워지고 있다.

조선 총독부는 조선 사람들이 과학기술을 배우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판사와 의사는 조선인들을 써도 과학기술과 관련된 중요한 자리는 일본인들이 독점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고 이공계 졸업생이 필요해지자 마지못해 1941년에야 경성제대 이공학부를 열었다. 일제강점기에 배출된 이공계 박사 학위자는 10여 명에 불과했다. 일본 사무라이들과 중국 신진사대부들이 서구 해양세력에 맞서 사회개혁과 과학진흥을 동시에 추구했지만, 식민지 조선의 상류층 자제들은 철저하게 법학과 문학을 공부했다.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해 1926년 경성제국대학에서 의과대학과 법과대학을 시작했다. 조선시대까지 중인계급이었던 의사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근대의학으로 무장하여 상류층에 진입했다. 과학기술은 법학, 의학과 같이 신분 상승의 기회는 없지만 안정적인 직업을 갖는 데 만족하는 중인들의 학문이었다. 미국으로 유학 갔던 조선의 과학기술자들은 암울한 식민지 조국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조선에서 이공계 교육을 받은 사람은 2300명에 불과했다. 일본, 중국, 인도에서는 서구 해양세력과 부딪치고, 지배당하며 과학기술에 대한 뼈저린 아픔과 성찰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미군정시대, 한국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법학과 의학이 주도하는 남한에서는 과학기술이 설 자리를 제대로 찾지 못했다. 그리고 일제 식민통치의 잔재들은 21세기 한국까지 이어지고 있다.

인류 역사를 돌아보면 시대마다 엘리트들은 지배계층으로서 필요한 기술을 공부했다. 로마 귀족들은 그리스 철학과 문학, 수학, 천문학을 공부했다. 중세 유럽의 귀족들은 종교, 철학, 법률 등을 주로 배웠으며, 군사전략과 기사도도 배웠다. 중국, 한반도의 귀족들은 농경사회 통치를 위하여 공자의 가르침을 바탕으로 한 유교를 공부했다. 이슬람 제국의 지배층은 쿠란을 깊이 있게 공부하면서도 종교, 철학, 법률, 역사, 문학, 예술, 과학 등을 폭넓게 공부했다. 상업이 발달했으므로 다양한 외국어 공부도 중요했다. 농경정주문명의 대척점에 있던 유목 문명의 유목민들은 가혹한 환경에서 살아남아야 했기에 생존 기술이 중요했다. 유목사회에서는 말 잘 타는 남자가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더불어 활쏘기 등 사냥과 채집 기술, 살아가는 환경에 대한 깊은 이해 등이 중요했다.

유라시아 패권의 역사는 도도한 시대적 조류가 있기도 하지만, 선진 과학기술을 가진 집단이 후진적인 집단을 지배하는 역사라고도 할 수 있다. 마제석기, 청동기, 철기 등으로 소재가 바뀔 때, 말 타는 기술이 바뀔 때, 동력을 전달하는 기술이 바뀔 때 역사도 같이 바뀌었다.

21세기 한국의 생존 기술


▎1946년 경성제대 의학부와 경성의전을 통합해 설립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부속병원. / 사진:중앙DB
‘각 시대가 처한 환경에서 그 시대에 적합한 생존 기술로 무엇을 채택하느냐’가 그 집단의 흥망성쇠를 좌우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우리 한국의 생존 기술은 무엇일까? 분명한 것은 21세기는 의학과 법학이 주도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 대만, 인도를 보면 이공계 출신 지도자들이 즐비하지만, 한국은 법대 출신 아니면 대통령 하기 힘든 나라이다. 과거를 법률과 판례로 공부하는 법학으로 미래를 설계하기는 만만치 않을 것이다. 우리나라 정치권에서는 과학기술인, 기업가 출신 정치인들도 찾아보기 어렵다.

미래는 치열한 경쟁 속에서 체득한 현장 경험에서 나온다. 실리콘밸리에서는 세상을 바꾸려는 젊음의 패기와 역동성을 느낄 수 있다. 미국적 합리주의는 실적 앞에서 냉정하고 가혹한 잣대를 들이댄다. 아메리칸드림이라는 단어에는 미국의 끊임없는 혁신과 도전의 역사가 보인다. 전 세계에서 이공계 최고의 인재들은 미국으로 향한다. 중국 공산당 관료들의 치열한 내부경쟁과 현장 경험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중국 경제의 무서운 성장은 젊고 똑똑한 이공계 인재들이 매년 수백만 명씩 배출된 덕분이다. 중국의 젊은 인재들은 공무원이나 의사보다 사업가를 꿈꾼다. 대만에서 최고의 이공계 인재들은 TSMC로 모였고, 그 인재들이 지금의 파운드리 최고 기업 TSMC를 만들어냈다. 대만의 세계적인 팹리스 미디어텍이 거침없이 성장할 때, 한국의 팹리스들은 40대 이하 젊은 청년 중에 똑똑한 인재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요즘 삼성, SK, LG의 임원들은 인재난을 호소한다. 한국의 중소기업 중에는 세계를 향해 나가려는 회사는 별로 없고 어떻게 하면 삼성, 현대, SK, LG의 하도급 회사가 돼서 사업을 키울지 하는 생각들이 가득하다. 2000년 전후의 인터넷 버블이 오히려 그리워지기까지 한다. 젊었을 때 어려운 자격증을 따서 평생을 누릴 수 있는 기득권을 얻기에는 한국과 일본만한 나라가 없어 보인다. 고시, 자격증, 명문대 입시는 기나긴 인생 공부의 한 과정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3억 개 일자리를 대체할 것이라고 한다. 미국에서는 이미 회계사 일자리가 크게 줄고 있다. 율사와 의사는 인공지능으로 대체하기 쉬운 일자리 중 하나라고 한다. 율사와 의사는 해방 이후 기득권을 강화해오면서 한국 사회에서 가장 견고하게 자기 영역을 구축했다. 지금은 어려운 자격증 하나를 따면 평생이 보장되는 직업이지만, 앞으로 10년 뒤 20년 뒤에도 지금과 같은 아성을 구축하고 있을지는 모르겠다.

요즘 언론은 의대 정원 증원 이슈로 도배되고 있지만, ‘의대 쏠림’이라는 동전의 뒷면은 ‘과학기술 경시’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미래를 위해서는 의대생을 늘려서 의료서비스를 개선하는 것보다 과학기술을 발전시키는 게 중요하고 커다란 ‘국가 어젠다’가 되어야 한다. 생산성이 정체된 현실 속에서 형이상학적인 논쟁은 제로섬 게임으로 귀결된다.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에서 중국의 과학기술이 턱밑까지 쫓아왔고 또 선두를 빼앗기고 있다. 의대 정원을 늘리는 정책도 중요하지만, 최고의 인재들이 과학기술을 공부하고 인생을 바칠 수 있는 사회 시스템을 만들어 나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아편전쟁이 일어나고 청나라의 정크선들이 영국 상선의 대포 앞에서 무참하게 침몰했던 1840년대, 1850년대에도 조선 사대부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공자 왈맹자 왈 하며 2500년 전의 농경계급사회에 만들어진 유교 경전을 읊어대고 있었다. 일본은 1853년 미국의 페리제독이 최신 증기선 전함을 이끌고 오자 바로 개항했고, 그 개항은 메이지유신으로 이어졌다. 메이지 시대에는 수많은 유학생이 유럽으로 건너가서 과학기술 등 다양한 분야를 공부했다. 이 유학생들은 일본의 근대화와 산업화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조선이 망했다. 세상이 바뀌면 바뀐 세상에 맞는 공부를 해야 한다. 똑똑한 학생이 과학자나 엔지니어가 되고 싶어 하는 나라가 돼야 이 나라에 미래가 있다.

지금 이 시대는 오픈AI의 샘 올트먼, 테슬라의 일론 머스크, 아마존의 제프 베이조스처럼 과학과 공학을 이해하며 인문학적 소양과 경영 마인드를 가진 통섭적 인재가 필요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조선시대 장원급제자처럼 국가가 내주는 문제의 정답을 잘 찾아내는 인재를 최고로 친다. 농경시대의 잔재를 정리하고 정보화 시대에 맞는 새로운 세계관으로 바뀌려면 앞으로 한 세대는 더 지나야 하는 것 아닌지 씁쓸하다.

※ 김정웅 - 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자 연세대학교 신소재공학과 겸임교수. 30여 년간 50여 개국 수백만 마일을 날아다니며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수십억 달러를 사고팔아 온 무역 일꾼이다. 매년 실크로드 현지답사와 연구를 통해 지난 5000여 년의 실크로드 유목민과 장사꾼들의 흥망성쇠를 공부하며 인류 역사의 추동력을 위대한 영웅과 황제, 선지자보다는 장사꾼의 입장에서 해석하고 있다. 2000년 서플러스글로벌을 설립해 기업 간 전자상거래 사업을 하다가 폐업 위기를 겪었지만 반도체 산업에 집중해 전화위복을 이뤄냈다. 지금까지 반도체 업계의 레거시 장비를 전 세계에 5만 대 넘게 판매하며 서플러스글로벌을 세계적인 강소기업으로 성장시켰다. 2015년 무역의 날 대통령상과 2021년 산업포장을 수상했다. 2012년에는 발달장애인 가족을 치유하고 지원하기 위하여 ‘함께웃는재단’을 설립하고 이사장을 맡아 Autism Expo를 개최하는 등 사회공헌에도 힘쓰고 있다.

202403호 (2024.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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