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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DJ가 신뢰한 기자’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 

“가까이 듣고 멀리 보겠다” 

김명식 남도일보 사회부장 msk7234@nate.com
언론인, 4선 국회의원, 전남지사 등 풍부하고 다양한 경험… 곧은 성품과 따뜻함 갖춘 인물, 내각 수장으로서 역할 기대

문재인 대통령이 첫 국무총리 후보자로 이낙연(65) 전 전남지사를 선택했다. 서울대 법대 출신인 그는 동아일보 논설위원, 4선 국회의원, 민주당 대변인, 국회 농림수산식품 위원회 위원장, 민주당 원내대표, 전남도지사 등 화려한 정치경력을 자랑한다. 국회의원 4번과 전남지사까지 5번의 선거에서 단 한 번도 고배를 마신 적이 없다. 그런 그가 문재인 정부 초대 국무총리,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것이다.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가 5월 10일 청와대 춘추관 브리핑룸에서 취재진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사진제공·청와대사진기자단
5월 12일 오전 전남도청 왕인실(王仁室)에서 이 국무총리후보자의 전남지사 퇴임식이 열렸다. 이 후보자는 국무총리직 수행을 위해 전남을 떠나는 자리에서 잠시 목이 메었다.

그는 퇴임사에서 “제가 어디에 있든, 전남을 변함없이 사랑하고 돕겠습니다”를 읽다, ‘전남’ 앞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으려 한동안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이 모습에 참석자 일부는 낮게 소리 내어 흐느꼈다.

왜 울음이 나왔을까. 전남도민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한 고향을 떠나야 하는 미안함 때문이었다. 이 후보자는 2014년 7월 낙후된 고향 전남을 “청년이 돌아오는 땅으로 만들겠다”며 4년 임기의 전남지사직을 시작했다.

퇴임식을 마치고 페이스북에 “‘어머니’ 얘기만 하려 해도 눈물이 나오는 것처럼, ‘전남’ 생각만 해도 목이 멥니다”라고 적은 것은 이 후보자의 당시 심정을 전해준다.

그에게 전남은 곧 어머니였다. 낳아주고, 길러준 그리고 세상이 어지러울 때 가야 할 길을 알려준 나침반이었다. 나라의 부름을 받았지만 전남지사직을 떠난다는 건, 어찌 보면 홀로 계신 어머니와 이별해야 하는 마음이었을 것이다.

“지름길을 모르겠거든 큰길로 가라”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가 이낙연 대변인 등과 방송녹화 원고를 검토하고 있다.
이 후보자는 전남 영광군 법성면 용덕리의 가난한 농부 집안에서 7남매 중 장남으로 성장했다. 위로 두 형과 누나가 있었지만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났다. 가난했지만 어머니가 농사일과 채소 장사를 하며 이 후보자를 뒷바라지한 덕분에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다. 이 후보자는 영광 삼덕초-광주북중-광주제일고-서울대 법대를 졸업하고 1979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21년간 재직했다.

그는 정치부 기자 시절 동교동계를 담당하다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인연을 맺는다. 김 전 대통령이 1987년 6·29 선언으로 사면복권되자 밀착취재를 담당했다. ‘최대한 가까이 붙으라’는 회사의 지시에 24시간 함께했다. 심지어 김 전 대통령이 차에 오르기도 전에 이 후보자가 먼저 타 있곤 했다.

김 전 대통령은 DJ-YS 후보단일화 실패 배경, 대선 패배 예상 등 차 안에서 모든 얘기를 해줬다. 그만큼 이 후보자를 신뢰했다. 김 전 대통령은 이 후보자의 팩트 중심 보도와 분석력을 높이 샀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은 1989년부터 총선 출마를 권유했다. 이 후보자는 계속 고사하다 2000년 16대 총선에 고향인 전남 영광에서 출마해 당선됐고 이후 세 차례 더 배지를 달았다.

정계입문 후 이 후보자는 탄탄대로를 달렸다. 16대부터 19대까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계속 승리했다. 2004년 당시 민주당이 노무현 전 대통령의 탄핵에 참여했다가 총선에서 참패했을 때도 당선됐다. 19대 국회의원 재임 중 도전한 전남지사 자리도 거머쥐었다.

그는 ‘5선 대변인’이란 별명처럼 대변인으로 맹활약하며 주가를 올렸다. 간결하고 절제된 논평으로 ‘대변인 문화’를 새로 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 시절 논평을 모은 책 <이낙연의 낮은 목소리>는 훗날에도 여야 대변인실에서, 농식품위원장 시절의 축사 등을 모은 책 <농업은 죽지 않는다>는 지방의원 등에게 참고자료로 활용될 정도다.

대변인으로서 명성은 노무현 전 대통령 취임사에서 잘 나타난다. 노 전 대통령은 취임을 앞두고 취임사 준비위원회에서 만든 취임사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결국 취임식을 이틀 앞두고 당선인 대변인이었던 이 후보자에게 취임사를 손보게 했다. 노 전 대통령은 이 후보자가 쓴 취임사를 극찬하며 토씨 하나 고치지 않았다고 한다. 이 후보자의 문장력과 통찰력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2002년 민주당 선대위 대변인 시절 “지름길을 모르거든 큰길로 가라. 큰길을 모르겠거든 직진하라. 그것도 어렵거든 멈춰 서서 생각해 보라”는 당내 대통령후보단일화추진협의회 소속 의원들을 향한 논평은 지금도 인용되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핵심을 파고든 메시지란 평가를 받았다.

이 후보자는 국회의원 시절엔 합리적이고 충실한 의정활동으로 여야를 넘어 호평을 받았다. 적을 만들지 않는 유연한 성품을 갖고 있어 ‘젠틀맨’으로 불렸다. ‘국회를 빛낸 바른언어상’ 가운데 ‘으뜸상’의 초대 수상자 선정이 말해주듯 기품 있는 말과 글을 사용했다. 상냥하면서 온화한 미소를 잃지 않아 대인관계가 좋았다.

재치와 유머감각도 남다르다. 2005년 한 TV 프로그램의 영향으로 그를 포함해 의원 100여 명이 장기기증을 서약했다. 이 후보자는 이때 “정치인의 장기도 받아주느냐”고 말해 화제가 됐다. ‘정치가 썩었다’는 인식을 비틀어 던진 유머였다. 이 한마디가 이날 서약식을 상징하는 ‘어록’이 됐다.

노 전 대통령 당선인 시절 대변인을 맡았지만 친문(친문재인)은 아니다. 2002년 대선 직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이 분당할 때 이 후보자는 민주당에 남았다. 이후 친노(친노무현) 인사들과 여러 번 정치적으로 충돌하기도 했다.

일 잘하는 국회의원, 일 잘하는 도백(道伯)


▎2001년 새천년민주당의 이낙연 대변인, 박종우 정책위의장, 이협 사무총장, 송석찬 지방자치위원장(왼쪽부터)이 손을 맞잡은 채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손학규 전 국민의당 선거대책위원장이 민주당 대표를 지낼 때 사무총장을 맡아 ‘손학규계’로 분류되기도 했지만 계파색이 옅은 인물로 꼽힌다. 문 대통령이 2012년 18대 대선에 출마했을 때 공동선거대책위원장을 맡은 인연이 있다.

그는 대표적인 개헌론자다. 18대 국회의원 시절 미래한국 헌법연구회를 만들어 개헌 논의에 앞장섰다. 국민통합과 개혁을 내세운 문 대통령이 이 후보자를 초대 국무총리로 지명한 배경을 짐작하게 한다.

이 후보자는 지일(知日)파 정치인이다. 동아일보 기자 시절 도쿄특파원을 지냈고 국회 한일의원연맹 수석부회장이었다. 이 후보자가 총리로 지명되자 일본 언론이 “지일파 인사가 총리 후보자로 지명됐다”면서 환영했다. 위안부 문제로 꼬여 있는 한·일관계를 정상화시킬 수 있는 기대감의 표시였다.

그는 정치권 안팎에서 자신과 주변의 관리에 철저하다는 평을 듣는다. 국무총리 후보로 지명된 직후 어깨 탈골 수술에 따른 아들 병역 면제가 불거지자 ‘아들을 군대 보내게 해달라’는 탄원서를 공개한 게 대표적인 예다. 아들 결혼식 청첩장과 정치후원금 안내장 등 지역주민들에게 부담이 될 만한 행위도 자제했다. 아들 결혼식을 뒤늦게 접한 가까운 친구들이 “아무리 그래도 우리한테까지 이럴 수 있느냐”며 서운함을 표출하기도 했다.

이 후보자가 전남지사에 취임하자 공직사회 반응은 교차했다. 일 욕심 많은 사람이 도백을 맡으니 전남이 한 단계 더 도약할 것이라는 기대감과 함께 완벽을 추구하는 업무 스타일로 공직사회가 경직되지 않을까 하는 우려가 나왔다.


▎이낙연 전남지사가 보성군 득량면 예당리 들녘에서 콤바인을 이용해 벼를 수확하고 있다. / 사진제공·전남도
그는 일 잘하는 국회의원이었다. 성실한 의정 활동으로 NGO 모니터단으로부터 10차례나 국정감사 우수의원에 뽑혔다. 2009년 국회 농식품위원장 시절에는 이례적으로 ‘최우수위원장’ 상을 받았다. 예리하게 지적하면서도 대안을 제시하는 의원이라며 공기업 직원들이 ‘엄지척’ 한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이 후보자의 의정활동은 기자 생활의 경험이 많은 도움을 줬다. 기자 특유의 ‘현장 중심주의’를 앞세워 공무원들을 압도했다. 그가 노숙자·KTX·임대주택 체험, 원전주변 마을 생활상 등을 7년간 연속 르포를 한 건 유명하다.

현장 중시는 전남지사 재임 시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국회의원 시절부터 전남을 속속 누빈 경험을 바탕으로 준비된 도지사의 면모를 과시했다. 브랜드 시책으로 제시한 ‘가고 싶은 섬’과 ‘숲 속의 전남’은 전남의 자산을 최대한 활용해 관광자원화 하면서 실제 거주하는 주민들의 삶의 질을 높인다는 측면에서 긍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100원 택시’는 전국적인 화제가 됐다. 100원 택시는 오지에 사는 전남 주민들이 택시를 부르면 그 마을에서 가장 가까운 버스정류장까지 100원을 받고 택시를 운행한 뒤 차액을 자치단체에서 지불하는 제도다. 2015년부터 본격적으로 운행돼 농어촌 교통복지의 모범사례가 됐다. 문 대통령의 대선 공약에 포함되기도 했다.

일자리 창출 면에서도 좋은 성과를 내 고용노동부로부터 지난해 ‘일자리종합대상’을 수상했다. 다른 시도보다 산업적으로 뒤처져 있지만 일자리 창출을 도정 최우선 순위에 두고 매진한 결과였다. 문 대통령의 취임 첫날 일자리위원회 설치 지시도 같은 맥락이다.

공공산후조리원, 작은 영화관 등 전남 현실에 맞는 복지시책들도 빼놓을 수 없다. ‘2016 다출산 대상’과 9년 연속 노사평화 최우수상 또는 우수상 수상이 증명한다. 일 잘하는 명성이 국회의원부터 전남지사까지 이어진 셈이다.

“이 주사는 그만, 통 큰 리더십 발휘해달라”


▎2015년 당에서 주최한 행사에 참석한 이낙연 전남지사. 왼쪽부터 이 지사, 윤장현 광주시장, 이시종 충북지사(얼굴 옆면),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 박지원 의원, 우윤근 원내대표.
이 후보자는 꼼꼼하고 세심한 업무 스타일 때문에 전남도 공무원들 사이에서 ‘이 주사’로 불린다. ‘6급 공무원 같다’는 의미다. 국무총리로 임명되면 장관들이 시달릴 것이라는 말이 벌써부터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후보자가 전남지사로 취임하던 3년 전에도 공직사회 일각에서 같은 전망이 나왔다.

그는 완벽주의를 추구한다. 전남지사 시절 그는 기자 출신답게 보도자료 문구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썼다. 자신의 발언이 조금이라도 본의와 다르게 표현되면 팩트에 충실하게 써달라고 요구했다. F1 대회의 지속 여부와 관련한 전남도의 원칙에 대한 일부 언론 보도에 자신의 코멘트가 ‘재정 최소화’로 나가자 ‘재정부담 최소화’라고 바로잡아 달라고 한 게 대표적이다. 도정이 정확하게 전달될 수 있도록 보도자료도 직접 챙겼다.

깐깐한 업무 스타일로 공직자들을 움츠리게 한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전남도 공무원들이 지사 집무실에 들어가는 것을 꺼린다는 말이 들렸다. 칭찬보다는 지적이 많다 보니 자연스럽게 피하게 된다는 것이다. 또 이 후보자의 좌우명인 ‘근청원견(近聽遠見·가까이 듣고 멀리 본다)’을 빗대 ‘지나치게 가까이 듣고 가깝게 본다’는 볼멘소리까지 있었다. 이런 까닭에 국무총리 후보 지명 소식이 전해지자 전남도청 안팎에서는 ‘통 큰 리더십’이 요구됐다.

전남도를 오랫동안 출입한 한 언론인은 “이 후보자가 일 잘하고 열심히 한다는 건 다들 인정한다. ‘끝내준다’는 평가까지 나온다”면서 “하지만 국무총리는 전남지사와는 체급이 완전히 다르다. ‘6급 주사’ 스타일은 공직사회를 위축시킬 수 있다. 공무원 스스로 창의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보다 선 굵은 리더십을 보여줄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 후보자는 업무적으로 매우 깐깐하지만 일과 후엔 직원이나 기자들과 격의 없이 막걸리를 마시며 격의 없이 소통하는 것을 즐긴다. 전남도 공무원들 사이에서 이 후보자의 별명은 ‘막걸리 도지사’였다. 앉은 자리에서 막걸리 5병을 거뜬히 들이킬 정도로 애주가다.

그는 전남도청 직원들과 올 2월부터 매월 한 차례씩 ‘섞어 번개팅’을 가졌다. 부서와 직급을 ‘섞어’ 몇 시간 전에 ‘번개’로 만나는 도청 직원들과 도지사가 함께하는 막걸리 자리다. 가족과 일상의 소소한 이야기를 편하게 하는 자리로 정착시켜 나가기 위해 이 후보자가 지은 이름이다. 또 전남도청 공무원노조 지도부와 종종 도지사 공관에서 막걸리 간담회를 갖기도 했다.

그가 전남도청 직원들과 술자리에서 막걸리를 고집하는 이유는 ‘쌀 소비 증대’를 위해서다. 전남이 농업 종사자가 많은 지역임을 고려한 선택이다. 이 후보자의 막걸리 홍보 논리도 독특하다. 첫째 많이 마시지 않아도 배부르다. 둘째 2차를 가지 않아도 된다. 셋째 폭탄주를 마시고 싸우는 경우는 봤어도 막걸리 마시고 싸우는 경우는 거의 못 봤다며 예찬론을 편다.

막걸리 소통, 국밥 화합


▎1.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는 꼼꼼한 업무 추진으로 정평이 나 있다. 이 후보자의 바지 뒷주머니에 꽂혀 있는 수첩이 눈에 띈다. / 2. 이낙연 국무총리 후보자가 5월 13일 목포신항을 찾아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들을 위로하고 있다. / 사진제공·(왼쪽)중앙포토, (오른쪽)뉴시스
그는 서민의 술인 막걸리 스타일처럼 단골 순대 국밥집 등을 찾는다. 서울 출장에서 KTX를 타고 늦은 밤 혼자 되돌아올 때 기자 등 지인들에게 ‘번개 전화’를 해 광주 송정역 앞 단골 순대 국밥집에서 막걸리를 마시며 소통을 하곤 했다.

막걸리 사랑은 국무총리가 된 뒤로도 이어질 전망이다. 그는 후보자 지명 이후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정책의 접점은 찾아서 키우고 의견 차가 있는 것은 뒤로 미루는 지혜를 발휘하겠다”면서 “야당과는 막걸리라도 마셔가며 소통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총리가 되면) 막걸리를 같이 먹을 상대가 늘어나서 걱정”이라면서도 “그래도 체력이 허락하는 한 저수지 몇 개(양 만큼은) 마셔야지”라며 의욕도 피력했다.

이 후보자의 소통 의지는 세월호 미수습자 가족과의 작별 인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그는 전남지사 퇴임식 다음날인 5월 13일 목포 신항에서 미수습자 가족을 만나 “오후에 상경한다. 이삿짐을 싸놓고 가족들께 마지막은 아니지만 작별 인사를 드리러 왔다”면서 “앞으로 현장과 해수부, 가족들과 해수부가 서로간 어긋난 일이 없도록 중간에서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또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면 언제든 전화해달라”며 휴대전화 번호가 적힌 명함을 건넸다.

세월호에 대한 그의 관심은 남달랐다. 세월호가 목포신항에 거치된 한 달여 동안 10여 차례 이상 다녀갔다. 해양수산부 직원보다 더 자주 갔다는 말이 나올 만큼 관심을 보였다. 어떤 날은 수행원과 단출하게 일정을 통보하지 않고 오면서 아무도 없는 미수습자 가족들의 숙소만 둘러봤다.

2014년 4월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당시에도 전남도지사로서 현장에 달려가 수습에 나섰다. 그 동안 추모식 등 공식행사는 물론 설과 추석에는 어김없이 팽목항을 찾아가 가족들과 만났다.

이 후보자는 상경 전에 화재 피해를 입은 여수 수산시장도 찾았다. 수산시장 방문은 퇴임식 후이기는 하지만 상경 전까지 전남도민에게 인사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는 설 대목을 앞둔 지난 1월 15일 여수 수산시장에서 큰불이 나자 매일같이 현장을 찾아 날짜별로 복구상황을 소개하고 설 전 임시판매장을 개장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서민을 향한 행보는 어린 시절 체득한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7남매의 장남으로 성장한 그는 가난한 가정 형편에도 다른 형제들과 달리 중학교부터 대학까지 광주와 서울에서 유학했다. 부모가 집안 살림을 사실상 유학비에 집중했기에 가능했다. 이 후보자는 동생들과 집에 항상 미안한 마음이었다. 동생을 비롯한 가족을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도 커졌다. 대학 재학 중 목표했던 고시 합격의 뜻을 이루지 못하자 군에 입대하고, 제대 후에는 고시 공부를 이어가는 대신 곧장 직장을 잡은 것도 그 까닭이었다.

이 후보자가 전남지사를 퇴임하면서 “언제나 국민과 역사를 생각하는 총리, 특히 서민의 사랑을 받는 총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며 “나라다운 나라,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을 만드는 데 신명을 바쳐 일하겠다”고 강조한 건 자신이 경험한 서민의 아픔을 대변한 것으로 보인다.

이 후보자의 고향 마을 선배인 부길준 씨는 “이 후보자는 어려운 형편에도 자신을 위해 희생하는 부모와 동생들을 위한 책임감이 남달랐다”면서 “서민복지를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리더십은 어려웠던 시절의 기억에서 비롯되지 않았나 싶다”고 말했다.

국민을 편안하게 해주는 ‘명재상’ 기대


▎이낙연 새정치민주연합 전남지사 후보가 2014년 6월 4일 지방선거에서 당선이 유력시되자 부인 김숙희 씨와 함께 기뻐하고 있다.
이 후보자는 인연을 소중히 여긴다. 휴대전화에 저장된 지인만 1만5000명에 달한다.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이용해 인맥관리를 잘하는 것으로 소문난 ‘엄지족’이다.

이 후보자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은 6학년 때 담임 교사인 박태중(작고) 씨다. 박씨는 첫 부임지인 영광 삼덕초에서 이 후보자의 영민함을 알고 중학교를 광주로 유학시켜 지금의 국무총리 후보로서 발판을 마련해준 분이었다. 당시 이 후보자의 부모는 어려운 살림살이와 이 후보자 동생이 6명이나 되는 처지를 들어 광주 유학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박씨는 부모를 설득해 광주북중에 진학시켰고, 이를 계기로 이 후보자는 광주제일고를 거쳐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다.

이 후보자는 초등학교 때 공부를 가장 잘했지만 회초리도 가장 많이 맞았다고 한다. 박씨가 “광주에서 중학교에 다니려면 공부를 더 잘해야 한다”며 2주마다 시험을 치러 성적이 떨어지면 회초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이 후보자는 정치인이 된 뒤 박씨를 찾아 후원회장으로 모셨다. 돈이 많거나 모금을 잘해서가 아니었다. 국회의원으로 성장하도록 만들어준 이 후보자 인생의 ‘원점’이었기 때문이었다. 이 후보자는 박씨가 세상을 뜬 이후 상당 기간 후원회장을 공석으로 두기도 했다.

이 후보자는 정계 입문 후 15년 넘게 같은 보좌관과 일할 정도로 의리파이다. 또 정계 입문 후 몇 차례 큰 소용돌이에도 당을 떠나지 않았다. 어머니의 가르침이 컸다. 2003년 당시 신당이었던 열린우리당행을 택하지 않았던 건 ‘어머니의 만류’ 때문이었다.

이 후보자는 2007년 형제들과 함께 쓴 <어머니에 관한 추억>이라는 책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민주당을 버리고 신당(열린우리당)을 만들었을 때 노 대통령이 두세 번쯤 사람을 보내 신당 동참을 권유했고 장관직 얘기도 있었다. 당시 분당(分黨)은 옳지 않다는 생각을 기본으로 가지고 있었지만 그래도 고민했었다”며 “그 무렵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고 술회했다. 어머니는 “사람이 그러면 못 쓴다”며 탈당을 만류했다고 한다.

이 후보자의 어머니는 야당 정치인을 도왔던 이 후보자 아버지가 5공 출범 시절 여당인 민정당행을 권유를 받았을 때도 “자식들을 지조 없는 사람의 자식으로 만드는 것은 못 참는다”며 말렸다.

길게는 60년 이상 짧게는 3년 정도 이 후보자를 알고 지냈던 광주·전남 지역민들은 이 후보자가 내각의 수장으로서 역할을 잘해줄 것으로 믿고 있다. 언론인으로 풍부한 경륜을 지녔을 뿐 아니라 정치인 시절에는 여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전남지사 시절 남다른 서민 정책을 고려하면 ‘넉넉한 총리 후보’라고 평가한다. 이 후보자가 본인은 물론 가족과 주변을 엄격하게 관리해온 점을 들어 큰 흠결이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 후보자의 중·고교 동창인 허정 광주 에덴병원장은 “50년 넘게 지켜본 이 후보자는 곧은 성품과 따뜻함을 갖고 있는 인물”이라며 “대통령을 잘 보필해 국가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국민들을 편안하게 해주는 명재상이 될 것으로 믿는다”고 전했다.

전남도청의 한 공무원은 “4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도백까지 역임해 정치와 행정 영역에 대한 경륜을 갖춰 국정을 이끌어 가는 데 최적임자로 생각된다”며 “도정 추진에 있어서는 엄격하면서도 과단성 있는 모습과 함께 인간적인 모습을 모두 갖춰 총리를 맡아서도 훌륭한 성과를 이뤄낼 것”이라고 기대했다.

- 김명식 남도일보 사회부장 msk7234@nate.com

201706호 (2017.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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