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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지르포] 반환 20주년 맞은 홍콩의 ‘반중(反中) 민심’ 

“중국화 갈수록 가속… 일국양제는 거짓말!”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언론·출판·표현의 자유와 사회·행정제도에 중국 당국의 통제 심화… 지난 20년간 중국인 100만여 명 이주해와 인적 중국화도 갈수록 가속화

▎1997년 7월 1일, 156년간의 영국 통치가 끝나고 중국에 반환된 홍콩의 주민들이 중국 오성홍기를 들고 나와 중국 인민해방군의 차량 행렬을 맞이하고 있다. 이 사진은 AP가 선정한 ‘20세기 100대 보도사진’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 사진:연합뉴스
홍콩 사람 가운데 한국인에게 가장 잘 알려진 인물은 누굴까? 청룽(成龍)과 저우룬파(周潤發), 아니 성룡과 주윤발이라고 대답하면 정답에 가까울 것이다. 한 사람은 무협과 코믹 액션으로, 또 한 사람은 카리스마 강한 홍콩 누아르로 전성기를 구가했던 배우다. 두 사람 모두 나이를 잊고 지금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지만 활동 공간이나 방식은 두 사람의 스타일 만큼이나 차이가 크다. 특히 중국에 대한 정치적 입장이 그렇다.

성룡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위원이다. 정협은 헌법이 규정한 정치자문기구로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와 함께 양회(兩會)로 통칭된다. 홍콩 역시 중국의 주권이 미치는 중국 영토의 일부분이기에 정협 대표가 할당되어 있는데 그중 한 명이 성룡이다. 매년 3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리는 양회 기간이 되면 그는 뭇 중국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몇 년 전 그의 아들이 마약 복용 혐의로 중국 당국에 체포됐다가도 중벌을 면한 것은 성룡의 지위가 작용한 결과가 아니냐는 추측이 나돌기도 했다. 아무튼 그는 홍콩과 베이징을 오가며 영화도 만들고 자신이 투자한 사업도 활발하게 하고 있다. 홍콩에서 태어난 성룡이지만 그에게 중국은 자랑스러운 조국이다.


▎성룡은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홍콩과 베이징을 오가며 영화와 투자사업도 활발히 한다. 반면 주윤발은 블랙리스트에 올라 중국 본토에선 활동할 수 없게 됐다.
반면 주윤발은 중국 본토에서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다. 중국 당국이 만든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다. 주윤발을 포함한 홍콩 배우·가수 47명이 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건 2014년 11월. ‘우산혁명’ 운동으로 불린 홍콩의 대규모 민주화 시위가 한창일 때였다. 당시 홍콩 대학생과 일반 시민은 물론 고교생까지 가세한 50만 명 이상의 군중이 홍콩 도심 대로와 정부청사 주변 광장을 점거하고 완벽한 보통선거 실시를 요구하는 민주화 시위를 벌였다. 1997년 영국의 홍콩 반환 이후 최대 규모였고 79일간 이어진 최장기 시위였다. 당시 주윤발은 각종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학생들의 민주화 운동에 지지를 선언했다. 홍콩 배우가 수입의 80%를 버는 중국 본토에서의 활동 금지는 큰 타격일 수밖에 없다. 그는 당시 한 인터뷰에서 “돈 좀 덜 벌면 된다”며 <영웅본색> 속의 마크처럼 ‘쿨’하게 말하며 지지 의사를 철회할 생각이 없음을 밝혔다. 반면 성룡은 “시위로 인한 손실이 막대하니, 학생들은 학교로 돌아갈 때”라는 입장을 표명했다. 성룡과 주윤발의 예에서 보듯 홍콩인들의 정치 성향을 가름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중국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느냐는 점이다.

성룡과 주윤발의 엇갈린 행보


▎지난해 상영된 영화 <십년>은 2025년 홍콩의 모습을 그린 저예산 독립영화다. <십년> 중 ‘본토단’의 한 장면. / 사진:예영준
이왕 영화 이야기로 시작한 김에 최근 홍콩에서 화제가 된 영화 한 편을 소개해볼까 한다. 지난해 상영된 <십년(Ten Years)>이란 영화는 제목에서 보듯 10년 후, 즉 2025년의 홍콩이 어떤 모습으로 변했을까를 그린 작품이다. 다섯 개의 독립적인 단편으로 구성된 옴니버스 형식인데 그중 ‘본지단(本地蛋)’이란 이름의 마지막 작품에 최근 일련의 정치 상황과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어 화제가 됐다. 본지단이란 ‘이곳(본지), 즉 홍콩산 달걀’이란 뜻이다. 평범한 보통명사인 ‘본지’나 ‘본토’가 홍콩에서 쓰이면 정치적 의미를 갖게 된다. 홍콩이 중국의 일부란 사실을 인정하지 않거나, 설령 인정은 하더라도 굳이 강조하고 싶지 않은 세력이 홍콩의 독자성을 강조할 때 쓰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우산혁명 이후 생겨난 홍콩 독립 주장 세력을 ‘본토파’라고 부르는 게 좋은 예다.

영화 <십년>에서는 본지나 본토란 단어를 2025년 홍콩에서 입 밖에 내면 안 되는 금지어로 설정했다. 예전 문화대혁명 시기의 홍위병을 연상시키는 영화 속 소년단원들은 정부 방침을 어기고 금지어를 사용하는 불순세력을 찾으러 홍콩 시내를 돌아다닌다. 그러던 중 한 허름한 수퍼에서 ‘본지단’이란 단어를 발견한다. 수입달걀이 아니라 홍콩의 양계업자가 생산한 달걀이란 점을 강조한 것인데, 이 업자는 결국 당국의 압력에 굴복해 자신의 생업인 양계업을 포기하고 만다. 이로써 홍콩엔 단 한 명의 양계업자도 남지 않게 된다. 허구이긴 하지만 홍콩이 처한 현실과, 그 현실이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설정임에 틀림없다. 홍위병(소년단)에 의해 양계업이 전멸한다는 건 결국 홍콩이 사라지고 완전히 중국에 동화되는 상황의 은유로 읽히기 때문이다.

저예산 독립영화로 제작된 <십년>은 당초 극장 한 곳에서만 상영 계획을 잡았다가 관객이 몰리자 주요 극장들이 모두 이 영화를 앞다퉈 스크린에 걸었다. 이뿐만 아니라 쟁쟁한 극영화들을 물리치고 홍콩의 아카데미상 격인 ‘금상장(金象奬)’ 시상식에서 최우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이 영화의 반향이 그만큼 컸던 것은 홍콩인들이 절박하게 느끼고 있는 머지않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스크린으로 옮겨왔기 때문이다. 과장이나 허구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의미다.

홍콩인들이 향후 10년에 대해 그렇게 불안감을 느끼는 걸 엄살로만 치부할 순 없다. 그들은 1997년 홍콩의 주권을 찾은 이후 20년간 일어난 변화, 특히 중국의 국력 부상이 두드러진 최근 몇 년간 겪은 홍콩의 변화를 바탕으로 앞으로 10년의 변화를 예상하고 있을 것이다.

10년 뒤 홍콩 금지어는 본토?


▎홍콩 반환 20주년이 되는 7월 1일 홍콩 도심에서 6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7·1 대행진’이 열렸다. 시위 참가자들은 “일국양제를 수호하자”는 구호를 외쳤다. / 사진:연합뉴스
중국은 1997년 홍콩의 주권을 돌려받은 뒤에도 50년간 자본주의에 바탕한 홍콩 체제를 그대로 보장한다고 약속했다. 고도의 자치, 즉 외교·국방을 제외한 모든 분야에서의 자치와 홍콩인에 의한 홍콩통치(港人港治)도 약속했다. 이는 1980년대 영국과의 반환협상을 지휘한 최고지도자 덩샤오핑(鄧小平)의 묘수이기도 했다. “99년이란 조차기간이 설정된 신계(新界) 지역만 반환하면 되지 영구 할양지인 홍콩섬· 주룽(九龍)반도까지 반환할 필요가 있느냐”던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일국양제(一國兩制) 약속에 머뭇거림을 털어내고 반환 문서인 중·영 공동성명에 서명했다. 이에 따라 사상 초유의 일국양제가 홍콩에 탄생했다. 당시의 중·영 공동선언이나 현행 홍콩기본법에 따르면 홍콩에선 주권 반환 이전과 똑같은 수준의 언론·출판·표현의 자유가 보장되고, 자본주의 시스템에 바탕한 사회·행정 제도가 작동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에 역행하는 일들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다는 게 홍콩인들이 피부로 느끼는 점이다. ‘신의 한 수’였던 일국양제가 날이 갈수록 퇴색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게 2015년의 퉁뤄완(銅鑼灣)서점 사건이다. 이 서점은 중국 공산당을 비판하는 내용의 정치서적을 출판·판매해 오던 회사였다. 그해 12월 람윙키(林榮基)를 비롯한 서점 주주·경영자 등 5명이 차례로 실종됐다. 몇 사람은 해외여행을 간 길에 혹은 중국 본토인 선전(深圳)에 간 길에 중국의 공안 요원에게 끌려갔고, 한 사람은 아예 홍콩 영내에서 잡혀간 것이란 증언이 나왔다. 이들은 모두 중국 본토로 들어가 수개월간 조사를 받고 풀려났다. 한 사람은 아직도 행방이 묘연하다. 그들이 중국 공안당국에 연행된 이유는 반중(反中) 내용의 서적을 펴내 중국 대륙에까지 유통시켰다는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홍콩인들이 받은 충격은 컸다. 출판의 자유가 보장된 홍콩에선 정부를 비판했다는 내용을 이유로 경찰에 끌려간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로 여겨졌다. 홍콩 경찰에 붙잡혀가는 것도 상상 밖의 일인데, 홍콩인에게 사법·경찰권을 행사할 권한이 없는 중국 공안당국에 홍콩 시민이 끌려갔으니 홍콩인들이 일국 양제의 공공연한 부정으로 받아들일 만도 했다.

6월 말 홍콩 번화가 코즈웨이베이에 위치한 이 서점을 찾았더니 자물쇠가 채워진 채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누군가가 입구에 ‘람(林) 선생 빨리 돌아오세요, 당신의 책을 사랑합니다. 당신과 다시 담소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란 쪽지를 붙여놨다. 홍콩인들은 쓰지 않는 간체(簡體) 한자인 것으로 봐선 중국 본토인이 써 붙여놓은 게 틀림없었다.

서점 바로 옆 건물에 책과 잡지를 파는 가판대가 있었다. 중국 권력층에 대한 정보를 적은 책, 특히 반부패 캠페인을 지휘하는 중국 정치국 상무위원 왕치산(王岐山)의 비리 의혹을 폭로한 최신 서적이 눈에 띄었다. 중국인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신기한 듯 책을 펼쳐 보고 있었다. 그러나 선뜻 손에 집어 드는 이는 없었다. 한 남자가 가판대 주인에게 “이 책을 내지(內地, 중국 본토를 의미)에 갖고 가도 괜찮을까”라고 물었다. 공항에 내릴 때 짐 검사에서 문제가 되지 않겠느냐는 의미였다. 주인은 “한두 권쯤이야 문제없이 가방에 넣어 갈 수 있는 방법이 있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광저우에서 딸과 함께 여행 왔다는 왕(王) 선생은 그래도 자신이 서지 않는 듯했다.

비단 퉁뤄완 사건뿐 아니라 중국 중앙정부 비판 등에서 언론 자유가 날이 갈수록 침해받고 있다는 인식이 홍콩 현지인들에겐 널리 퍼져 있다. 홍콩 주재 경력이 많은 서방 외교관은 “예전에는 대학교수를 만나면 자유롭게 홍콩은 물론 중국 정부까지 신랄하게 비판했는데 지금은 주위의 눈치를 살피면서 말을 아낀다”고 말했다. 홍콩의 반정부 인사들은 “법률로 보장된 ‘고도의 자치’도 점점 구두선에 그치고 있다”며 “홍콩에 주재하는 중국 공산당의 연락기관이 점점 보이지 않는 배후의 정부 역할을 하며 홍콩 정부를 조정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최근에는 홍콩 최대 방송사인 TVB의 소유 구조가 도마에 올랐다. 최대 주주인 ‘영라이언’의 지분 79%를 중국 전직 관료인 리루이강(黎瑞剛)이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뒤늦게 드러난 것이다. 홍콩 언론들은 “리의 배후를 밝히지 않는 이상 누가 실질 소유주인지 알 수 없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중국의 보이지 않는 손이 알게 모르게 홍콩 민간 언론의 영역에까지 침투해 왔다는 의미다.

매년 중국인 5만 명 홍콩 이주


▎1982년 덩샤오핑 중국 국가주석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홍콩 반환을 둘러싼 설전(舌戰)을 벌였던 현장.
일국양제가 유명무실해지고 있는 한편으로 홍콩의 중국화는 가속되고 있다. 중국 당국의 통제만 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인적 이동의 물결이 이에 가세했다. 기자는 2014년부터 베이징에 주재한 이래 매년 한두 차례씩 홍콩을 방문했는데 거리나 지하철에서 중국인과 마주치는 비율이 갈수록 높아지고 있음을 피부로 느낀다. 사정을 알아보니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꼬박꼬박 하루 150명씩의 중국 본토인이 단정증(單程證)이란 이름의 장기 거류 비자를 발급받고 홍콩으로 이주한다. 이 단정증을 받고 7년간 홍콩에서 합법 거주하면 영주권이 나온다. 하루 150장의 발급 수량 한도를 신청자가 부족해 못 채운 적이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줄잡아 1년에 5만 명의 중국인이 홍콩으로 이주하는 셈이다. 홍콩 반환 20년 만에 중국인 100만 명이 홍콩에 와서 정착했다는 의미다. 어떤 이는 보다 양질의 일자리를 찾기 위해 홍콩에 오지만 어떤 이는 홍콩인 배우자와 가정을 꾸리기 위해 온다. 서서히, 그러나 끊임없이 진행되는 인적 융합을 통해 중국과 홍콩을 하나로 만드는 동화정책의 일종으로 보는 시각이 홍콩인들 사이에는 퍼져 있다. 50대 택시 운전사 응(伍)은 “중국 정부가 아주 똑똑한 정책을 쓰고 있는 거죠”라며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의 말을 듣고 보니 중국 정부가 소수민족 거주지인 변경 지역에 한족 이주를 장려해 결국 인구구조를 역전시킨 사실이 새삼 떠올랐다.

홍콩인들 중에는 중국 이민으로 인해 역차별을 받는다고 불만을 드러내는 사람이 적지 않다. 직장 여성 재클린 창은 “홍콩 서민들이 선호하는 값싼 공영주택에 입주하려면 7년, 길게는 10년씩 기다려야 하는 게 예사지만, 중국인들은 1∼2년 만에 입주 자격을 받고 있다”며 “중국 당국의 눈치를 보는 홍콩 정부가 알게 모르게 중국 이주민들의 편의를 봐주는 정책을 펴고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은 홍콩인들의 의식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홍콩대가 5월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나는 홍콩인”이라고 대답한 비율이 63%로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다. 반면 “나는 중국인”이라고 대답한 비율은 30%대에 머물렀다. 젊은 세대로 갈수록 자기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더욱 확고하다. 18∼29세 젊은 층은 자신들이 홍콩인이라고 생각하는 비율은 2007년 65.7%에서 올해 6월 93.7%까지 늘었다. 반면 중국인이라는 인식은 3.1%에 그친 것으로 조사됐다.

이런 여론조사는 왜 영화 <십년>이 홍콩에서 큰 반향을 일으켰는지를 설명해준다. 홍콩의 중국화 정책이 가속화할수록 홍콩인으로서의 독자성을 찾는 정체성이 강해지고 있는 것이다. 앞에서 잠깐 설명한 ‘본토파’는 바로 이런 정체성의 변화를 바탕으로 형성된 새로운 정치세력이다. 2014년 50만 명 이상이 거리로 뛰쳐나온 우산혁명 당시에는 홍콩 학생과 시민단체, 야당이 ‘보통선거 쟁취’란 구호 하나로 뭉쳤다.

건제파·민주파·본토파 세 갈래 정치세력


▎홍콩 도심 가판대에서 중국에 대한 비판 내용이 담긴 서적들을 살펴보는 중국인 관광객. / 사진:예영준
하지만 이 운동이 결국 실패로 끝난 뒤 기존 야당인 민주파와는 노선과 이념을 달리하는 정치세력이 의회 진출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지난해 입법의원 선거에서 복수의 당선자를 냈다. 이에 따라 홍콩의 정치세력은 크게 세 가지 범주로 분류된다. 친중 세력인 건제파(建制派)와 현행 일국양제의 틀 안에서 최대한의 자치와 민주화를 주장하는 온건 세력인 민주파, 그리고 제3의 정치세력인 본토파로 나뉜 형국이다. 하지만 본토파는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과격 세력부터 자치를 요구하는 온건 세력까지 스펙트럼이 다양한 데다 정치 세력화의 역사가 일천해 홍콩인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기에는 한계가 있다.

홍콩은 지난 7월 1일로 반환 20주년을 맞았다. 홍콩 거리 곳곳에 오성홍기와 홍콩 깃발이 나란히 나부끼고 화려한 축하 조명과 장식물이 설치되는 등 경축 분위기가 넘쳤다.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도 이참에 2012년 취임 후 처음으로 홍콩 방문길에 나섰다. 그는 변함없는 일국양제의 견지를 약속하며 이를 통한 중국과 홍콩의 동반 번영을 다짐했다. 시 주석은 20주년 기념식 연설에서 “일국양제는 중국이 창안해 낸 장거(壯擧)이며 세계가 일국양제의 성공을 인정했다”고 했다. 그날 밤에는 화려한 홍콩 야경을 배경으로 쏘아 올린 4만 발의 폭죽이 홍콩의 밤하늘을 수놓으며 경축 분위기를 절정으로 끌어올렸다.

시 주석이 다녀간 직후 홍콩 도심에선 6만 명이 참석한 대규모 시위와 행진이 벌어졌다. 중국 공안당국에 연행됐다가 풀려난 퉁뤄완서점의 람윙키가 행진의 선두에 섰다. 그들이 앞세운 현수막에는 ‘일국양제 거짓말 20년, 민주와 자치로 홍콩을 되찾자’는 구호가 선명했다. 같은 일국양제를 놓고 한쪽은 ‘세계가 인정한 성공작’이라 평가했고 한쪽은 ‘20년 묵은 거짓말’이라 폄하했다. 그런 메울 수 없는 인식의 틈 속에 2017년의 홍콩 반환 20주년 기념일이 지나가고 있었다.

[박스기사] 릴레이 인터뷰 - 홍콩 자결(自決) 독립 주장하는 신세대 정치인 2인


지난해 9월 실시된 홍콩 입법회(의회) 선거에서 새로운 제3의 정치세력이 의회에 진출했다. 이른바 ‘본토파’라 불리는 젊은 정치인들이 정당을 결성하고 직접 현실 정치에 뛰어들어 70석 가운데 6명의 당선자를 낸 것이다. 지난 7월 1일 홍콩 반환 20주년에 맞춘 현지 취재 기간 동안 6명의 당선자 가운데 2명을 직접 만나 인터뷰했다.

청충타이 ‘열혈공민’ 입법의원 | “홍콩인 스스로 헌법 제정, 장관 선택해야”

청충타이(鄭松泰·34) 의원은 신생 정당 ‘열혈공민’을 이끌고 있다. 당명부터 심상치 않게 들리는 열혈공민의 주석답게 그는 가장 반중 성향이 강하고 급진적인 인물로 평가된다. 한때 중국 관광객 배척 운동을 주도한 경력으로 인해 ‘행동파’나 ‘투사’로 분류되기도 한다. 하지만 의원회관에서 만나본 그의 이미지는 과격 투사보다는 온화한 학자풍에 가까웠다. 실제로 그는 홍콩이공대 전임강사로 의정생활 틈틈이 강의를 하고 있는 사회학자이기도 하다.

베이징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는데 어떻게 반중 성향의 정치인이 됐나?

“2005년부터 6년간의 유학 기간 중 방학 때마다 중국의 기층 민중과 함께 생활했다. 광둥성의 공장, 윈난성과 티베트의 소수민족 빈곤지역 등에 가서 현장조사활동을 하며 두어 달씩 지냈다. 그런 경험을 통해 유학 전에는 책이나 뉴스로만 알던 중국과 실제 중국의 다른 모습을 발견했다. 중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의 이면에는 일반 서민들의 한숨과 눈물, 착취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시골 관리들의 부패도 직접 목격하고 체험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홍콩이 이런 중국의 모습으로 바뀌어가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지금 홍콩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이라 생각하나?

“우리의 정부가 없다는 점이다. 홍콩 정부는 홍콩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중국을 위해 존재한다. 당장 시급한 것은 인구정책의 개혁이다. 매일 150명의 중국인이 단정증(홍콩 이주 비자)을 받고 건너온다. 그렇게 이주해 온 중국인을 위해 홍콩 정부는 각종 복지 혜택을 제공한다. 더 심각한 것은 그 150명에 대한 단정증 발급 여부를 홍콩 정부가 심사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이 정한다는 점이다. 경제적으로도 중국에 대한 의존이 날로 심해지고 있는데 이를 완화해야 한다. 만약 중국 경제의 거품이 붕괴하는 날, 홍콩 경제가 어떻게 될 것인가를 미리 생각하고 대비해야 한다. 170년간 이어져왔던 홍콩의 법치 전통도 중국 중앙정부의 개입으로 인해 많이 허물어지고 있는데 이를 다시 세워야 한다.”

열혈공민이 그리는 홍콩의 미래는 어떤 것인가?

“홍콩이 중국으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다.”

그건 독립을 의미하나?

“완전 독립은 매우 어렵다고 본다. 하지만 불가능하다고 해서 문제 제기조차 않는 것은 안 된다. 분리 이후 홍콩의 모습은 홍콩인 스스로 토론하고 결정해야 한다. 완전 독립이 아니어도 미국식 연방이나 영연방과 같은 커먼웰스(common wealth)도 선택이 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는 ‘자결(自決)파’란 용어를 많이 쓴다.”

입법의원이 된 것은 현실에 기반한 정치를 하기 위한 것 아닌가? 정치인으로서의 목표는?

“현재 홍콩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는 홍콩기본법은 중국과 영국의 협상 산물이지 홍콩인이 정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홍콩인 스스로의 손으로 기본법을 만드는 게 목표다. 그리고 행정장관은 중국 정부가 원하는 인물이 아니라 홍콩인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야우와이칭 ‘청년신정’ 전 입법의원 | “홍콩 독립은 수단, 민주주의 실현이 목표”


신생정당 ‘청년신정(靑年新政)’ 소속인 야우와이칭(游蕙禎·여)은 지난해 25세로 입법의원에 출마해 당선됐다. 그런데 지금 그는 의원 신분이 아니다. 선거 두 달 만인 지난해 11월 홍콩 고등법원으로부터 당선 무효 판결을 받았기 때문이다. 입법회 개회식장에서 의원 선서를 하면서 법에 규정된 선서문을 임의로 수정해 읽은 것이 당선 무효 사유에 해당한다는 판결이었다. 그는 선서문 가운데 ‘중화인민공화국’이란 중국의 정식 국호를 ‘치나’란 단어로 바꿔 읽었다.

‘치나’는 과거 일본인들이 중국을 비하해 부르던 것이다. 그는 또 동료 남성 의원과 함께 ‘홍콩은 중국이 아니다”고 쓰인 현수막을 펼치기도 했다.

고등법원 판결로 완전히 의원직을 상실했나?

“현재 상급 법원에 상소해 최종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8월께 결과가 나오지 않을까 예상된다.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고등법원 판결에 중국 당국의 의도가 작용했다는 점이다.”

그 근거는?

“2012년에도 사민련 소속 렁쿽훙(梁國雄) 의원이 선서문대로 읽지 않고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표출했다. 당시엔 아무런 일 없이 넘어갔다. 지난해 선서 사건이 있은 직후 중국 전국인민대표대회가 ‘홍콩기본법’에 대한 해석 수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서 선서를 제대로 하지 않는 행위는 자격 박탈 사유에 해당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그 뒤 홍콩 법원 판결이 나왔다. 홍콩 정부와 법원에 지침을 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선거 당시 홍콩 당국이 입후보자들에게 홍콩 독립운동에 가담하지 않는다는 각서에 서명을 요구한 것으로 안다.

“입후보자 5~6명이 각서 서명을 거부해 출마가 취소됐다. 나도 물론 그런 각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 경우는 입후보에 문제가 없었다.”

당신과 같은 젊은이들 중에 홍콩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 생겨나고 있다. 그 이유는 뭔가?

“중국에 편입된 이후 홍콩인들이 피해를 많이 보고 있다. 은행·부동산 등 홍콩인이 선호하는 직장은 대륙 출신 대학생들 차지가 돼버렸다. 중국 자본이 들어와 홍콩 집값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올랐다. 이대로 가면 (일국양제 시행이 끝나는) 2047년까지 기다릴 것도 없다. 결국 홍콩은 독자적인 화폐도 없어지고 독자 성인 가치도 사라지고 광둥성의 일개 도시가 되고 말 것이다.”

홍콩 독립이 과연 가능할까?

“하지만 나의 목표는 독립이 아니다. 독립은 수단일 뿐이다. 진짜 목표는 민주주의다. 2014년 우산혁명은 진정한 보통선거를 요구한 민주화운동이었다. 그 뒤 방법론에서 분화가 일어났다. 독립 없이는 민주화가 불가능하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중국과의 협상을 통해 민주화가 가능하다는 사람도 있다. 민주주의를 쟁취하는 과정에서 독립이 유일한 선택지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홍콩인들이 자기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자결(自決)의식을 높이고 정치적 역량을 쌓는 것이다.”

- 예영준 중앙일보 베이징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201708호 (2017.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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