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 생활

Home>월간중앙>문화. 생활

[새 연재 | 조홍식의 부국굴기(富國屈起) | 자유시장경제의 원류를 찾아서(1)] 인류 최초 시장경제, 신바빌로니아의 황금시대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을 앞서다! 

조홍식 숭실대 교수
분업체계에서 파생된 높은 생산성과 장기투자로 인구 5배 증가… 토지 소유권, 인적자본으로서 노예제·동업 활성화로 화폐경제 번성해

조홍식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가 월간중앙에 새로 연재하는 ‘부국굴기’는 세계사에서 부유함으로 빛났던 국가들의 다양한 성공 비결을 소개한다. 그 흥망성쇠에 관한 분석을 통해 21세기 대한민국이 취해야 할 길과 피해야 할 길에 관한 질문을 던진다. 폴 케네디 예일대 교수의 명저 [강대국의 흥망]이 군사력에 초점을 맞춰 국가론을 다뤘다면, 조 교수의 ‘부국굴기’는 한국 시민사회가 흡수하기 용이한 경제적 관점에서 세계사를 새롭게 바라본다. - 편집자 주


▎고대 바빌로니아 제국의 수도였던 바빌론의 현재 모습. 바빌로니아는 인류문명 사상 최초의 부국이라 할만하다. 현재는 전쟁과 테러의 참화에 시달리는 이라크의 영역이다.
역사 속에서 부자 나라를 찾아 떠나는 여행의 첫 번째 행선지는 현대 이라크 지역에 자리했던 바빌로니아다. 아이러니하게도 21세기에 이라크 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전쟁의 참혹함이다. 새천년을 시작하면서 자본주의의 중심인 미국을 강타했던 9·11사태와 이를 응징하기 위해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2003년 시작된 전쟁은 아직도 완전히 종결된 것은 아니다. 이라크는 여전히 내분에 휩싸여 불안과 혼란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잔악한 테러 집단 ‘이슬람 국가(IS)’는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이라크와 시리아의 접경지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지 않았던가. 유엔이 매년 발표하는 인간개발지수(HDI, Human Development Index)만 보더라도 이라크의 순위는 2017년 세계 120위로 무척 열악한 상황이다.

하지만 인류 역사의 새벽에 이라크가 위치한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나일, 인더스, 황하 문명과 함께 긴긴 야만의 어둠을 밝히는 개벽의 불빛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이라크뿐 아니라 나일의 이집트, 인더스의 인도, 황하의 중국 등 3000~4000년 전 4대 문명의 땅이 지금은 오히려 대부분 선진 경제의 중심에서 벗어나 있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이라크, 이집트, 인도는 현재 개발도상국이며 중국만이 G2의 위상으로 우뚝 솟아오르고 있어 예외라 할 수 있다.

4대 문명은 고대에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 수준을 자랑했다. 그중 메소포타미아가 당시의 상황을 이해하고 분석할 수 있는 가장 많은 자료를 남겼다. 부국굴기의 출발점으로 가장 적합한 이유다. 실제 진흙으로 만든 점토판(粘土板, clay tablets)의 기록이 메소포타미아는 무려 25만 개에 달한다. 이는 로마 제국이 라틴어로 남긴 기록보다 많은 수이며, 오직 고대 그리스만이 이를 능가한다.

점토판의 내용에는 정치나 법, 종교와 문화 등 다양한 분야가 포함되지만 그보다는 소유권이나 계약, 거래나 채무 등 경제·사회 분야의 내용이 80%에 달한다. 그만큼 바빌로니아 사회에서 기록이란 일상 경제 활동을 동반하는 도구였던 것이다. 진흙에 갈대 펜으로 설형문자(楔形文字)를 새긴 네모 모양의 점토판 대부분은 손바닥에 놓고 볼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다. 고대 바빌로니아인들의 ‘스마트폰’이었던 것 같다.

메소포타미아 문명에는 여러 제국이 존재했지만 역사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바빌론이란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바빌로니아 제국이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다시 구(舊)제국과 신(新)제국으로 나뉜다. 구 제국은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기원전 19~16세기의 왕조를 의미하며, 신제국은 기원전 7~6세기에 다시 부상한 바빌로니아 왕조를 뜻한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카시트(Kassite) 왕조나 아시리아(Assyria) 등의 제국이 지배하는 경우에도 문명이 발달하고 부유했다. 하지만 여기서 중점적으로 다루는 시기는 신바빌로니아의 경제 번성기다.

바빌로니아, 기원전의 고(高)임금국가


▎기원전 1900년대 바빌로니아의 점토판.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흔히 일어나는 기상에 관한 정보가 적혀 있다. / 사진:대영박물관
부자 나라란 다수의 사람이 골고루 풍요를 누리는 국가다. 물론 기원전에 현대 스칸디나비아와 같은 높은 소득을 기대해선 곤란하다. 그보다는 시대와 환경을 고려해 상대적으로 많은 사람이 골고루 혜택을 누리는 사례를 찾아야 할 것이다.

경제사 연구 학자들은 곡식과 같은 기초 식량으로 실질 임금을 계산한다. 기원전 6세기 바빌로니아에서 비숙련 노동자가 누렸던 임금은 일당 9.6~14.4ℓ의 밀이었다. 고대와 중세 다른 사회의 기록을 보면 노동자 일당은 대부분 밀 3.5~6.5ℓ였다.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3000년대와 2000년대의 노동자 일당은 이미 4.8~8ℓ로 이보다 높은 수준이었다. 그러니 하루 일해서 10ℓ 이상의 밀을 얻을 수 있다면 고임금의 부자 나라라고 할 만하다.

메소포타미아는 신·구 바빌로니아를 막론하고 커다란 풍요를 누린 것으로 나타난다. 밀로 환산한 실질 임금 수준이 높다는 것은 결국 다른 문명보다 높은 생산성을 가졌다는 반증이다. 풍요의 정도 또한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높아졌다. 신바빌로니아가 누린 높은 생활수준은 결혼할 때 신부가 가져갔던 지참 물건이나 상속 재산의 목록에서도 드러난다. 이들 목록은 구바빌로니아의 시대에 비해 훨씬 많은 가구와 장신구, 생활 용품을 포함함으로써 더욱 풍요로운 사회였음을 보여준다. 무엇이 이렇게 높은 소득 수준을 가능하게 했을까.

고대의 4대 문명은 모두 강변 충적(沖積)평야에 위치하고 있다. 강물이 실어다 주는 흙과 모래가 쌓여 기름진 땅을 선사했고 농업의 기초를 제공했다는 뜻이다. 아프리카의 나일강, 중국의 황하, 인도의 인더스 강은 해당 지역을 대표하는 큰 강이다. 서남아시아의 메소포타미아는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라는 두 개의 강이 형제처럼 평행선을 그리며 거대한 규모의 평야를 적신다.

메소포타미아의 어원은 그리스어에서 강을 의미하는 포타무스(potamus)와 중간 또는 사이를 뜻하는 메소(meso)의 합성에서 찾을 수 있다. 메소포타미아란 말 그대로 ‘두 강 사이의 땅’이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은 아나톨리아 고원에서부터 걸프 만을 향해 흐르는 커다란 물길이다.

다른 문명보다 강이 많다고 무조건 좋은 일은 아니다. 사실 두 강 사이의 평평한 땅은 빈번한 범람으로 농사짓기 쉽지 않은 조건이다. 특히 이집트의 나일 강이 넘치는 계절은 농사를 짓기 위해 물이 필요할 때지만, 메소포타미아의 경우에는 강이 범람하는 시기가 농사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따라서 메소포타미아는 댐이나 제방, 수문 등의 관개시설을 제대로 갖춰야 안정된 농사가 가능하다.

모든 것을 쉽게 얻을 때 사람들은 별 노력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적절한 난관은 긴장과 동기를 부여한다. 메소포타미아 역시 두 개의 강과 기름진 충적평야를 가졌지만 인간의 노력으로 관개시설을 구축해야만 최대한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게다가 메소포타미아는 거대한 평야는 있었지만 문명을 구축하는데 필요한 금, 은, 철강 등의 지하자원이나 석재, 목재와 같은 자원은 부족했다. 성을 쌓고 궁전을 짓고 신전을 올리는 재료는 모두 수입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분업과 평화가 가져다준 높은 생산성


▎기원전 3000년 전의 고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등에서는 야생동물을 사육한 흔적이 나타났다.
메소포타미아가 부국으로 성장하는 데 일등공신은 높은 농업생산성이다. 자연이 내려준 축복의 땅에 인간의 노력으로 생산적인 관개시설을 마련한 덕택이다. 보리는 메소포타미아의 기본 농산품으로 자급자족을 넘는 충분한 잉여생산을 도출해 도시의 인구와 군대에 식량을 보급할 수 있을 정도였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농업 생산성을 높이는 또 다른 방법은 고(高)부가가치 농산품으로 전환하는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 남부에서는 보리농사를 야자대추(date palm) 농사로 대체함으로써 토지와 노동의 생산성을 높였다. 야자대추는 한국의 대추와 감을 섞어 놓은 맛의 과실인데 서남아시아에서 즐겨 먹는 식품이다. 게다가 야자대추는 맥주의 재료로도 쓰인다. 용도가 다양한 서남아시아 지역의 특산품인 셈이다. 야자대추나무를 심어 수확하기까지는 4~8년이 걸린다. 미래를 바라보는 장기 투자가 사회 여건상 가능했다는 의미다.

바빌로니아인들은 관개시설을 이용한 평야에서 보리와 야자대추를 생산하는 한편, 물이 너무 많아 농사가 불가능한 곳에선 생선을 양식하거나 가금(家禽)을 키우기도 하였다. 투자한 노력에서 최대한의 혜택을 누리기 위해 갖은 아이디어를 동원한 셈이다. 현대 사회에서 도시 주변에 비닐하우스 농사를 통해 사시사철 먹거리를 공급하듯 메소포타미아는 이미 그 시대에 원예 농업으로 바빌론을 비롯한 여러 도시에 식재료를 공급했다. 점토판 기록에는 양파와 같은 틈새상품을 개발해 도시에 공급한 사례가 등장한다.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 강의 평야에서 조금 멀어지면 북쪽의 구릉이나 초원지역이 나온다. 메소포타미아 인들은 여기서 주로 양을 키웠다. 소는 농사일을 시키고 양은 고기를 먹거나 양털로 직물을 짜는 데 이용했다.

도시에는 다양한 업종의 전문적 수공업자들이 상당히 세밀한 분업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다. 도시의 위엄을 드러내는 건축물을 짓거나 왕궁과 신전에 공급하는 다양한 가구, 의류, 사치품을 만드는 것 역시 수공업의 몫이었다. 이처럼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강조하는 분업체계가 이미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확실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전쟁 상황에서 경제가 발전하고 풍요로운 삶을 누리기는 불가능하다. 부국굴기의 기본 조건 가운데 하나는 당연히 평화다. 특히 넓은 지역에서 안정과 평화를 누릴 수 있을 때 교역과 규모의 경제를 통한 발전이 가능해진다. 충분조건은 아니지만 필요조건이라는 말이다.

기원전 626년부터 539년까지 100여 년 가까이 신바빌로니아 제국이 서남아시아의 거대한 영토를 지배하면서 평화와 번영의 시기를 구가했다. 동쪽의 페르시아부터 서쪽의 지중해까지, 그리고 북쪽의 아나톨리아 고원부터 남쪽의 걸프만까지 드넓은 영토에 세력을 형성했다.

이 시기에 바빌로니아는 고대에서 보기 드문 경제발전과 풍요의 시대를 맞는다. 인류 역사에서 풍요의 중요한 지표는 인구 동향이다. 바빌로니아 인구가 기원전 6세기부터 계속 증가해 서기(AD)가 시작되는 때까지 5배로 증가했다는 연구도 있다.

강한 제국의 등장은 부를 주변에서 중심으로 이동시키는 효과를 낳는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아시리아를 포함한 다른 지역의 부를 자국으로 이전시킬 수 있었다. 물론 과도한 수탈의 제로섬 게임(zero-sum game)을 장기간 지속하면서 풍요를 창출하기란 어렵다.

바빌로니아 제국의 특징은 이런 수탈의 기능을 상당부분 민간에 대행시켰다는 점이다. 물론 징세 기능을 민간에 맡긴다고 반드시 적절한 압력만 가하는 지혜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도하게 백성의 고혈을 짜낼 수도 있다. 징세업자(tax farmer)라고 불리는 사업가들은 정부를 대신해 세금을 거두는 역할을 했다. 이들은 정해진 세금보다 더 많은 액수를 수확해야만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민간 사업자들은 장기적으로 수확을 얻으려면 황금알을 낳는 오리를 죽여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바빌로니아의 징세업자들은 현물로 받은 세금을 현금으로 전환하거나, 납세자와 신용거래를 하는 과정에서 이익을 챙기는 ‘중개와 금융의 혁신’으로 사업을 발전시켰다.

인류 최초의 ‘시장경제’를 잉태하다


▎걸프만에서 지중해까지 걸쳐 있는 신바빌로니아의 세력 판도. 바빌로니아의 경제적 융성은 강력한 국력과 인구 증가에서 비롯됐다. / 사진:위키피디아
신바빌로니아 제국은 인류 최초로 ‘시장경제’를 실현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바빌로니아의 시장은 경제학 교과서에 나오는 완벽한 시장은 아니다. 또 바빌로니아 경제에서 시장경제의 비중이 제한적이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곳에는 수요와 공급이 가격을 결정하고 가격 변동에 따라 수급이 반응하는 시장이 있었다. 또 시장을 뒷받침하는 소유권이나 법과 제도가 구비된 사회가 존재했다.

마르크스가 정의했듯이 사적 소유권은 자본주의의 핵심제도다. 그 중 토지의 사적 소유권은 근대 영국의 ‘인클로저(enclosure) 운동(19세기 유럽에서 개방경지나 공유지·황무지를 울타리나 돌담으로 둘러놓고 사유지임을 명시한 운동)’에서 볼 수 있듯이 자본주의 출범의 중심축이다. 고대 바빌로니아에는 개인이 토지를 사고파는 시장이 있었다.

메소포타미아 토지의 가장 많은 부분은 왕실이나 신전 소유였다. 국가가 개간한 토지의 상당부분은 군인에게 부여해 농사를 짓게 했다. 하지만 또 다른 부분의 토지는 민간의 가문이나 개인이 소유할 수 있었다. 이런 토지의 사적 소유권은 바빌로니아에서 위에 언급했던 농업혁신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민간 지주에게는 보리농사보다는 야자대추나 양파와 같은 원예농업으로 갈아타 생산성을 높일 기회가 소중했기 때문이다.

물론 바빌로니아의 토지 시장을 순수한 경제 거래의 장으로만 보기는 어렵다. 토지가 어느 정도 활발하게 거래되기는 했지만 평범한 상품은 아니었다. 수공업이나 장사를 통해 부를 축적한 가문은 땅을 사서 사회적 지위를 얻으려 하였다. 또 토지는 경제상황이 아주 힘든 지경이 아니라면 쉽게 팔지 않을 만큼 특별한 가치를 지녔다. 그래서 거래가 성사되더라도 사회 지위가 비슷한 친척이나 지인들 사이에 이뤄졌다.

마르크스는 고대의 노예제, 봉건주의의 농노(農奴)제, 그리고 자본주의의 임금 노동제를 생산양식의 진화과정에서 차례로 등장하는 제도로 보았다. 하지만 바빌로니아 사회에는 이 세 종류의 노동 관계가 공존했다.

왕실과 신전이 소유하는 토지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농노에 가까웠다. 이들은 강제 노동을 통해 땅을 일구는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고대 서남아시아나 이집트 대부분의 제국은 이런 농노제에 가까운 강제노동 체제를 운영했다. 심지어 그리스의 스파르타 역시 노예제보다는 농노제에 가까웠다.

바빌로니아는 노예를 사고파는 거래를 하는 시장이 있었다. 통상 사람들은 노예는 자유노동자에 비해 열악한 사회 지위와 조건에 놓여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노예의 가격은 임금 노동의 몇 년치에 해당하는 높은 수준이었다. 게다가 주인이 의식주를 책임져야 했기 때문에 고비용이 들어가는 노동인 셈이었다.

이 때문에 주인들은 노예에게 기술이나 지식을 익히도록 해서 전문적인 일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자들을 임대해 관리하고 감시하는 역할은 주인을 대신해서 주로 노예가 맡았다. 주인들이 고비용 노예의 ‘인적 자본’을 높여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한 것이다. 주인과 노예가 편지를 주고받을 때 노예가 ‘나의 주인’이라고 부르면 주인은 ‘나의 형제’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하지만 바빌로니아 사업가들은 친형제에게는 절대 자신의 재산이나 사업을 대신 맡기지는 않았다고 한다.

앞서 언급한 바빌로니아의 높은 임금은 일당을 받고 일하는 자유로운 노동자들의 몫이었다. 왕실이나 신전은 보유하는 토지는 넓은데 동원할 수 있는 강제 노동은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추가로 임금노동자를 채용해야 했다. 민간이 보유하는 토지에서 노동을 제공하는 것도 임금노동자였다. 이 때문에 노동시장이 상당히 발달했다.

노동시장에서 임금은 수요와 공급의 상황을 반영했다. 농번기에는 임금이 상승하고 농한기에는 다시 하락했다. 이런 계절에 따른 변동에 덧붙여 장기적으로 임금은 상품의 물가와 비슷한 변화 양상을 보였다. 이처럼 바빌로니아는 상품화되기 어려운 토지와 노동이라는 생산요소조차 시장의 기제에 따라 움직임을 보이는 고대의 독보적 시장경제 체제였다.

신바빌로니아에서는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기회가 크게 열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상업이나 농업으로 급성장하는 유명 가문의 출신 성분이 그리 높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들은 짧은 기간에 부를 축적한 뒤 자녀를 왕실 관료나 신전의 성직자 가문과 혼인을 시켜 신분 상승을 꾀했다. 이런 정략결혼이 가능했던 것은 바빌로니아의 문화가 상업이나 사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차별하지 않은 개방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다”


▎구바빌로니아 시대에 탄생한 함무라비 법전. 기원전 1900년경, 비석에 법전의 내용을 새겨 놓았다.
바빌로니아 도시의 부유 가문을 연구한 결과에 따르면 두 유형의 부자가 있었다. 하나는 지대(rent)를 추구하는 부호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사업가의 유형이다. 기원전 6세기에 이 둘 사이에는 양극화 현상이 나타났다. 전자의 위상은 하락한 반면, 후자의 경우 재산이 빠른 속도로 증가했다. 물론 사업가 유형 중에는 파산을 한 경우도 찾아볼 수 있지만 말이다. 당시에는 아마도 열심히 사업을 벌여 빠른 속도로 부를 축적하는 일에 집착하는 사업가가 상당히 많았던 것 같다. “돈을 사랑하는 자는 자신을 증오하는 것”이라는 격언이 유행했을 정도다.

바빌로니아는 농산품을 제외하고 많은 것을 수입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메소포타미아의 상인들은 아나톨리아로부터 금과 은을 수입했고, 남쪽에서는 직물과 동(銅)을 가져왔다. 이란의 주석(朱錫)이나 청금석(靑金石, lapis lazuli)을 들여오고 아수르 주변의 양모를 모아 모직을 짜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남부의 걸프 만을 통해서는 더 멀리 아라비아나 인도까지도 장거리 교역이 이뤄졌던 것으로 밝혀졌다.

바빌로니아 제국은 또 주변의 속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는데 이는 민간에 위임했다. 상인들은 왕실을 대신하여 주변에서 받은 조공 물품을 시장에 내다 팔고 그 돈의 일부를 국가에 바쳤던 것이다. 앞의 징세 사업가와 비슷한 역할인데, 결국은 조공 역시 세금의 한 종류라고 볼 수 있다.

이 무역의 망(網)에서 가장 중요했던 요소는 아나톨리아의 금과 은이다. 바빌로니아에서 시장경제의 발전이 가능했던 것은 화폐를 보편적으로 사용했기 때문이다. 특히 바빌로니아는 은을 중심으로 하는 화폐 경제를 이룩했다고 말할 수 있다.

신바빌로니아는 고대 그리스와 함께 가장 일찍 화폐 경제를 달성한 사례다. 바빌로니아는 도시와 농촌을 불문하고 많은 노동자들이 은화로 임금을 받은 최초의 기록된 케이스다. 구바빌로니아 시대에도 이미 규모가 큰 거래를 할 때엔 은을 빈번하게 사용했다. 이때 사용되는 은은 덩어리의 형태였는데 높은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기원전 8세기만 하더라도 은화는 상인이나 부호들만 사용하는 일종의 고액권이었다.

그러다 기원전 6세기가 되자 거의 모든 영역에서 은을 화폐로 사용했다. 임금을 주거나 일상의 소비 생활에도 저액권의 은화가 등장할 정도다. 국가는 은화를 직접 주조하는 역할보다는 은의 품질이나 순도를 규정하고 관리하는 것으로 만족했다. 국가가 화폐 발행권을 남용해 경제를 혼란시키는 위험을 최소화하면서 시장 질서를 확립하는 데만 전념한 셈이다.

화폐 경제가 사회 전체로 확산된 기원전 7세기 후반부터는 바빌로니아의 가격 변동에 대한 장기 자료가 존재한다. 특정 시장에서 수요와 공급에 의해 가격이 변동하는 양상이나, 서로 다른 상품 간에 대체성이나 보완성도 발견할 수 있다. 화폐의 사용은 또 사업을 하는데 동업이나 협업의 가능성을 높여 주었다.

이미 기원전 18세기 함무라비 법전은 ‘타푸툼’(tappûtum)이라 불리는 동업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규정한 바 있다. “동업을 위해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은을 주고 투자하면 그 이익이나 손해를 신 앞에서 똑같이 나누도록 한다.” 화폐가 일반화 되면서 장거리 무역은 물론 작은 규모의 사업에도 이런 형태의 동업이 유행했다. 예를 들어 선술집을 열거나 맥주공장을 만들고, 수공업 작업장이나 소규모 농장을 세우기 위한 사업 파트너십을 타푸툼의 형식으로 진행했다.

투자자와 사업가가 동업을 이루는 사례는 이후 이슬람 문명의 무다라바(mudarabah), 중세 이탈리아의 코멘다(commenda), 한자동맹의 무역 파트너십에서 비슷하게 등장한다. 하지만 바빌로니아에서만큼 다양한 사업에 다수의 사람들이 동참해 이런저런 동업을 이룬 경우는 역사적으로 드물다. 게다가 동업이 대개 한 번의 항해나 거래 등 단기에 머문 데 비해 바빌로니아에서는 10년 이상 가는 장기 동업이 빈번했다.

군사강국 페르시아, 바빌로니아를 삼키다

바빌로니아는 시장경제와 화폐경제의 모형이자, 고대에 단연코 가장 높은 생활수준을 누렸던 부자 나라다. 물론 바빌로니아는 여전히 노예나 농노를 통해 강제노동을 널리 활용하는 체제였고, 왕실이나 신전이 관리하는 경제의 부분이 비대했다. 하지만 고대 바빌로니아의 선진 경제가 남긴 유산은 이후 서남아시아의 이슬람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기원전 539년 이웃 페르시아 제국이 부상하면서 바빌로니아를 점령했다. 그러나 페르시아의 휘하에 편입된 이후에도 바빌로니아는 기원전 485년 정도까지는 어느 정도 높은 경제 수준을 유지했다. 예를 들어 그리스의 헤로도투스는 ‘페르시아 제국 부의 3할이 바빌로니아로부터 온다’고 설명할 정도였다.

하지만 기원전 5세기 초부터 바빌로니아는 쇠퇴의 길로 접어든 것으로 판단된다. 경제사회 관련 기록이 갑자기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바빌로니아는 이제 제국의 중심에서 페르시아의 주변으로 몰락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페르시아 제국의 귀족과 이들을 위해 봉사하는 바빌로니아의 엘리트 계층이었다. 이들은 혁신과 변화의 동기를 부여하는 경제를 유지하지 못했다.

전형적인 고대 제국의 모델에 따라 페르시아는 거대한 농장에서 강제 노동을 활용해 생산하고 착취하는 지대 추구의 경제체제였기 때문이다. 이전의 바빌로니아처럼 안정적 법체계 안에서 시장의 유연성과 유인에 따라 사업가들이 적극적으로 무역과 농업에 나섰던 모델은 사라졌다. 식민지 바빌로니아는 정치권력이 힘을 통해 강제로 지배하고 수탈하는 대상으로 돌변하면서 퇴보의 길을 걷게 됐다.

기원전 ‘긴 6세기’(BC 626~485년)의 120여 년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황금시대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잠시 반짝한 뒤 오래 지속되지 못하고 사라져 버린 신바빌로니아의 황금시대다. 아무리 부유한 경제를 만들어도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이웃 세력의 부상을 막지 못하면 단숨에 몰락할 수 있다는 교훈을 남기면서 말이다.

페르시아 제국은 바빌로니아를 집어 삼킨 뒤, 아나톨리아를 넘어 그리스 문명과 대립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이 군사 팽창은 바빌로니아도 이루지 못했던 거대한 제국의 확장이다. 군사강국 페르시아는 우리의 첫 번째 부국 바빌로니아와 다음 달에 방문할 두 번째 부국 그리스를 연결해 주는 고리다.

※ 조홍식 - 1989년 프랑스 파리 정치대학(Sciences Po)을 졸업하고, 1993년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유럽통합으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베이징외국어대, 팡테옹-소르본대 등에서 객원 연구원 및 교수를 역임했고, 2006년부터 숭실대 정치외교학과에서 정치경제와 유럽정치를 가르치고 있다. 근저로는 [문명의 그물: 유럽문화의 파노라마]와 [파리의 열두 풍경] 등이 있다.

201901호 (2018.12.17)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