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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분석] 북·미 관계 경색… 文 정부 진로는 

핵 합의 깬 ‘방코 델타(BDA) 아시아’ 악몽이 또다시··· 

충격의 노딜… 여권의 중·장기 국정 운용 전략 물거품
서생적 소명의식과 냉철한 상인적 현실감각 균형 이뤄야


▎문재인 대통령이 3월 1일 광화문에서 열린 제100주년 3·1절 기념식에서 기념사를 하고 있다. / 사진:청와대사진기자단
"잠깐 사이에 어떻게…”.

2월 28일 베트남 하노이 제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소식을 접한 청와대 반응을 소개한 기사의 제목이다. 말 그대로 당혹감이 묻어난다.

반면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는 기다렸다는 듯 받아쳤다. “우리 정부는 장밋빛 환상만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실제 북핵 상황이 얼마나 엄중한지, 우리의 현실을 명확히 보여준 결과다.” ‘노딜(no deal)’로 끝난 이번 회담은 엇갈리는 여야의 반응만큼이나 향후 정국에 미묘한 파장을 드리우고 있다.

“회담이 엎어짐에 따라 청와대와 우리당이 준비해온 국정운영 계획도 전부 와장창 작살나는 건 아닌지….” 더불어민주당 한 당직자의 한탄은 ‘벙어리 냉가슴 앓는’ 여권의 속내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당초 기대했던 시나리오는 이번 회담에서 먼저 영변 핵시설 폐기(스몰딜) 또는 영변+α(빅딜) 합의와 이에 대한 상응조치로 평화선언을 주고받는 것이었다.

70년 넘게 이어져온 양측 간 적대관계 청산의 첫 단추가 끼워지는 셈이다. 이를 바탕으로 북한은 단계적 비핵화에 착수하고 북·미 간 신뢰는 깊어진다. 이런 국면에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서울을 답방함으로써 남북관계도 급물살을 탄다.

이쯤 되면 미국은 대북제재를 완화하거나 일부 제재의 해제를 허용한다. 드디어 금강산 관광의 재개 또는 남북 철도·도로 연결사업이 첫 삽을 뜨게 된다. 평양과 워싱턴에서도 미국과 북한의 연락사무소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낸다. 대략 올해 말까지 이렇게 흘러가기만 하면 내년 총선에서 여당 승리는 ‘떼어놓은 당상 격’이다. 선거구도가 ‘평화 vs 분단’ 대결로 치달을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실제 야당의 ‘정권심판론’이 여당의 ‘수구세력 척결론’에 전혀 힘을 쓸 수 없을 것이라는 전망이 쏟아지던 참이었다. 그러나 회담 결렬로 여권의 기대는 ‘한여름 밤의 꿈’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이거야말로 정국의 공수(攻守)를 단번에 바꿔버린 ‘게임 체인저(game changer)’라고 할 수밖에 없지 않겠나.” 한국당 관계자가 조심스레 내놓은 기대다. 거꾸로 얘기하면 여권으로선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형국이다. 그래서 정가의 시선은 공세의 키를 쥔 야당보다 졸지에 수세로 내몰린 여권의 반격 카드로 모아지고 있다.

2차 북·미 정상회담 합의 무산 소식을 들은 문재인 대통령의 뇌리에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무엇이었을까. 아마도 2005년 ‘9·19 공동성명’의 악몽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북한의 비핵화를 둘러싸고 현재까지 진행돼온 북·미 간 협상 양상이 그때와 매우 닮은 까닭이다.

2002년 북한의 우라늄 농축 핵개발 의혹에 따라 1994년 체결된 북·미 기본합의가 파기되면서 북핵 위기가 다시 고조됐다. 이에 북·미는 물론 한국·중국·일본·러시아가 참여하는 6자회담이 구성돼 지루한 협상이 이어지다 드디어 결실을 맺은 게 바로 ‘9·19 공동성명’이었다.

이때 합의가 제대로 이행만 됐다면 북핵 문제는 진작 평화적으로 풀릴 뻔했다. 당시 언론은 ‘북, 모든 핵무기·프로그램 폐기’, ‘미국, 북한 불가침 확인’, ‘한반도 평화구축 포럼 별도 구성’ 등의 기사로 기대를 뒷받침했다.

2005년 9·19 공동성명의 데자뷔


▎김연철 통일부 장관 후보자가 3월 11일 인사청문회 준비 사무실로 출근하며 취재진의 질의에 답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노무현 대통령도 타결 다음 날 중국에서 귀국한 우리 측 대표 송민순 외교부 차관보 등을 불러 노고를 치하하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어깨에 무거운 짐을 지고 가다 일단 수레 위에 내려놓은 느낌이다.”

그러나 장밋빛 분위기는 얼마 못 가 잿빛으로 변하고 말았다. 미국 국무부 협상팀이 북핵 합의 타결을 위해 막바지 노력을 다하고 있던 같은 해 9월 16일 미국 재무부는 마카오 은행 방코 델타 아시아(BDA)를 ‘위조달러 유통과 돈세탁의 우려 대상’으로 지목했다. 덩달아 이 은행에 있던 북한 소유 의심 계좌 52개의 자금 2700만 달러도 모두 동결됐다.

공동성명 채택으로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낙관하던 북한에는 ‘아닌 밤에 홍두깨’ 격이었다. “금융은 피와 같다. 이것이 멈추면 심장도 멈춘다.” 6자회담 김계관 북한 수석대표는 강하게 반발했다. 미국이 앞에선 북핵 타결을 위해 체제 보장을 약속해놓고, 뒤로는 돈줄을 죄면서 체제 붕괴를 획책하는 꼼수를 부렸다고 의심할 만했다.

그러나 미국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9·19 공동성명은 채 펴보기도 전에 휴지조각이 되고 말았다. 이후 상황은 악화일로로 치달았고, 급기야 북한은 그 1년 뒤인 2006년 10월 9일 1차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때 청와대 민정수석이었던 문 대통령은 롤러코스터급 상황 반전을 정확히 지켜본 소감을 자신의 저서 [문재인의 운명]에서 이렇게 회고했다. “부시 행정부가 성명을 채택하고 돌아서자마자 북한 계좌를 동결함으로써 성명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 비극의 역사가 이번에 반복될 조짐이라고 우려하고 있지 않을까. 회담 결렬 책임을 놓고 논란이 분분하지만, 대체적 분석이 미국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까닭이다. 영변+α라는 비핵화에다 생화학무기를 포함한 대량살상무기(WMD) 폐기까지 들고 나온 미국의 초강수에 북한이 뒤통수를 맞았다는 평가까지 나왔다.

사실 문 대통령으로서도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다. 지난해 제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9·19 평양공동선언’(공교롭게도 2005년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9월 19일이다)으로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법의 귀중한 단초를 만든 주인공이 문 대통령 자신이다. ‘동창리 엔진 시험장과 대륙간탄도미사일 발사대를 유관기관 참관 하에 영구적으로 폐기하며, 미국의 상응 조치에 따라 영변의 핵시설 역시도 영구적 폐기를 약속한다.’

후퇴는 없다, 정면돌파뿐


▎2005년 12월 당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이 필라델피아 세계문제협회(WAC) 연설에서 “그들은 달러화를 위조했고, 주민들을 굶겨 죽이고 있다”며 북한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 같은 북한의 비핵화 이행조치에 대해 미국은 즉각 반색하고 나섰다. 6·12 싱가포르 제1차 북·미 정상회담 이후 교착상태에 있던 북·미 간 실무 차원의 핵 협상도 재개됐다. 이후 북·미 정상 간 친서와 특사 교환 끝에 2차 회담 테이블이 마련됐다. 두 정상이 마주 앉기도 전에 협상 타결에 대한 기대가 고조됐다. 북한의 비핵화 범위와 미국 상응조치의 규모와 일정에 대해서만 설왕설래했을 뿐, 협상 결렬을 예상한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회담은 빈손으로 끝났다. 물론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웃으며 악수를 나눈 채 헤어졌고, 당장 양측 모두 서로에 대한 비난을 자제하는 몸짓이 뚜렷했다. 하지만 대체적 전망은 비관 쪽으로 흘렀다.

청와대 일부 관계자 역시 회담 결렬 소식에 당혹감을 드러냈다. 그러나 전반적으론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려는 모습이 역력했다. 문 대통령 역시 회담 결렬 다음날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회담 결과보다는 그 과정에 나름 큰 의미를 부여했다.

“2차 북·미 정상회담은 장시간 대화를 나누고 상호이해와 신뢰를 높인 것만으로도 의미 있는 진전이었다 (…) 더 높은 합의로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2005년 악몽의 음습한 그림자를 애써 떨쳐 버리겠다는 의지로 읽히기에 충분했다.

오히려 “100년 전 오늘, (갈라진) 남과 북은 없었다”면서 “우리가 주도하는 질서인 ‘신(新)한반도 체제’로 담대하게 통일을 준비해 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에 야당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쏟아냈다. “대통령의 기념사는 회담 합의 결렬에도 불구하고 전혀 고쳐지지 않은 것 같다. (마치) 합의를 가정하고 쓴 것을 수정 없이 그대로 읽은 것인지 의아하기만 하다.”(이종철 바른미래당 대변인)

평화민주당 관계자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나 역시도 대통령 말씀대로 되길 바라지만, 그 근거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문 대통령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는 게 합리적 추론이 아닐까.

9·19 공동성명 이행 무산과 이에 따른 북한의 전격적 1차 핵실험으로 한반도 긴장이 최고조로 치달았던 2006년 11월 당시 참여정부는 극비 막후교섭을 통해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한다. 그 직후 비서실장으로 영전한 문 대통령은 국정원장, 청와대 안보실장만이 참여하는 추진기획팀 ‘안골모임’을 매주 주재했다. 우여곡절 끝에 2007년 10월 마침내 정상회담을 성사시켰다.

이 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2000년 6·15 공동선언과 2005년 9·19 공동성명 이행과 이를 바탕으로 한 남북 경제협력교류 활성화를 골자로 하는 ‘10·4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했다. 이에 따라 한반도는 잠시 숨을 돌리게 됐다. [문재인의 운명]에서 문 대통령은 “지나고 보니 역시 아쉬운 게 남북 정상회담이 좀 더 빨리 이뤄졌어야 했다”면서 9·19 공동성명 이후 터진 미국의 BDA 계좌 동결을 무척 아쉬워했다. “그 공백 없이 정상회담이 열렸으면 남북관계는 훨씬 많은 진도가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번 2차 북·미 정상회담의 결렬을 지켜보면서 바로 당시의 안타까운 기억을 반추했음 직하다. 실제 문 대통령은 3·1절 기념사 사흘 뒤 9개월 만에 주재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전체회의에서 “(각 부처는) 북·미 실무 대화의 조속한 재개를 위해 힘써달라”고 채근했다. 국내 보수야당과 미국 조야(朝野) 모두 냉각기를 주장하고 있는 상황과는 또 다른 엇박자였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전혀 아랑곳 않을 태세다. “우리가 중재안을 마련하기 전에 더 급선무는 미국과 북한 모두 대화의 궤도에서 이탈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양측 간 대화의 공백이나 교착이 오래 계속되면 서로 오해가 쌓여 아예 판자체가 깨질 우려가 크다고 보는 탓이다.

결국 문 대통령은 14년 전 9·19 공동성명 무산에도 좌절하기보다는 불퇴전(不退轉)의 각오로 상황을 반전시켰던 과거 경험을 토대로 스스로를 추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국면을 한 치의 물러섬도 없이 정면 돌파하려는 그의 의지는 정책과 인사로도 드러나고 있다. NSC 회의에서 문 대통령은 “제재의 틀 내에서 남북관계 발전을 통해 북·미 대화에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을 최대한 찾아달라”고 주문했다.

김연철·김현종 발탁의 함의


▎2004년 6월 15일 열린 6·15 공동선언 4주년 기념 국제토론회에 참석한 노무현 대통령이 연설을 하고 있다.
이에 조명균 통일부 장관은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재개 방안을 마련해 미국 측과 협의하겠다”고 보고했다. 그 하나의 방법이 유엔 안보리 결의안과 미국 대북제재법에 포함된 일부 예외 조항들을 적극 활용하는 방침이다. 실제 안보리 결의안 2375호를 보면 “비상업적이고 이윤을 창출하지 않는 공공 인프라 사업”에 대한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 고위당국자는 그 사흘 뒤 현지 기자간담회에서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에 대한 제재 면제를 검토하느냐”는 질문에 “안 한다(No)”고 잘라 말했다. 언론들은 향후 대응 과정에서 한미 간 갈등 심화를 우려하는 기사를 쏟아 냈다.

여권 기류에 밝은 한 정치평론가는 문 대통령의 ‘의도된 판 흔들기’로 분석했다. “예외조항이라고 해도 어차피 현금을 북에 줄 순 없다. 그래서 금강산 관광 재개조차 결코 쉽지 않은 상태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하고 앉아있을 순 없는 것 아닌가. 무엇보다 국민적 허탈감을 악용해 또다시 반북 대결 구도로 여론과 정치가 흘러가도록 방관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음직하다.”

북·미 간, 남북 간 관계의 역주행을 반드시 막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는 회담 결렬 1주일 만에 단행된 개각에서도 분명히 드러난다. 정부 출범 후 각종 남북대화와 협력사업을 무난하게 관리해온 조명균 통일부 장관을 김연철 통일연구원장으로 전격 교체하기로 한 것이다.

30년 가까이 줄곧 통일부에서 근무해온 조 장관은 ‘안정’을 중시하며 때를 기다리는 수비형이다. 반면 소장 개혁 학자로 경제계 학계 관계를 두루 경험한 김 원장은 스스로 상황을 개척해 때를 만드는 저돌적 공격형이다. 실제 그는 문 대통령이 탐독했다는 [협상의 전략-세계를 바꾼 협상의 힘]이라는 저서에서 “신뢰는 협상의 조건이 아니라 협상이 얻어야 할 결과”라며 “믿을 수 없기에 협상을 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2차 북·미 정상회담이 깨져 서로의 신뢰가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는 이런 상황일수록 협상이 더 필요한 셈이다. 회담 결렬 이후 오히려 속도감 있는 중재자 역을 자처하며 관련 부처를 독려하고 있는 문 대통령으로서도 김 원장만 한 적임자가 없다. 그 때문에 그간 대북관계 돌파의 주요 고비마다 주역 자리를 국정원에 내주고 조연에 머물렀던 통일부가 전면에 나서 최소한 투톱의 한 축을 떠맡을 것이라는 관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2월 28일 오후 하노이 회담장에서 북·미 두 정상이 빈손으로 돌아설 시각에 단행된 청와대 안보실 2차장 교체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정통 외교관 출신 남관표 차장이 맡았던 자리에 김현종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이 새로 보임된 것이다. 정부 출범 후 북핵 위기의 평화적 국면 전환을 위해 미국·일본·중국 등 ‘안보외교’에 주력했던 남 전 차장의 이력을 감안할 때 통상전문가의 발탁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관가 안팎에선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낙관한 문 대통령이 대북제재 완화와 그 이후 본격화할 남북경제협력을 위한 미국과의 줄다리기를 감안해 ‘깜짝 발탁’했다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 참여정부 시절 한·미 FTA 체결 협상과 현 정부 출범 후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몽니’로 촉발된 한·미 FTA 재협상을 이끌며 ‘협상의 달인’으로 내외 평가를 받아왔다.

하지만 그의 인사 발표 직후 북·미 정상회담이 결렬되자 “김칫국부터 마신 꼴”, “지나친 낙관이 빚은 인사 실패”, “정보 부재가 낳은 코미디적 상황”이라는 비아냥이 제기됐다. 하지만 청와대는 콧방귀조차 뀌지 않았다.

오히려 안보실 직제를 개편해 안보실 1차장 산하에 있던 평화군비통제비서관실을 폐지하는 대신, 2차장 산하에 북한 비핵화 업무를 관장하는 ‘평화기획비서관실’을 신설했다. 북·미 정상회담 무산이라는 상황 변화에도 이럴수록 대북경협 강화 등 남북관계 발전으로 돌파구를 찾겠다는 문 대통령의 의지가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냉랭한 민심 움직일 수 있을까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김정은 수석대변인’ 발언과 관련해 홍영표 더불어민주당 원내대표(오른쪽 둘째)가 정양석 자유한국당 수석원내부대표에게 항의하고 있다. / 사진:국회사진기자단
“결국 민심, 즉 지지율 앞에 장사가 없다. 과연 국민이 이번 회담 결렬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따라 문 대통령의 ‘마이 웨이(my way)’ 지속 여부가 달렸다.” 새누리당 출신 전직 의원의 냉정한 평가다. ‘한반도 운전자’로서 중재를 서두르는 청와대 움직임을 ‘정권적 차원의 조바심’으로 깎아내린 그는 “이제 현 정권의 남북관계 약발도 끝이 보이는 것 같다”고 말했다. 회담에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결렬에 따른 실망도 클 수밖에 없고, 정권 지지율도 곤두박질칠 것이라는 예상이었다.

공교롭게도 현재까지 드러난 민심은 그의 예측대로 흐르는 분위기다. 회담 무산 직후 3월 1~2일 실시된 ‘한국사회 여론연구소’의 조사 때만 해도 여전히 기대가 큰 듯 보였다.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정부의 남북경제협력사업 추진 여부’를 물은 결과 ‘찬성한다’는 응답(64.9%)이 ‘반대한다’(33.1%) 응답보다 두 배 가까이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민심 역전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단적인 사례가 3월 11일 공개된 ‘리얼미터’의 여론조사. 3월 4~8일 5일 동안 실시된 조사에서 전체 응답자의 46.8%가 문 대통령이 국정수행을 잘못하고 있다고 답했다. 반면 잘하고 있다고 응답한 긍정평가는 46.3%였다. 오차범위 내 매우 근소한 차이이긴 하지만 부정평가가 긍정평가를 앞섰다.

무엇보다 정권 출범 후 줄곧 긍정이 앞서왔던 흐름이 부정 평가에 뒤지는 이른바 ‘데드 크로스’ 현상이 나타난 점이 주목됐다. 물론 그 앞서 9주 전 조사에서도 똑같은 현상이 벌어졌다가 바로 그 다음 주에 재역전된 바 있다. 이번 데드 크로스에 북·미 정상회담 무산에 대한 실망감이 크게 작용했다는 게 여론조사 전문가들의 일치된 평가다.

그 때문에 회담 결렬 상태가 지속될수록 여론이 악화될 공산이 크다. 실제 북한 비핵화에 대한 의구심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알앤써치’의 3월 11~12일 조사 결과 국민 10명 중 6명 가까이가 북의 비핵화 진정성을 불신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담 결렬 책임에 대해서도 국민들은 북한에 싸늘한 반응을 보였다. ‘리서치뷰’의 3월 1~3일 조사에 따르면 김정은 위원장의 책임을 묻는 의견이 44%로 트럼프 대통령(37%)보다 더 높게 나타났다.

민심의 냉정한 흐름은 회담 결렬 뒤 북한이 보여주고 있는 미심쩍은 행동으로 가속도가 붙는 느낌이다. 미국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는 회담 직후 상업 위성사진을 통해 북한 동창리 미사일 발사장의 재건 의혹을 제기했다. 이와 관련,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회담에 성공할 경우 미사일 발사장 폐기 쇼(show)의 홍보효과를 높이기 위한 목적과 협상이 실패했을 경우 다시 미사일 발사장으로 활용하기 위한 준비 등 2가지 가능성을 제시했다.

“적대·분단 청산 실패하면 역사의 죄인 된다”

미국 언론은 “(동창리 인근) 산음동에서 만들어진 로켓을 이동시키는 듯한 움직임이 포착됐다”며 추가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자 트럼프 대통령은 사흘 연속 “실망”이라는 표현으로 공개 경고했다. 대북 강경파인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은 “북한이 무엇을 하는지 눈도 깜박이지 않고 보고 있다”며 압박 강도를 높였다.

온건파로 분류돼온 스티븐 비건 국무부 대북 특별대표도 “우리는 토털 솔루션(일괄타결)을 원한다”면서 강공모드로 돌변했다. 회담 직전 보여줬던 북한의 “단계적·동시적 해법’에 동조하는 듯한 태도를 접고, 기존의 선 북핵 폐기, 후 제재 완화 방안을 고수할 뜻임을 분명히 한 것이다.

그럼에도 북한의 ‘수상쩍은’ 움직임은 계속 외신을 타고 보도되고 있다.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 아닌 로켓 형태의 우주발사체(SLV) 발사를 준비하는 동향이 계속 포착된 것이다. 미국을 직격할 수 있는 ICBM이 아닌 도발성이 약한 SLV를 만지작거리면서 대미 압박을 하고 있다는 분석이다.

정작 북한의 도발 재개 가능성에 곤혹스러운 측은 정부 여당이다. 문정인 대통령 안보특보는 북의 움직임에 대해 “사소한 악수(惡手)가 상황을 재앙적으로 만들 수 있다”고 자제를 촉구했다. 홍영표 민주당 원내대표도 국회 연설에서 “잘못 진전되면 향후 협상에 큰 난관이 될 수도 있다”며 북의 ‘현명한 판단’을 강조했다. 당·청이 한 목소리로 북한에 직접 경고 메시지를 날린 것은 다소 이례적이다. 그만큼 북의 오판이 불러올 ‘나비효과’가 결코 가볍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러잖아도 미국 언론으로부터 “누구 편이냐”는 의심을 사온 문 대통령의 중재 노력이 트럼프 행정부와의 불신으로 이어져 아예 설 자리를 잃을 수 있다. 무엇보다 어렵게 일궈온 한반도 평화 무드가 일순간 긴장과 전쟁 공포의 도가니로 돌변할 수도 있다.

미국과의 엇박자 못지않게 보수야당과의 불협화음도 중재 속도전에 나선 문 대통령에겐 적잖은 부담이다. 문 대통령에 대한 한국당 나경원 원내대표의 “김정은의 수석대변인” 공격으로 아수라장이 된 국회 풍경은 북·미 설득에 앞서 여야 간 정치적 합의가 우선돼야 함을 웅변적으로 보여줬다.

하지만 현실은 정반대로 흐를 가능성이 더 커지고 있다. 협상 추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히든카드’로 준비한 김연철 통일부 장관 내정이 오히려 정쟁의 불쏘시개 노릇을 하고 있는 탓이다. 한국당은 김 내정자의 막말에 가까운 거친 표현과 이념적 편향성을 지적하며 “지명 철회”를 외치고 있다.

특히 2차 북·미 정상회담 직전인 2월 11~12일 통일연구원장 자격으로 중국 현지에서 전문가들과 함께 유엔군사령부 해체 방안이 담긴 ‘평화협정 시안’을 논의한 사실이 보도되자 더욱 발끈했다. 유엔사 해체는 북한이 수십 년간 주장해온 ‘숙원사업’이다. 민경욱 한국당 대변인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통일부 장관이냐”라며 ‘절대 불가’를 분명히 했다.

그렇다고 문 대통령이 한국당을 ‘패싱’한 채 ‘마이웨이’를 밀어붙이기도 쉽지 않다. 데드 크로스가 발생한 국정지지율 역전 현상이 다시 뒤집히기는 현재로선 기대난망이다.

북·미 정상회담 무산 못지않게 최근 지지율 하락을 가져온 요인은 미세먼지. “30% 감소를 통해 파란 하늘을 찾아주겠다”던 대선공약은 웃음거리를 넘어 공분의 타깃이 돼버렸다. 중국 정부와의 공조, 미세먼지 저감 대책을 위한 예산 확보는 전형적 뒷북행정으로 두들겨 맞고 있다.

사상 최악의 청년실업률, 소득주도 성장 정책에도 불구하고 갈수록 악화되는 소득 양극화 등 경제 성적표 역시 운신의 폭을 좁히고 있다. 반면 한국당 지지율은 30%대로 반등하며 탄핵 이후 최고치를 기록 중이다. 여기에다 차기 대선주자 1위라는 기대를 업은 황교안 대표는 ‘좌파정권’에 대한 파상적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작용에는 반드시 반작용이 있는 게 물리법칙. 대내외적 상황이 어려울수록 이를 뚫고 나가려는 당·청의 의지도 강해질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밀릴 경우 총선 패배는 물론 정권 재창출도 ‘도루묵’이 될 수밖에 없다.

“뭐니뭐니해도 문재인 정부의 존재 이유, 그 첫 번째가 적대와 분단의 청산이 아닌가. 이를 실패하면 우리 모두는 역사의 죄인이 된다.” 여권 관계자의 말이다.

‘서생적(書生的) 소명’ 때문에서라도 북·미 정상회담 결렬로 야기된 위기의 돌파를 자신했다. 이에 못지않게 필요한 게 냉철한 상인적 현실감각. 속도전도 좋지만 차분한 가운데 치밀하게 대처하라는 얘기가 그래서 나오는지 모른다.

- 차재원 부산가톨릭대 초빙교수 jwhn20@naver.com

201904호 (2019.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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