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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계이슈] 말 많고 탈도 많은 상법 개정안 입법 

기밀 유출·소송 남발되면 기업 경쟁력 약화 우려돼 

이사회 감사위원 선임에 주주 의결권 3%로 제한돼
재산권 침해 위헌 소지에 해외 헤지펀드 침투 위험도


▎윤호중 위원장이 2020년 12월 8일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전체회의에서 상법 일부 개정 법률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주호영 원내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이 항의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2020년 정기국회 마지막 날인 12월 9일 국회는 125건의 법안을 무더기로 의결했다. 이날 상법·공정거래법·금융그룹감독법·노동조합법·특수형태근로종사자 고용보험법안 등 반기업적 과잉규제 법안도 의결됐다. 이 가운데 기업들에 가장 부담으로 작용하는 것은 상법 개정안이라는 게 재계의 시각이다.

‘감사위원 분리선임’, ‘다중대표소송제’ 등이 골자인 상법 개정안은 지난해 12월 9일 국회 본회의를 전격 통과했다. 더불어민주당이 전날 국회 법제사법위원회 등을 거쳐 법안의 단독 처리를 강행한 것이다. 이 법안의 핵심 규정 중 하나는 ‘감사위원 분리선임’인데, 국내 기업의 경영 전반을 감독하는 이사회 감사위원 선임에 대주주와 특수관계인의 행사 지분을 3%로 제한하는 등 기업 입장에서는 경영 침해 요소가 가장 높다고 할 수 있다.

외국계 헤지펀드의 경영침해 시도 본격화될 것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10월 28일 국회 본회의장에서 2021년도 예산안 시정연설을 마친 뒤 퇴장하고 있다.
각계의 우려가 커짐에 따라 민주당은 대주주와 특수관계인 제한 지분을 모두 합쳐 3%의 의결권만 인정하는 종전 안에서 한발 물러나 개별 주주별로 의결권 3% 제한으로 수정했다. 하지만 이는 ‘언 발에 오줌 누기’식 조치에 불과하다는 지적이 많다.

실제로 상법 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지 일주일도 안 돼 외국계 헤지펀드의 경영침해 시도가 본격화되는 등 위기감이 고조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14일 미국계 펀드 ‘화이트박스 어드바이저스(화이트박스)’가 LG그룹 지주사인 ㈜LG에 “LG그룹의 계열분리를 반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낸 것이다. 화이트박스는 ㈜LG의 지분 일부를 3년간 보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 초 주요 대기업의 주주총회가 잇따라 예정된 점을 감안하면 LG그룹의 사례는 전초전에 불과할 수도 있다. 해외 헤지펀드가 ‘지분 쪼개기’ 방식으로 국내 주요 기업 이사회에 마구잡이로 사외이사를 선임하겠다고 나선다면 기업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재계는 “단기 수익을 노리는 해외 펀드가 상법 개정안의 ‘3%룰’을 악용할 소지가 크다”고 우려하고 있다.

이런 위기감을 의식해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역시 지난해 12월 8일 “부작용이나 문제가 생길 경우 의결한 사람들이 책임져야 할 것”이라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해외 경쟁사에 기업 기밀 유출과 각종 소송 남발로 기업 경쟁력이 크게 약화될 것”이라며 우려를 감추지 못했다.

상법 개정안은 2020년 6월 법무부의 입법 예고부터 국회 본회의 통과까지 단 6개월 만에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이런 배경에는 당·정·청 차원의 밀어붙이기와 문재인 정부 ‘경제 인사’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이와 함께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을 비롯한 시민단체 출신 인사들의 입김이 강해진 데다 2012년 18대 대선부터 ‘경제민주화’를 주장했던 김종인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의 영향력 아래 야당의 반대 동력이 약해진 탓도 있는 것으로 재계는 분석하고 있다.

2017년 5월 출범한 문재인 정부는 공정경제, 소득주도 성장, 혁신 성장 등 3대 경제정책 기조를 주창했다. 이 가운데 공정경제 공약으로 정부는 기업규제 3법(금융복합기업집단감독법[금융그룹감독법] 제정안, 상법 개정안, 공정거래법 개정안)을 제시했다.

같은 해 7월 정부는 국정운영 5개년 계획(100대 국정과제)에 ‘재벌 총수 일가 전횡 방지 및 소유지배구조 개선’을 포함했다. 또 이듬해인 2018년 법무부는 상법 개정을 위해 상법특별위원회를 구성한 뒤 감사위원 분리선임 등 주요 쟁점 사항에 대한 검토의견서를 국회에 제출하는 등 상법 개정안의 입법화를 추진했다.

정부여당 밀어붙이고 시민단체 거들어 통과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이 2020년 12월 8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회관에서 긴급 기자간담회를 개최하고 있다. / 사진:대한상공회의소
상법 개정에 대한 의지는 문재인 정권의 ‘경제 인사’ 발탁을 통해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참여연대·경실련과 함께 조속한 상법 개정을 주문했던 경제개혁연대 출신 김상조 한성대 교수가 공정거래위원장에 이어 청와대 정책실장을 맡게 됨에 따라 상법 개정안 통과에 대한 추진 동력이 커진 것으로 재계는 파악하고 있다.

김상조 정책실장은 한성대 교수 시절이던 2016년 8월 언론 인터뷰에서 “시장 이해관계자들이 자신의 권리를 명확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상법과 자본시장법을 개선해야만 근본적인 경제민주화와 기업지배구조 개선이 이뤄질 수 있다”며 “이번 국회에서는 반드시 상법 개정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어 2020년 6월 법무부가 감사위원 분리선임(합산 3%룰), 다중대표소송제 도입, 전자투표제 실시 등이 골자인 상법 일부개정법률안(이하 상법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 현 정부의 국정과제인 점을 의식한 민주당은 입법 성과를 내기 위해 총력을 다했다. 21대 국회 들어 박용진·박주민 의원 등이 각각 상법 개정안을 대표 발의하기도 했다.

주목할 것은 박용진 의원 안의 감사위원 분리선임 규정은 ‘합산 3%’ 룰이 적용되지 않은 반면, 박주민 의원 안의 같은 규정은 사외이사 전체에 ‘합산 3% 룰’을 적용하도록 하는 등 법무부 안과 조금씩 변형된 안을 발의했다는 점이다. 재계 관계자는 “여당 의원들이 정부 안과 유사 법안을 중복 발의하면서 현 정부의 국정과제 추진에 힘을 실어준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처럼 재계의 우려가 커지자 이낙연 민주당 대표가 지난해 10월 6일 한국경영자총연합회(경총)에서 상법 개정안을 비롯한 기업규제 3법 간담회를 열어 “기업규제 3법과 관련해 큰 방향성을 바꾸거나 시기를 늦추는 것은 어렵다”면서도 “외국 헤지펀드에 한국 기업을 노리게 틈을 열어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에 대한 보완책은 검토하겠다”며 한발 물러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후 이어진 수 차례의 민주당-경제계 정책간담회에서 경제계가 제시한 우려와 대안은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결국 재계의 기대감은 수포로 돌아갔다. 심지어 투기자본에 의한 기술 유출을 우려해 민주당 양향자 최고위원이 제시한 ‘소수주주권 행사 시 1년 의무보유기간 도입’ 등 당내에서 제시된 대안도 전혀 반영되지 않았다.

정부여당에 이어 김상조 정책실장이 소장을 지낸 경제개혁연대와 경실련·참여연대 등 시민단체들도 정부와 여당을 압박하고 나섰다. 법무부의 상법 개정안 입법 예고 직후부터 올해까지 “기업 지배구조 개혁의 방향을 밝힌 만큼 흔들림 없이 추진하라(참여연대)” “기업규제 3법에 반대하는 재계, 국민의 지지 얻지 못할 것(경제개혁연대)” 등 수십 여 건에 달하는 논평을 내놓은 데 이어 상법 개정안 통과를 지지하는 토론회를 잇따라 여는 등 정부와 여당을 압박했다.

경제계 “대안입법 검토 필요한 시점”


당·정·청과 시민단체의 합작이 이어지는 가운데 상법 개정안에 반대 의사를 표했던 야당(국민의힘)은 무력한 대응에 그쳤다. 상법 개정안에 대한 야당의 저지 동력이 약화된 근본 원인은 2020년 4월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취임한 김종인 위원장에 있다는 것이 재계 일각의 주장이다. 김 위원장은 청와대 경제수석이던 1987년 개헌 당시 119조 2항에 ‘경제의 민주화’라는 개념을 반영한 장본인이다.

해당 조항에는 ‘국가는 균형 있는 국민 경제의 성장 및 안정과 적정한 소득의 분배를 유지하고, 시장의 지배와 경제력의 남용을 방지하며, 경제주체 간의 조화를 통한 경제의 민주화를 위해 경제에 관한 규제와 조정을 할 수 있다’고 언급하고 있다.

헌법에도 명시된 ‘경제민주화’의 필수 과제로 ‘재벌 개혁’을 강조한 김 위원장의 영향 아래, 현 정부의 상법 개정안 추진에 제1야당이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하지 않았다는 게 정·재계 일각의 주장이다. 정계 관계자는 “당(국민의힘) 내부적으로 ‘경제민주화’를 강조한 김종인 위원장의 지론이 영향을 끼쳤을 수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야당의 경우 2020년 7월 국민의힘 윤창현 의원실이 자유시장연구원·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와 개최하는 등 표면적으로는 여당의 상법 개정에 반대하는 행태를 취하기도 했다. 그러나 당내 입장조차도 정리하지 못하는 등 상법 개정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기 위한 실질적인 역할은 하지 못했다.

국민의힘 일부 의원은 국내 기업의 경영권 방어 보호장치를 마련하는 법안을 발의하는 등 구체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추경호 의원은 지난해 8월 상법 개정안에 대응하고 기업의 실효성 있는 방어 수단을 마련하고자 ‘차등의결권’과 ‘신주인수선택권 포이즌필’을 도입하는 상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그럼에도 국민의힘은 민주당의 폭주를 막아낼 수 없었다. 애초 국민의힘은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 개정안과 더불어 상법 개정안에 대해서도 필리버스터(무제한 토론)를 신청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당내 일부 반대 기류를 의식한 탓에 총력을 다하지는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재계 관계자는 “정부와 민주당은 수차례 공청회를 열었다고 하지만 이는 재계 입장을 듣는 시늉에 그쳤으며, 야당 역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며 “재계 입장은 거의 반영하지 않는 일방통행식 법안 처리가 강행됐다”고 비판했다. 이어 “경제계가 제시했던 우려와 다양한 대안을 다시 들여다보는 한편, 정치적 이해관계를 떠나 해외 투기자본에 의한 국내 기업들의 경영권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대안입법에 대한 검토가 꼭 필요한 시점”이라고 덧붙였다.

- 최경호 월간중앙 기자 squeeze@joongang.co.kr

202102호 (2021.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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