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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문명기행 | 한류의 기원을 찾아서(1)] 한류의 뿌리,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의 대한제국관 

서럽게 묻힐 뻔했던 '직지'의 역사를 더듬다 

구텐베르크 [성경]보다 78년 빠른 [직지]가 관람객에게 외면받았던 까닭은?
근대화 성공한 일본의 자포니즘 각광받았지만, 힘없고 가난한 한국은 관심 밖


▎2017년 덕수궁 대한문에서 대한제국 선포 12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열렸다. 대한제국은 국력과 문화의 전파력이 정비례 관계임을 드러내는 반면교사다.
한류(韓流)란 이미 우리에게 감동보다는 식상함이 더 큰 단어가 됐다. 30여 년 전, 일부 중화권 국가에 한정됐던 그 물결이 이제 전 세계로 퍼져 나간 지 오래다. K팝이나 화장품, 스마트폰 등 특정 제품이나 몇몇 대중 스타에 한정되던 열광이 이제는 한국 문화 자체를 좋아하고, 이를 즐기기 위해 한국어까지 배우는 열풍으로 전 세계를 달구고 있다. 이런 한류의 힘은 어디서 기원하는 것일까? 우리가 가진 잠재력은 무엇이고, 그것이 폭발하는 임계점은 어디이며 그것에 불을 댕기는 방아쇠는 무엇인가. 역사 속에서 그 답을 찾아본다.

1900년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프랑스 파리의 샹드마르스 광장. 센강에 맞닿은 광장의 북쪽 끝에는 높이 300m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이던 에펠탑이 범접하기 어려운 위용과 우아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1889년 개최된 파리 만국박람회 기념물로 지어진 에펠 탑은 뜨거운 존폐 논란에도 불구, 11년 뒤 파리에서 다시 열린 만국박람회에서도 관문 역할을 했다. 이를 위해 50t이 넘는 페인트를 새로 칠하고 탑 전체를 전구로 장식했다.


▎1900년 열린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의 풍경. / 사진:unjourdeplusaparis.com
에펠탑을 지나 각국 전시관이 줄지어 늘어서 관람객을 유혹하고 있는 샹드마르스 광장의 남쪽 끝에 이르면, 광장의 서쪽을 따라 이어지는 쉬프렌 대로 앞에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 전형적인 팔작지붕을 얹고 있는 2층 한옥 한 채가 오도카니 서 있었다. 관람객에게는 낯선 이름인 대한제국관이었다.

전시관은 바로 국력의 상징이었다. 국력이란 결국 경제력이고 전시관을 화려하게 꾸밀수록 많은 비용이 드는 것은 정해진 이치인데, 아시아 한쪽 끝에서 온 가난한 신생 제국의 전시관은 과연 어땠을까. 당시 파리 만국박람회를 소개했던 공식 책자와 신문 기사들을 보면 한국 전시관은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던 것 같다. 당시 발간된 박람회 공식 책자에서 소개한 한국관의 모습은 이렇다. ‘한국 대표단은 쉬프렌 대로에 극동의 모습을 잘 살린 우아하고 독창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320㎡ 넓이의, 화려한 색을 입힌 목조건물로 골조는 금색으로 빛난다. 하늘로 솟은 처마와 커다란 지붕은 한국의 독특한 건축양식을 보여준다. 입구는 서울의 주택 문으로 재현했고 내부는 황제가 기거하는 궁궐의 알현실을 본떴다. 모든 벽에는 오래된 명주 천이 걸려 있다. 전시관 주위로 난간이 달린 회랑이 있다.’

당시 프랑스 4대 일간지 중 하나였던 [르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 1900년 12월 16일 자에 한국 전시관의 모습을 담은 삽화가 실렸다. 삽화에는 난간을 두른 단 위에 세워진 2층 한옥이 있고, 그 주변에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서 있거나 의자에 앉아 있다. 오른쪽 위에는 태극기까지 그려져 있다.

역시 4대 일간지 중 하나였던 [르 마탱(Le Matin)]이 이듬해 발행한 화보집 [1900년](폴 제르 저)은 한국과 관련해 4쪽을 할애하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제국관의 내부와 외부를 찍은 사진도 실려 있어 한국관이 어땠는지 살펴볼 수 있다. 분명 근정전의 축소판이기는 한데, 처마가 좀 더 좁고 길게 솟아올라 베트남 또는 태국의 왕궁을 닮아 보이기도 한다.

우리 자본·기술과 무관한 대한제국관


▎1900년 파리 쉬프렌 대로 앞에 경복궁 근정전을 본떠 만든 대한제국관. / 사진:2012여수엑스포 사이트
그것은 대한제국관이 순수하게 우리의 자본과 기술로 지어진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실 일본·러시아·중국 등 열강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는 작고 힘없는 나라가 당시 최고 선진국이던 프랑스의 수도 파리 한복판에 전시관을 설치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이었다. 자주독립을 유지하려는 우리의 절망적인 노력과 만국박람회를 성공시켜 근대화에 앞장서는 최고의 문명국가로 우뚝 서려는 프랑스의 야심이 맞아떨어졌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1851년 영국 런던에서 처음 열린 만국박람회 이후 1937년까지 모두 여덟 번이나 만국박람회를 개최한 프랑스는 특히 새로운 20세기를 여는 의미를 가진 1900년 박람회 준비에 온 힘을 기울였다. 이에 역대 박람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대규모 대회를 준비하면서 더 많은 국가의 참여를 유도하기 위해 가난한 국가들에 경제적 지원을 했다. 정부 차원의 예산 편성은 물론, 산업혁명과 식민지 투자로 자본을 축적한 귀족들에게 후진국에 대한 지원을 독려했다.

대한제국의 경우도 알퐁드 드 글레옹 남작이라는 후원자가 있었다. 그런데 전시관 공사가 시작될 무렵 남작이 급작스럽게 사망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대한제국의 참가가 무산될 뻔했으나 다행히 새로운 후원자가 나타났다. 후임자인 미므렐 백작은 비용을 줄이기 위해 당초 설계를 축소했다. 그조차 공짜는 아니었다. 지원의 대가로 대한제국에서의 광업과 철도 사업권을 요구했고 고종 황제는 이를 승인했다.

전시관 건축을 위해 한국의 장인들을 부른다는 것은 대한제국으로서 엄두도 내지 못했을 테고, 프랑스 정부로서도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마침 베트남 사이공에 오페라 하우스를 짓고 있던 프랑스의 유명 건축가 유젠 페레가 한국관의 설계를 맡았다. 그는 이탈리아 산레모에도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 대성공을 거둔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산레모 극장은 카지노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는 대한제국관 건축을 위해 한국을 방문해 근정전을 둘러본 뒤 자신이 받은 영감을 대체로 성공적으로 재현해냈다.

대한제국관에 어떤 물품이 전시됐는지 전시품 목록은 남아 있지 않다. 하지만 당시의 신문·잡지에 실린 기사들과 사진, 프랑스 정부와 대한제국 사이에 오고 간 문서들을 보면 물품 선정을 위해 상당히 고심한 흔적이 보인다. 황실이 제공한 물품과 한국에 거주한 프랑스인들이 수집한 물건들 외에도 민간에서 모집하기도 했다. 1989년 6월 3일 자 [독립신문]에는 이런 광고가 실렸다. ‘내년(1900년) 프랑스 파리 만국박람회에 귀하고 좋은 각종 물품을 친히 가지고 가서 팔고자 하는 사람이나 물건 주인이 물건값을 정하여 보내려 하는 사람은 양력 6월 8일 내로 매일 오전 7시부터 8시 안에 진고개 좌동과 성관으로 왕립하여 상의하시기 바랍니다. -법국(프랑스) 사람 트레물네’

트레물네는 대한제국의 박람회 참가를 위한 재정 후원자 중 한 사람이다. 이런 노력들을 통해 상당한 수준의 전시품 목록이 꾸며진 것으로 보인다. [르프티 주르날]은 “한국의 자원과 산업 전반에 대해 알려주는 인상적인 물품들이 세련되게 배치되어 있다”고 평가했다. 폴 제르가 [1900년]에서 예시한 전시 품목에는 “화려하면서도 조화로운 색감의 실크, 청아한 백자 도자기, 정교하며 반듯한 모양을 가진 다양한 크기의 놋그릇, 금과 은, 나전칠기와 칠보로 장식된 가구와 공예품, 해금이나 북 등의 악기, 나막신과 비단신, ‘한국의 인쇄술을 이용해 만든 책’ 등”이 있다.

폴 제르는 “근대화를 통해 세계와 소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고자 하는 한국의 전시를 눈여겨볼 만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국을 “산과 숲, 가축과 어류, 숯과 금 등 자원이 풍부한 나라”로 묘사했으며 “공정한 정부, 산업화를 촉진하는 철도와 도로 건설 등 앞으로 개혁을 통해 이뤄낼 성장이 기대되는 나라”라고 우리가 듣기에 조금은 민망한 설명을 하고 있다.

국제사회에 처음으로 한국이 공식적이고 본격적으로 소개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1889년 파리 박람회, 1893년 시카고 박람회에도 참여했지만, 그때는 독립된 전시관 없이 몇 가지 물건만 전시하는 수준일 뿐이었다.

대한제국 정부가 고대했던 ‘미래’


▎프랑스 일간지 [르 마탱]이 발행한 화보집 [1900년]. / 사진:2012여수엑스포 사이트
폴 제르가 한국을 소개하면서 내린 우호적인 평가는 그야말로 대한제국 정부가 고대해 마지않는 미래였다. 대규모 국제행사인 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열강의 간섭에서 벗어나 국제사회의 당당한 일원으로 우뚝 서기를 바랐다. 그런 의미에서 대한제국도 대회 참가가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내린 것 같다. 그런 기회를 제공한 프랑스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였다. [고종실록]을 보면 파리 박람회에 파견됐던 한국 대표단의 단장 격인 민영찬이 훈장을 상신하는 기사가 나온다. “박람회 때 대한박물국(大韓博物局)에서 일을 본 여러 프랑스 사람들이 수고가 퍽 많았으므로 그 공로를 논의하지 않을 수 없기에 각각 해당한 사람의 성명을 적어 올립니다.”(1901년 5월 31일)

이에 고종 황제는 그들에게 적절한 등급의 팔괘장(八卦章)을 하사했다. 하지만 현실은 대한제국에 그렇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평화롭게 만국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순간에도 국제사회는 결코 평화롭지 않았다. 서구 제국들은 평화와 식민지를 같은 테이블에서 이야기했다. 그들에게 평화란 힘 있는 자들 사이의 평화였다. 국제사회란 한마디로 약육강식의 정글이었다. 서구 제국들은 정글 속의 맹수였고, 맹수들 사이의 평화란 다른 맹수가 잡은 먹이를 놓고 다투지 않는 것을 의미할 뿐이었다. 맹수들의 평화 속에서 대한제국은 곧 동양 평화를 외치던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할 터였다.

'직지'의 숨겨진 가치


▎초대 주한 프랑스대리공사 드 플랑시(왼쪽)와 [한국서지]를 발간한 모리스 쿠랑. / 사진:위키피디아
힘없고 가난한 극동의 작은 나라 전시관에 관람객의 발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전시장이 광장의 끝이긴 했지만 결코 후미진 곳이라고는 할 수 없는 위치였다. 민영찬은 “우리 전시품이 하찮아 사람들이 보러 오지 않는다”고 한탄했다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전시품이 하찮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관람객이 대한제국이라는 나라에 아예 관심이 없었던 것이 더 큰 이유였다. 존재감도 없는 작은 나라의 전시관을 뭐 하러 찾아간다는 말인가. 극동에는 떠오르는 별이 따로 있었다. 청일 전쟁에서 승리해 중국이 이빨 빠진 호랑이라는 것을 전 세계에 알린 일본이었다. 박람회에서 일본이 판매한 도자기의 포장지로 사용했던 우키요에(일본 에도 시대의 목판화)가 고흐나 모네 등 화가들에게서 극찬을 받으며, 유럽에 ‘자포니즘(일본풍)’의 유행을 몰고 온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열강들에게 힘없고 가난한 나라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맹수가 자신의 먹잇감이 지르는 비명을 귀담아들을 리 없었다. 먹잇감이 아무리 우아한들 그 모습에 감탄하고 바라보는 맹수가 있겠나. 먹잇감은 오로지 먹잇감일 뿐이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대한제국관에 전시됐던 한 물건에 국제사회의 시선이 그렇게 냉담하고 냉소적일 수 없었다. 앞서 말했던 대한제국관의 전시 물품 중 ‘한국의 인쇄기술을 이용해 만든 책’이 그것이다.

그것은 ‘직지(直指)’라는 제목이 붙어 있는 책 한 권이었다.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상·하 두 권으로 된 책의 하권이었다. 해석을 하자면 ‘백운화상이 선(禪)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핵심 주제들을 간추려 펴낸 불교 교리서’라는 뜻이다. 석가모니를 비롯한 과거 7불과, 석가모니로부터 불법을 전수받은 인도의 28조사, 중국의 110선사의 게와 송, 설법 등 307편이 상·하 두 권에 수록돼 있다. 우리나라 승려로는 유일하게 신라의 대령선사가 포함됐다.

책의 주제인 ‘직지심체’는 ‘직지인심 견성성불(直指人心 見性成佛)’이라는 선종 명구에서 따온 것이다. 사람이 눈을 밖으로 돌리지 않고 자기 마음을 직시해 본성을 깨닫는다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다. 훌륭한 말씀이지만 내용만으로는 이 책의 가치가 대단하다고 할 수 없다. 상·하권 모두 갖춘 완전한 [직지] 판본이 국내에 여러 권 존재하고 있는 까닭이다. 이 책의 가치는 하권 말미에 있는 간행 기록에 있다. ‘선광 7년 7월 일에 청주목의 교외에 있는 흥덕사가 금속활자로 찍어 베푼다(宣光七年丁巳七月日 淸州牧外興德寺鑄字印施).’

이 짧은 한 문장 중에서도 ‘선광 7년’과 ‘주자(鑄字)’라는 두 단어가 핵심이다. 선광은 명나라의 주원장에게 밀려 몽골 고원으로 돌아간 북원의 2대 황제 소종의 연호다. 선광 7년이면 고려 우왕 3년이고, 서기 1377년이다. 주자란 문자 그대로 쇠를 녹여 글자를 만든다는 뜻이다. 따라서 1377년에 금속활자로 인쇄했다는 말이 된다. 이는 독일의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로 [42행 성경]을 인쇄한 1455년보다 78년이나 빠른 것이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으로 등극하는 순간이다. 1990년 파리박람회의 대한제국관에 전시됐던 [직지]는 우리가 출품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구한말에 주한 프랑스대리공사와 공사 겸 총영사로 두 차례에 걸쳐 모두 13년간 한국에서 근무했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가 구입한 것이다. 파리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국립동양언어문화학교(INALCO)에서 중국어를 공부한 드 플랑시는 아시아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고서와 도자기, 공예품을 폭넓게 수집했다. 그는 책을 수집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한국의 책들을 체계적으로 분류해 정리하는 서지 편찬 작업도 했다.

드 플랑시는 초대 공사로 근무할 당시 한국에 부임해온 부하직원 모리스 쿠랑에게 권유해 서지 편찬 작업을 이어가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1894~1896년 3년 동안 매년 1권씩 총 세 권의 [한국서지]가 발간됐다. 이어 1901년에 ‘부록 편’까지 네 권의 [한국서지]가 나왔으며, 총 3801종의 한국 서적에 대한 소개와 설명을 실었다. 그중에서 [직지]는 부록 편의 3738번으로 기재돼 있다.

[한국서지] 부록에도 [직지]는 1377년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파리 박람회의 대한제국관 전시에서도 같은 설명이 붙어 있었다. 드 플랑시나 쿠랑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런데 왜 그러한 놀랄 만한 사실이 강조되지 않고 박람회에서 철저하게 외면되고 말았을까. 1997년 미국 잡지 [타임-라이프]가 지난 1000년간 인류의 가장 중요한 발명품으로 전기와 컴퓨터, 페니실린 등을 모두 젖혀두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을 꼽았으며, 월트디즈니컴퍼니의 자회사인 방송사 A&E 네트워크도 1999년 지난 1000년간의 가장 중요한 인물로 구텐베르크를 선정했을 만큼 금속활자 인쇄술을 세상을 바꾼 대사건으로 인식하고 있는 서구에서 말이다.

그것은 앞서 얘기한 대로 국제사회는 극동의 보잘것없는 나라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무리 칭제건원을 한들 서구인들의 눈에는 토끼가 호랑이 가죽을 뒤집어쓴 꼴밖에 되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서지]를 만든 쿠랑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직지]가 1377년 금속활자로 인쇄됐다는 말미의 기록을 설명하면서, “그 내용이 정확하다면 주자, 즉 금속활자의 공식 발명 연도로 삼는 태종 3년(1403)의 계미자보다 26년이나 앞선 것이 된다”고 부언하고 있다. 도무지 믿기 어렵다는 속내가 읽힌다.

한국 신기록으로 추락한 세계 신기록


▎[직지]는 금속활자로 인쇄된 세계 최초의 책이다. / 사진:한국학중앙연구원
이런 태도는 책의 소유권을 갖고 있던 드 플랑시 공사도 마찬가지였다. 만국박람회에 참여한 보람도 없이 우리의 주권은 갈수록 쪼그라들었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우리나라의 외교권을 박탈한 일본은 이듬해 벽두부터 서울 주재 각국의 영사관을 철수시켰다. 태국 방콕으로 전근됐다가 1907년 프랑스로 돌아간 드 플랑시는 1911년 자신이 한국·중국·일본에서 수집한 소장품 883점을 경매에 내놨다. [직지]도 이때 함께 경매돼 앙리 브베르라는 골동품 수집가에게 180프랑에 넘어갔다. 드 플랑시가 [직지]의 가치를 인정했다면 경매에 내놓았을 리가 없을 터였다.

이후 [직지]는 브베르의 유지에 따라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기증됐다. 표지에 ‘한국 109’라는 도장이 찍혔다.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109번째로 소장된 한국 책이라는 의미였다. 표지에는 수기로 책에 대한 설명도 적혔는데 이것이 재미있다.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알려진 가장 오래된 한국 책, 연대=1377이라고 부기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


▎[직지]는 1377년 흥덕사에서 인쇄됐다는 분명한 간행 기록을 지니고 있다. / 사진:위키피디아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이 아닌,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알려진’ 것이다. 인쇄 연대도 ‘1377년에 인쇄’라고 단정한 것이 아니라, ‘1377년에 인쇄됐다고 쓰여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여기에서 ‘한국’이라는 단어는 나중에 추가된 것이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가장 오래된 책’이었다가 ‘가장 오래된 한국 책’으로 바뀐 것이다. 세계 신기록이 한국 신기록으로 추락한 것이다.

물론 정확한 사실이 밝혀질 때까지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학문적 회의주의는 인정돼야 한다. 하지만 그 문장에는 ‘제깟 것들이 어떻게 1377년에 금속활자 인쇄를 할 수 있겠어’라는 뉘앙스가 깔렸다고 느끼는 게 자격지심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토록 귀한 책의 표지에 메모를 하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을 터다.

그렇게 [직지]는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지하 서고에 들어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혔다. 그렇게 60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유네스코가 1972년을 ‘세계 도서의 해’로 지정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프랑스는 그해 5월부터 10월까지 ‘세계 귀중 도서전’을 연다. 이때 다행히도 파리 국립도서관에는 프랑스 국적을 가진 한국인 서지학자 박병선 박사가 있었다. 프랑스 유학 비자를 받은 최초의 한국 여성으로서 프랑스에서 박사 학위(역사학·종교학)를 취득한 박병선은 이른바 ‘동백림사건’의 독수를 피하기 위해 1967년 프랑스로 귀화한 뒤 국립도서관 연구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프랑스에 가면 병인양요 때 약탈당한 외규장각 의궤를 찾아보라”는 스승 이병도의 당부를 잊지 않고 있던 그녀는 파리 국립도서관의 한국 서적들을 조사하다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 [직지]를 발견했다.

그렇게 [직지]는 서고에서 잠을 깨고 나와 세계인들 앞에 다시 나왔다. 이번에는 박병선의 적극적인 설명이 보태졌다. 여전히 미심쩍어 했지만 국제사회의 관심은 한층 커졌다. 전문가들의 연구가 이어졌고, 재래의 밀랍주조법으로 만든 금속활자로 찍은 판본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금속활자본이라는 결정적인 증거는 다음과 같다. 당시 정교하지 못했던 금속활자 인쇄술, 게다가 국책사업이 아닌 사찰 단위의 인쇄에서 발생한 하자들이 오히려 결정적 증거로 작용한 것이다. 내용을 파악하는 주제 서지에는 해박했지만 활자본을 감식하는 형태 서지에는 지식이 부족했던 쿠랑과 드 플랑시, 프랑스 국립도서관 관계자들이 놓쳤던 증거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해 [직지]는 구텐베르크의 [42행 성경]과 함께 2001년 9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됐다. 파리 국립도서관은 이후 [직지]를 별도의 단독 금고에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가 [직지]의 가치를 알아본 것도 1972년에서였다. 국제사회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도 그 전까지는 [직지]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이후 [직지] 반환 운동이 적극적으로 벌어지고, 금속활자 인쇄술의 연대를 앞당기려는 연구도 활발히 진행됐다. 하지만 정작 중요하고 우리가 반추해봐야 할 것은 그것이 아니다.

대중의 동력 없이 문화 세계화는 불가능

중요한 것은 [구텐베르크 성경]은 인쇄기와 인쇄술을 내세우지만 [직지]는 금속활자를 강조할 뿐이라는 것이다. 그 결과는 천양지차다. 구텐베르크가 와인 제조를 위한 포도 압착 기술을 이용해 인쇄기를 발명한 이후 인쇄소와 서적 인쇄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인쇄기 발명 50년 만에 유럽 전역에 240개 이상의 인쇄소가 만들어지고, 약 1000만 권의 책이 인쇄됐다. 구텐베르크 이전까지 필사본 3만 권이 고작이었던 유럽의 출판이 16세기에 약 2억 권, 18세기에는 10억 권 이상으로 늘어났다.

하지만 우리는 [직지] 이후에도 크게 달라진 게 없었다. 15세기 동안만 11종의 금속활자가 만들어졌지만 그것으로 인쇄된 책은 1000종을 넘지 않았고, 부수도 각각 20~200부에 불과했다. 고려와 조선에서는 국가가 직접 서적 간행과 보급, 유통을 독점하면서 불경과 유교 경전의 간행에 주력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인쇄 혁명이 귀족·성직자가 독점했던 지식을 일반 대중에 확산시키는 지식 혁명을 가져왔고, 그것이 르네상스와 산업혁명으로까지 이어지는 결과를 낳았다면 우리는 여전히 지식이 국가와 귀족사회의 틀 안에 머물러 있었다.

역사의 도도한 흐름은 국가의 주도로만 가능한 게 아니다. 국가가 불을 댕겼더라도 일반 대중의 지지를 받아 그들의 참여가 동반돼야 하는 것이다. 그 흐름이 우리나라의 담장을 넘어 세계로 뻗어가는 것도 그러한 대중의 동력이 없이는 불가능하다. 그런 진리를 깨닫지 못했기에 세계에서 가장 먼저 금속활자를 만들어 쓴, 잠재력 무궁무진한 나라가 오늘날 전 세계에서 거세게 흐르고 있는 한류의 물결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기까지 700년 이상의 세월을 기다려야 했다.

※ 이훈범 - 남들이 못 보는 세상을 보고 싶어 기자가 됐고, 기자로 살며 본 세상을 칼럼에 녹였다.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떠다니는 구름을 동경했지만, 32년을 중앙일보에 얽매였다 지난해 해방됐고 이제 새로운 글쓰기에 도전하고 있다. 역사에서 혜안을 얻는 게 삶의 기쁨이다. [역사, 경영에 답하다], [세상에 없는 세상수업], [품격] 등 책을 몇 권 펴냈다.

202301호 (2022.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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