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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중의 뮤지컬 오디세이(마지막회)] 이룰 수 없는 사랑의 아픔,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외국 고전에 한국 정서 입혀 탄생한 새로운 창작 뮤지컬 

‘한국적 뮤지컬 세계화’ 붐 일던 2000년 낯선 시도로 등장
익숙한 줄거리와 아름다운 곡으로 팬덤 만들며 흥행 성공


▎뮤지컬 [베르테르]는 외국의 고전을 원작으로 삼은 창작 뮤지컬의 효시다. 2000년 초연한 뒤 아름다운 선율로 관객을 사로잡았다. 2020년 8월 서울 광림아트센터 BBCH홀에서 열린 20주년 기념 공연은 더 크고 화려하게 각색했다. / 사진:CJ ENM
뮤지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하 ‘베르테르’)은 2000년 11월 연강홀(현 두산아트센터)에서 초연됐다. 공연을 보러 가면서 ‘서양 고전을 갖고 왜 창작 뮤지컬을 만들었을까?’라는 생각을 얼핏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만 해도 해외 작품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은 드물었다.

공연장에 들어서니 아담하고 서정적인 질감의 무대가 한눈에 들어왔다. 왼쪽 구석엔 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오보에, 피아노로 구성된 5인조 실내악단이 있었다. 초연 배우들은 베르테르 서영주, 롯테 이혜경, 알베르트 김법래였다. 음악은 클래식을 전공한 작곡가 정민선이 만들었고, 극본은 지금은 중견이 된 고선웅이 썼다. 연출은 연극에서 잔뼈가 굵은 김광보(현 국립극단 예술감독)가 맡았다.

[베르테르]는 연주곡 ‘금단의 꽃’으로 시작됐다. 감성적인 현악의 멜로디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었다. 계절의 정취와 어울리는 실내악 연주회에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색다른 첫 느낌은 공연이 흐르면서 가슴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됐다. 애잔한 선율을 담은 아름다운 아리아는 스멀스멀 가슴을 적셨고, 괴테의 고전이 지닌 낭만적 향기를 살린 대사도 조금씩 마음을 두드렸다. 원작의 서간체 형식을 세 인물의 삼각관계로 재구성한 드라마는 배우들의 개성과 어우러지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의 비극성을 향해 조금씩 소용돌이쳐 갔다. 창작 뮤지컬이었지만 외국 이야기였고, 서양이 배경이었지만 묘하게 한국적이었다. 창작 뮤지컬은 물론 해외 뮤지컬에서도 접하지 못했던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마지막 장면은 아주 강렬했다. 붉게 물든 화면을 배경으로 자신의 관자놀이에 권총을 들고 서 있는 베르테르의 검은 실루엣. 그리고 터지는 총소리. 가슴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베르테르]는 2000년 초연 이후 2021년까지 여러 차례 재공연됐다. 2013년에는 일본 도쿄에서 공연돼 찬사를 받았다. 그 사이 작품 규모도 중극장에서 대극장으로 업그레이드됐다. 여러 연출가가 번갈아 작업하면서 작품 해석과 무대 세트 등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베르테르]의 성공은 창작 뮤지컬의 관행에서 벗어난 새로운 이야기의 선택에서 시작되었다. 우리 역사나 전설, 설화가 아닌, 독일의 문호 요한 볼프강 폰 괴테가 1774년 발표한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원작으로 선택했다. 우리 이야기가 아닌 외국의 고전에 눈을 돌린 것이다. 당시로써는 매우 도전적인 시도였다.

괴테는 당시 남편 있는 여자를 사랑하다 자살한 친구의 사건을 토대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썼다. 친구의 배우자를 짝사랑해본 아픔이 있던 괴테는 자신의 경험담을 녹여내어 열정과 여린 감수성을 갖춘 베르테르를 그려냈다.

서양 고전 활용한 발상의 전환


▎독일의 대문호 괴테가 쓴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이뤄질 수 없는 짝사랑에 괴로워하던 베르테르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비극적 소설이다. / 사진:두레출판사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출간 당시부터 큰 파장을 일으키며 18세기 유럽 대륙을 휩쓴 ‘질풍노도’ 운동에 불을 질렀다. 젊은이들 사이에서 베르테르가 입었던 노란색 연미복이 크게 유행했고, 나폴레옹도 전쟁터에서 틈틈이 몇 번을 읽었다고 한다. 아울러 베르테르처럼 사랑 때문에 목숨을 끊는 사건도 빈번하게 일어났다. ‘베르테르 효과’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괴테는 서문에서 이렇게 부탁하고 있다. “여러분은 베르테르의 정신과 성품에 대해서는 감탄과 사랑을, 그리고 그의 운명에 대하여는 눈물을 금치 못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베르테르처럼 절실한 애정을 지닌 착한 사람은 그의 슬픔에서 위안을 얻을 것입니다. 만일 당신이 어떤 운명으로 말미암아, 아니면 자신의 죄책 때문에 감명을 느낄 수 있다면 이 조그마한 책을 애써 당신의 친구로 삼아주십시오.” 사랑 때문에 상처를 받았건, 아니면 상처를 주었건 치유의 용도로 이 소설을 활용하라는 당부다.

괴테의 소설은 베르테르가 벗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있다. 뮤지컬은 베르테르와 그를 사랑에 빠지게 하는 아가씨 롯테, 롯테의 약혼자 알베르트 등 3명을 중심으로 드라마를 재구성했다. 괴테의 원작이 지닌 향기와 깊이를 살리면서 우리의 감성과 취향에 맞게 스토리와 무대를 새롭게 짰다.

‘외국의 고전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라는 [베르테르]의 전략은 당시로선 ‘제3의 길’이었다.

대중성에 초점 맞춘 상업적 창작 뮤지컬


▎뮤지컬 [베르테르]는 작곡가 정민선과 극본 고선웅, 연출가 김광보(현 국립극단 예술감독)가 호흡을 맞춰 탄생했다.
창작 뮤지컬은 2000년대 초반까지 민간 뮤지컬 제작사가 아닌 공공 예술단체가 주도해왔다. 그러다 보니 우리의 역사와 전통에서 소재를 찾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전통의 현대화, 한국적인 것의 세계화’ 또는 ‘황금만능주의를 향한 날카로운 비판’과 같이 강력한 슬로건과 메시지, 교훈을 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다. 해외 뮤지컬에 비해 상대적으로 음악이 약한 창작 뮤지컬에서 메시지를 앞세우다 보니 무겁고 지루한 작품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민간 뮤지컬 프로덕션들은 창작이 아닌 인지도 높은 라이선스 뮤지컬에 주력해왔다. 그러다 1995년 [명성황후]를 기점으로 창작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일어나면서 [사랑은 비를 타고], [쇼 코미디], [우리 집 식구는 아무도 못 말려], [스타가 될 거야] 등이 제작되었는데 경쾌한 코미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베르테르]는 이런 시점에서 탄생했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괴테의 고전이라는 외국 소재를 택함으로써 ‘우리 것의 현대화, 세계화’라는 메시지의 무게에서 자유로워졌고, 정통 드라마의 진지한 격조도 아울러 갖추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베르테르]의 성공은 2000년 이후 불어 닥친 뮤지컬 붐에 큰 영향을 미쳤다. 상업적 창작 뮤지컬의 대안을 제시한 것이다.

[베르테르]가 롱런하는 가장 큰 이유는 정민선이 작곡한 아름다운 음악 덕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내악 오케스트라가 들려주는 클래식한 현악기의 선율은 베르테르의 사랑과 아픔을 애절하게 담아낸다. 괴테의 원작을 재구성한 고선웅의 섬세한 극본과 어우러지면서 조금씩 파국을 향해 치닫는다. 창작 뮤지컬 가운데 최고의 음악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베르테르]를 선택할 것이다.

뮤지컬은 베르테르가 작고 아름다운 시골 마을 발하임으로 휴양차 오면서 시작된다. 마을에 도착한 첫날 베르테르는 운명의 여인 롯테를 만난다. 이때 집사가 부르는 곡이 ‘발하임은 낙원’이다. ‘사랑스러운 숲들, 햇살이 살살, 푸른 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아름다운 언덕. 누구라도 사랑에 빠지는 꿈같은 세상’이라고 자기 고장을 소개한다. 하지만 이 낙원이 베르테르에게는 곧 지옥으로 변한다. 그래서 이 곡에는 흥겨움 속에 슬픈 멜로디가 숨어 있다.

사랑이란 이따금 엇박자를 그린다. 사랑의 신 큐피드는 화살만 쏠 뿐 맞는 사람의 타이밍은 배려하지 않는다. 역사상 최고의 소프라노로 추앙받는 마리아 칼라스가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를 파티에서 처음 만났을 때, 그녀에게는 남편이 있었다. 칼라스는 남편을 버리고 선박왕에게 달려갔지만, 오나시스는 이미 딴 여자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존 F.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이었다. 오나시스는 천상의 목소리 대신 우아함과 미모를 택했다. 베르테르 역시 마찬가지다.

알베르트의 캐릭터 또한 베르테르를 미치게 한다. 사람이 정말 좋기(?) 때문이다. 젊고 유능한 법관으로 성실함과 냉철한 이성을 갖춘 인물이다. 얼굴도 잘생겼다. 남편 될 사람이 차라리 망나니였으면 어떻게 해 볼 여지가 생길 텐데 이건 정말 흠잡을 데 없는 신사라 도무지 명분이 없다. 베르테르로서는 참 답답한 상황이다.

아름다운 선율에 담은 가슴 아픈 사랑

여행을 떠난 알베르트는 곧 고향에 돌아와 롯테와 결혼식을 올릴 참이다. 사랑의 열병에 걸린 베르테르는 잠 못 이루고 롯테의 집 근처를 배회한다. 약혼자를 기다리는 롯테와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베르테르가 부르는 곡이 ‘하룻밤이 천년’이다. 서정적인 멜로디가 귀에 쏙쏙 박힌다.

‘하룻밤이 천년, 하룻밤 꿈이 만년. 그대를 만나고파, 긴긴밤 뜬눈으로 지새웠네’라고 롯테가 노래하면 '몽유병에 걸린 것처럼 그대에게 홀리어 이곳까지 와 버렸네'라며 베르테르는 탄식한다. 이어 둘이 함께 ‘하룻밤이 천년, 하룻밤 꿈이 만년. 그대를 만나고파 긴긴밤 뜬눈으로 지새웠네’를 반복한다. 물론 롯테의 ‘그대’는 알베르트이고, 베르테르의 ‘그대’는 롯테다.

알베르트가 여행에서 돌아오자 베르테르의 괴로움은 심해진다. 결국 롯테가 있는 발하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때 베르테르가 부르는 아리아가 ‘발길을 뗄 수 없으면’이다. 이 작품에서 가장 유명한 넘버다. ‘그대는 어쩌면 그렇게도, 해맑을 수 있는지. 당신의 그 미소만큼씩, 내 마음 납처럼 가라앉는데. 그대 어쩌면 그렇게도 눈부실 수 있는지. 당신 그 환한 빛만큼씩 내 마음엔 그림자가 지는데.’

롯테는 밝음의 영역에 있고 베르테르는 어둠의 영역에 있다. 서로 조우할 수 없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고통을 잊기 위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떼는 마음을 투명하게 표현했다.

이 무렵 베르테르가 친하게 지내던 하인 카인즈가 끔찍한 살인을 저지른다. 홀로된 주인마님을 사랑하던 순수한 카인즈는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을 해고한 마님의 오빠를 그만 살해한 것이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던진 카인즈의 모습에서 베르테르는 깊은 동질감을 느낀다. 자기 죽음을 예견하는 전주곡이다.

한편 롯테는 날로 폐인이 되어가는 베르테르의 소식을 들으면서 그의 마음을 알게 된다. 그에게 죄책감을 느끼며 ‘결혼한 여자, 한 남자의 아내인 여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가요. 용서받을 수는 있는 건가요. 부정하고 타락한 영혼을 구제하여 주실 건가요. 하느님…’이라며 방황한다. 이 사실을 눈치챈 알베르트는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베르테르에게서 위협을 느끼고 적대감에 타오른다. 그래서 베르테르가 열렬히 변호한 카인즈를 냉정하게 처형대에 세운다. 베르테르는 이 사건에 깊은 상처를 받는다.

어느 우울한 날, 베르테르는 마지막 호소를 하기 위해 롯테를 방문한다. 베르테르는 롯테에게 “왜 당신은 나의 마음을 그토록 외면하나요. 받아주세요. 제발”이라고 절규하지만, 롯테는 “예전 그대로 만나요. 다만 지나치지 않게”라고 답할 뿐이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짧은 입맞춤을 나누는 두 사람. 베르테르는 다시는 찾아오지 않겠다고 말하고 그녀의 곁을 떠난다.

다음날 베르테르는 여행을 간다며 알베르트의 총을 빌리고, 롯데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다. 베르테르의 운명이 종착역을 향해 거칠게 돌진하는 순간이다. 그날 밤, 베르테르는 자기 사랑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하여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탕!’하는 소리가 가슴에 꽂히며 혜성의 꼬리처럼 긴 여운을 남긴다. 공연이 끝나고 가슴이 먹먹해 바로 일어설 수 없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여기저기서 훌쩍대며 자리를 뜨지 못하는 관객이 많이 눈에 띄었다.

뮤지컬 팬덤 일으킨 ‘베르테르 모델’


▎뮤지컬 [베르테르]의 흥행은 외국 소재를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 붐을 일으켰다. 2016년에 초연한 [마타하리]도 그중 하나. 지난 5월 샤롯데씨어터에서 공연한 뮤지컬 [마타하리]. / 사진:EMK뮤지컬컴퍼니
[베르테르]는 2000년 초연 당시 소리소문없이 팬들을 끌어모았다. [명성황후]만큼 언론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높은 음악적 완성도를 바탕으로 열성 팬들의 사랑과 자발적인 지지를 끌어냈다. ‘베사모(베르테르를 사랑하는 모임)’이라는 팬클럽이 자생적으로 결성될 정도였다.

‘베사모’의 결성은 변화된 공연 문화의 한 단면을 보여준 사건이기도 했다. 이제 뮤지컬에서도 강력한 팬덤이 형성되었고, 입소문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인터넷이 보편화하면서 온라인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었고, 팬들의 자유로운 감상평과 의견이 흥행을 좌우하는 큰 변수가 되었다.

‘외국 고전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로 요약되는 ‘베르테르 모델’은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2010년을 전후해서 거세게 불기 시작했다. [셜록 홈즈](2011), [프랑켄슈타인](2014), [마타하리](2016), [마리 퀴리](2018) 등 외국 고전을 원작으로 한 창작 뮤지컬이 다투어 등장했다. 원작의 명성을 살릴 수 있고, 완성도 높은 이야기를 원재료로 공급받을 수 있다는 이점 덕분이었다.

창작 뮤지컬의 역사에서 해외 원작 뮤지컬 붐은 일단 발전적인 현상이다. 소재의 다양화를 위한 시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쉬운 점은 있다. 서양 이야기는 서양 사람들이 더 잘 가공할 수 있는 소재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콘텐트의 질이다. [베르테르]가 팬들의 사랑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아름다운 음악 덕분이었다. 혜성처럼 나타난 작곡가 정민선의 서정적인 음악이 스토리와 잘 어울렸기 때문이었다. 뮤지컬은 음악과 극본의 화학적 융합이 핵심이다.

2000년 초연 이후 리바이벌된 [베르테르]를 몇 차례 봤지만, 중극장 연강홀에서 행복하게 봤던 초연의 기억이 가장 아련하다. 대극장으로 규모가 커지면서 확대된 공간을 메우기 위해 연출가들의 머리만 아파졌던 것 같다.

※ 김형중 - 공연 칼럼니스트. 연세대와 동 대학원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20년 넘게 공연 담당 기자로 일했고 한국뮤지컬대상과 청룡영화상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무대예술의 경이로움을 글로 풀어내려고 애쓰고 있다. 쓴 책으로 [우리시대 최고의 뮤지컬 22]가 있다.

202212호 (2022.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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