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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31) 충북 옥천 환산(관산성·부소담악)에서 

 

여태까지 잘 지내온 친구는....
남은 인생 함께할 소중한 친구


우리 한국인의 고향 정서를 너무나 멋지게 표현한 정지용의 ‘향수’라는 시에 곡을 붙인 정겨운 노래를 들어본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배기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비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게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러/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 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성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 거리는 곳/ 그 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정지용의 옛이야기가 지줄대는 정겨운 고장, 고(故) 육영수 여사의 단아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충북 옥천(沃川). 그 옥천을 꼭 한번 가고 싶다는 생각이 오래 전부터 내 마음 속에 우지짖고 있었는데, 마침내 그 소원을 풀게 됐다. 이번 옥천 여행은 투박한 질그릇에 담긴 해장국처럼 구수하게 시작됐다. 옥천으로 가는 산악회 버스 안에서 인사를 나눈, 열정적인 후배분의 이야기에서 많은 감동과 여운을 느꼈다. 국문학과를 졸업했지만, 우연히 관상어를 알게 돼서 그 분야 최고 권위 박사 학위까지 받게 됐단다. 관상어 부화는 물론 수족관과 먹이 개발 등 관련 사업을 발전시켜 크게 성공했고, 요즘에는 해외여행을 다니며 멋지게 살고 있다고 했다. 부럽기도 했고, 멋져 보였다.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 산악회원들을 태운 버스는 그렇게 신입 회원님들의 인생 스토리를 싣고, 오전 11시 20분쯤 오늘의 등산 코스인 옥천 환산의 산기슭에 도착했다.

옥천 환산(環山)은 대한민국 100대 멋진 풍경으로 뽑힌 ‘부소담악’을 품은 어머니산이자 서기 554년 백제와 신라의 운명을 가른 관산성 전투가 피비린내 나게 펼쳐진 역사적 장소다. 험준한 산도 아니고, 부소담악과 정지용 시인, 육영수 여사 생가를 둘러보는 일정이라 가벼운 마음으로 왔지만, 막상 직접 올라보니 579m 높이의 환산은 결코 만만치 않은 산이었다. 산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시작된 급경사에 애를 먹었다. 깔딱 숨을 서너 번 넘기자 백제 성왕의 한이 서린 고리산(古利山, 환산의 옛이름) 노고성(老姑城) 옛 성터가 나타났다. 노고성은 돌로 쌓은 산성으로 외벽은 3m, 내벽은 0.4m, 폭 2.7m정도다. 남북 능선방향으로 치성(雉城, 성벽의 바깥으로 덧붙여서 쌓은 성)이 남아있는데, 북쪽 치성은 2.2m의 간격을 두고 2단으로 쌓았던 석축이라고 한다.


당시 관산성은 백제와 신라가 서로 차지하려던 요충지였다. 신라 김무력(金武力)에게 관산성(管山城)을 뺏긴 백제는 성왕의 아들 여창(餘昌)이 노고성을 쌓아 재탈환을 도모하려 했지만 과로로 쓰러진다. 성왕은 아들을 독려하기 위해 호위병만 이끌고 성을 오르다 길목을 지키고 있던 신라군에게 기습당해 생포된다. 성왕은 신라의 수도 경주로 끌려가 저잣거리에서 머리가 효수되는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백제는 절치부심 복수의 칼을 갈았고, 마침내 세월이 흘러 힘을 기른 백제는 보복에 성공한다. 김춘추가 애지중지하는 딸(고타소)과 그의 남편(품석)을 제거한 것이다. 수도인 경주마저 짓밟히자 생명의 위협을 느낀 김춘추는 외세인 당나라를 끌어 들인다. 지금 오르는 환산 주변에서 벌어진 관산성전투가 결국 삼국 통일의 도화선이 된 것이다.

환산 정상에 올라섰다. 피비린내 나는 관산성전투의 현장도 지금 이렇게 짙은 신록으로 덮여 가는데…한 맺힌 젊은 영혼들이 1500여 년이 지나서도 편안히 눈을 감지 못하고 있는 듯 산 정상은 붉은 황톳빛에 나무 한 그루 자라고 있지 않았다. 눈앞에 펼쳐진 옥천 땅을 바라 봤다. 이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가! 산을 오르며 이렇게 밀어주고 끌어주고, 오순도순 오이 한 조각, 사탕 한 알 나눠 먹으며 마음 편히 살 수는 없는 것일까? 더 이상 우리 역사에서 과거와 같은 어리석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기를 기원하며, 추억의 기념사진을 찍고 하산하기 시작했다.

하산 길도 만만치 않았다. 특히 8부 능선쯤은 급경사였다. 조심조심 밧줄을 잡고 내려오다 그만 발을 헛디뎠다. 순간 밧줄이 출렁이면서 늘어져 70도의 급경사 방향으로 엉덩방아를 찧고 넘어졌다. 이 무슨 봉변인가....다행히 바위가 아닌 푹신푹신한 나뭇잎으로 뒤덮인 흙길이었다. 그때까지 손에 꽉 붙들고 있던 밧줄을 끌어당겨, 가까스로 등산로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그런데, 머리에 있어야 할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저만치 30여 m 아래에 굴러 떨어져 있었다. 등산 모자는 많다. 집에 12개나 있다. 잠시 고민됐지만, 그래도 풀뿌리를 잡고 기어 내려가 마침내 왕관처럼 다시 내 머리에 올려놓았다. 특별한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우리네 인간관계처럼, 아마도 이 모자는 평생 내게 아주 특별한 모자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산을 완료한 시간은 오후 4시경, 배가 고프고 몸도 피곤했다. 적당한 곳에 큰 비닐을 깔고 육회와 송어, 김치 등 갖은 재료를 넣고, 어제 시골에서 갓 짜온 참기름도 듬뿍 뿌렸다. 시장기가 더해진 그 시각, 우리들이 맛본 그 맛은 인간이 맛볼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었다. 그렇게 배부름의 즐거움을 간직한 채, 어쩌면 정지용도 꿈엔들 잊지 못할 명소인 부소담악 구경길에 나섰다.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 무서운 천하대장군의 형상은 어디가고, 평범하고 인간적 모습을 한 장승이 우리를 맞이했다. 탐스럽게 무리지어 있던 수국도 우리 일행을 환영해줬다.

부소담악은 옥천군 군북면 추소리 부소무니 마을 앞 호반에 암봉들이 700m 가량 병풍처럼 펼쳐져 장관을 이루고 있다. 이 암봉들이 보여주는 파노라마는 세계 그 어디에서도 쉽게 볼 수 없는 품경으로, 곳곳에 운치와 멋이 살아 숨 쉬고 있었다. 부소담악은 부소무니 마을 앞 물 위에 떠있는 산이라는 의미로, 2008년 국토해양부가 전국의 하천·호수·계곡·폭포 등 한국을 대표할만한 아름다운 하천 100곳 중 하나로 선정했다. 부소담악 능선부에 세운 정자인 추소정에 오르자 용이 호수 위를 미끄러지듯 나아가는 듯 하다는 그 멋진 형상이 선명하게 보였다. 고요함 속에 아름다운 그 풍경을 오랫동안 바라보다보니 내 마음 속에도 어느덧 평화가 찾아왔다.

어쩌면 이곳도 태곳적에는 어느 높은 산의 평범한 뿌리였거나 바닥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세월이 흘러 물길이 나고, 씻기고 닳아 지금의 모습이 됐을 것이다. 지금은 딱 아름다운 저 모습이지만, 그 언제가 비바람과 물결에 의해 이것 또한 흔적 없이 사라질 것이다. 그렇게 그렇게 이 우주와 바위와 인간은 설계돼 있고, 모든 살아있는 것은 언젠가 사라질 뿐임을 내게 일깨워주는 듯 했다. 그래서 더더욱 나에게 주어진 ‘오늘’이라는 이 선물을 아름답게, 멋지게, 소중히, 열심히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부소담악 구경을 마치자 해님이 오늘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듯, 어둠의 친구들을 내려 보냈다. 일정이 늦어져 너무나 가고 싶었던 정지용 시인 생가와 육영수 여사 생가는 방문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렇게 계획과 다르게 흘러가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것이 여행의 진짜 맛일 것이다.

밤 9시 넘어 서울 양재역 근처 해장국집에 도착했다. “남 의식하지 않고 오롯이 내 스스로 즐기고, 좋은 공기 마시며 몸도 건강해지고, 덤으로 외롭지 않고 치매 걸릴 염려도 없는 우리 산악회 모임이 최고”라고 부르짖으며 늦은 저녁을 친구들과 함께 마음껏 즐겼다. 요즘 자주 듣는 건배사 중 ‘여친! 남친!’이 있다. ‘여태까지 친하게 잘 지냈으니 남은 생도 친하게~’ 그런 의미라고 한다. 등산 모임도 그렇다. 여기에서 만난 친구들은 남은 인생도 산에서 함께할 소중한 친구들이다. 그러고 보면 등산은 우리에게 행복과 건강을 선사하기 위한 신이 내려 주신 최고의 선물이 아닐까!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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