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주산성과 권율 장군의 리더십
1593년 2월 12일 새벽 3만여 명의 왜군이 고양 덕양산(125m) 행주산성을 겹겹이 에워쌌다. 방어에 나선 2300여 조선 군사들은 성벽 위에서 화살과 신기전, 현자총통을 쏘아대며 응전했다. 성안에 있던 백성들도 돌덩이를 던지고 뜨거운 물을 성벽 아래로 쏟아 부으며 죽기를 각오하고 싸웠다. 그렇게 아침부터 저녁까지 세 차례 일진일퇴의 혈전이 벌어졌다.

왜군은 정공법으로는 행주산성을 쉽게 뚫을 수 없다고 봤는지 주변 산에서 갈대를 가져다 묶은 뒤 불을 질렀다. 불은 삽시간에 목책까지 활활 타올랐지만, 성안에 있는 남녀노소 모두 혼연일체 합심해 불을 끄는 데 성공한다. 그 혼란한 틈을 타 승려군이 지키고 있던 산성 서북쪽을 왜군이 밀고 들어오자 성 안은 삽시간에 아비규환 아수라장이 돼버린다.

그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권율 장군이 나섰다. 허리에 찬 긴 칼을 뽑아들고 번개같이 선두로 나서 왜군의 목을 추풍낙엽처럼 날려버리니 조선군의 사기는 다시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갔다. 지휘관과 병사들이 합심해 적군 목 130여 구를 허공에 날려버리자 왜군은 퇴각하기 시작한다. 딱 하루 동안 벌어진 이날 전투로 왜군은 무려 1만여 명의 사상자를 냈다. 조선군은 몇 백 명의 사상자를 내는 데 그쳤다. 권율 장군은 행주산성 지역이 협소해 오래 끌다가는 자칫 봉쇄될 위협이 있었기에 왜군이 퇴각하자 곧바로 산성을 비우고 부대를 파주로 이동시켰다.

이날 행주산성 싸움으로 승기를 잡은 조선은 임진왜란 와중에서 한양을 수복하고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다. 민병대 수준의 전투력으로, 왜군 정예병을 상대로 대승을 거둬 전쟁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꿔 버렸으니 기적에 가까운 승리였다. 세계 전쟁사에 남을만한 대승을 거둔 이 전투가 바로 행주대첩이다. 한산대첩, 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여름의 한날, 나는 덕양산 행주산성 정상에 있는 기념탑 앞에 섰다. 조형물에 담긴 역사의 기록들을 꼼꼼히 읽어내려갔다.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서 목숨을 걸고 나라를 지킨 2300여 명 선조들의 모습이 가슴에 파노라마치기 시작했다. 전투를 승리로 이끈 권율 장군이 진정으로 존경스러워졌다. 후세인들이 행주대첩의 승리요인을 꼽았는데, 첫째, 권율 장군의 뛰어난 전략과 전술. 둘째, 신기전과 현자총통 등 과학적 신무기 사용. 셋째, 민관과 승병, 부녀자들 모두 목숨을 각오한 혼연일체의 단합심. 넷째, 행주산성이라는 천혜의 지리·자연적 조건을 탁월하게 활용한 덕분이었다고 한다.

실제 권율 장군은 뛰어난 전략가였다. 1592년(선조 25년) 7월 8일 대둔산 기슭 이치(梨峙)에서 왜적을 격멸한 권율은 12월 수원 독산성(禿山城)에서 다시 적을 물리친 뒤 한양 수복작전을 개시한다. 정병 2300명을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 덕양산(德陽山) 행주산성에 진을 치고 한양 수복을 노리고 있었다. 조선군 2300명에 왜군은 3만여 명으로, 중과부적의 싸움이기에 도저히 싸움이 안 된다고 판단한 권율은 삼국시대부터 토성이 축적돼 있고, 방어에 유리한 행주산성에 방어 진지를 구축한다. 뛰어난 판단력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왜군 장수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는 수적으로 열세인 조선군을 얕잡아보고는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의 장수들과 함께 3만여 명의 병력을 앞세워 행주산성에 대한 총공격을 감행한다. 하지만 그 결과는 무참한 패배였다. 권율 장군의 지도력이 행주산성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권율(權慄, 1537~1599년)은 46세 아주 늦은 나이에 문과에 합격했지만, 능력이 탁월해 바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전라도 순찰사, 조선군 총사령관 대장까지 오른다. 어진 가문의 전통에 따라 인격과 학문의 깊이가 깊었고, 사람들을 통솔할 때는 온화하고 사랑으로 대했다고 한다. 자기 욕심만 채우지 않고 남을 배려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위급한 때를 당해서도 권율 장군을 따라 목숨을 바쳐 힘껏 싸웠다고 한다. 장군의 탁월한 리더십에 마음이 숙연해지면서 과연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내 자신을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이 됐다.

행주산성 정상에 오랫동안 서서 눈앞의 풍경을 바라봤다. 더없이 맑은 하늘과 온갖 녹색으로 뒤덮인 대자연이 내 앞에 있었다. 세상이 아름답고 평온해 보였다. 참으로 이 땅을 지켜낸 조상들에게 감사하다. 이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다시는 외세에 짓밟히지 않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나도 모르게 두 주먹이 굵게 쥐어졌다. 유심히 살펴보니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은 북한산과 함께 수도 서울의 전략적 요충지이자 천혜의 방어지였다. 북동쪽으로는 병풍처럼 북한산이 우뚝 솟아있었고, 바로 앞에는 봉수대가 있었다는 개화산이 지척이었다. 강변북로와 올림픽대로에서는 차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넓고 푸른 한강은 유유히 서해로 흘러가고 있었다. 남산과 안산, 인왕산, 관악산… 그리고 휘황찬란한 마천루의 고층빌딩들이 숲을 이루며 한 눈에 들어왔다.

아름다운 대자연과 수도 서울을 마음에 담고 서쪽 방향 토성을 밟으며 하산하기 시작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아담한 크기의 나무들과 부드러운 토성길이 내 마음을 행복하게 만들었다. 특히 문화관광해설사님이 들려주는 행주산성에 얽힌 비화들이 귀를 쫑긋 세우게 만들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행주대첩(산성)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 휘하의 남편을 따라 올라온 전라도 아낙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날라 싸웠다고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해설사가 들려준 이야기는 달랐다. 행주 기씨의 시조가 덕양산 바위 위에서 태어났고, 살구나무가 많아 살구나무(幸)에 고을(州)이라고 해서 행주산성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행주 기씨(幸州 奇氏)는 행주와 덕양산 일대에서 대대로 살아왔는데, 고려시대 공녀에서 원나라의 황후가 된 기황후도 이 지역 출신이라고 한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날의 영광을 재현하듯 행주산성 정상 위에 보름달이 밝게 떴다. 깊은 달을 품은 한국의 ‘달 항아리’는 세계적 명품의 반열로 올라 값을 헤아릴 수 없다고 한다. 아마도 한국인의 한과 얼이 배어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오늘 보는 보름달은 참으로 애잔하고 가슴시리도록 곱다. 달빛에 스치며 흐르는 행주산성이 참 아름답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