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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35) 충북 제천 금수산 능강계곡 얼음골에서 

 

청풍명월의 삶, 인생을 사는 지혜가 거기에 있었다

아침 일찍부터 달려온 빨간 버스가 산기슭에 접어선지 채 10분도 안 되어 영국 솔즈베리 평원에 있는 고대 거석 기념물 스톤헨지 같은 예사롭지 않은 돌탑이 등산길 양쪽으로 펼쳐졌다. 그렇다. 이 신령스런 금수산에 신화나 전설 하나가 없겠는가! 사연은 이렇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도회지에서 살던 40대 중반의 한 평범한 여인이 무슨 병인지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고 한다. 백방으로 약을 써도 차도가 없자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요양을 위해 찾아든 곳이 바로 이곳 금수산 능강계곡 얼음골이었다. 먹고 살기 위해 오두막 주위 야산을 개간하기 시작했는데, 돌덩이가 끝도 없이 나와 골칫덩어리 애물단지였다고 한다. 그러다 우연히 TV에서 방영된 진안 마이산의 멋진 돌탑을 보고 강한 전율을 느꼈다고 한다. 그 뒤부터 산을 개간하며 나온 돌덩이들로 탑을 쌓았다. 하루 하루 정성과 사랑, 혼이 들어가자 상상하지 못한 예술작품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탑이 지금 100개가 넘고, 앞으로도 계속 쌓을 것이라고 한다. 그날 참으로 운 좋게 그 석축가, 아니 예술가를 만났다. 실제 나이는 60대 중반. 작고 가냘픈 몸매였지만 어딘가 모르게 강단지고 나이에 비해 젊어 보였다. 애물단지 돌덩이를 예술로 승화시켜 능강계곡의 전설을 새롭게 써 내려가고 있는 수수한 아낙네의 그 염화미소. 세상만사 모든 고뇌와 번뇌를 해탈한 살아있는 부처님처럼 보였다.


그렇게 한 작품, 한 작품을 눈에 담은 후 아름드리나무로 울창한 숲길에 들어섰다. 갑자기 서늘한 향기가 온몸을 감쌌다. ‘얼음골’로 잘 알려진 충북 제천 금수산(1016m) 서북쪽 8부 능선의 한양지(寒陽地)에서 발원한, 하얀 속살처럼 투명한 물살들이 함박웃음을 머금고 굽이굽이 춤을 추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지축을 흔들며 충주호로 무섭게 내달리고 있었다. 마침, 전날 장맛비가 많이 내려 오동통통 풍만해진 물살들이 녹음방초 우거진 청솔 숲 사이를 신나게 미끄러지면서 우아한 활강 곡예를 펼쳤다. 마치 선남선녀가 거추장스런 모든 것들을 훌훌 벗어 던지고 한바탕 멋들어지게 사랑춤을 추면서 번뇌를 잊어버리는 해탈식 같았다.

금수강산 이 땅에 어디 하나 멋있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지만, 능강계곡 이곳에도 풍광이 빼어난 9곳을 능강구곡(綾江九曲)이라 이름 짓고 부잣집 도련님들과 이름난 선비들이 꽃 같은 여인들과 시를 짓고 춤을 추며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충주댐 수몰로 이설 도로를 개설하면서 용주폭 위에 능강교가 개설되고, 충주댐 만수 때는 일부가 수몰되어 예전의 경승은 반감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절경이었다.

능강계곡을 흐르는 물을 한참 동안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금수산 한양지의 4㎞ 계곡 양편으로 단애가 연달아 이어져 급류로 흘렀다. 물의 처지에서 보자면, 골짜기마다 옥 같은 맑은 물이 좋아서 날뛰는 것이 아니라 급경사에 정신없이 흐르니 현기증이 날 판이었다. 계곡을 굽이굽이 돌 때마다 묵중한 바위에 부딪히면서 내는 그 파열음은 기실 물이 아픔에 겨워 비명을 지르는 것인데, 인간 족속들은 그것을 보고 절경이니 어쩌니, 자연의 신비로운 조화에 감탄을 금할 길이 없다며 남의 속도 모르고 참으로 환장하게 애간장을 다 녹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쩌랴! 내 눈에도, 그 절경이 아름다워 여기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무릉도원이 아닌가 눈을 비비고 보고 있으니…

계곡을 위로 거슬러 올라가자 능강구곡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왔다. 한 구곡, 한 구곡 각각의 오묘한 풍경이 아름다워 한참 동안을 넋을 잃고 바라다봤다. 능강구곡은 천년을 살고 막 하늘로 승천하려는 이무기가 인간들에게 후회 없이 잘 살고 가는 법을 가르쳐주는 것 같은, 마법의 교육장이자 지혜의 거울과도 같았다. 세상을 살다 간 이무기가 승천하기 전에 들려주는 그 지혜가 꿈결처럼 들려왔다.


제 1곡 쌍벽담(雙璧潭)[두 절벽이 있는 연못]- 깨달음, 해탈의 방

이 어리석은 중생들아! 당신이 지금 걱정하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시 여러 작은 물질분자들이 신비롭고 불가사의하게 뭉쳐진 짧게는 1분, 길게는 100년도 못 되어 다시 사라지고 없어질 신기루, 우주에 떠도는 먼지들이 아니더냐!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인생이란 그렇고 그렇게 정답이 없고 허우적대다가 허망하게 가는 법… 너무 집착하거나 소유하지 말고 저 금수산 능강계곡의 물처럼, 네 마음 가는대로 숨결 따라 그저 담백하고 유쾌하게 즐겁게 살다 가라고 가르치신다.

제2곡 몽유담(夢遊潭)[꿈에 노니는 연못]- 꿈과 이상의 방

그렇다고 인생이 저 물이나 돌처럼 생명이 없는 허망한 것만이 아니니 큰 꿈과 이상을 품고 살아라. 이왕 태어났으니 아무 쓸 데 없는 제도나 문서에 얽매이지 말고 남의 눈도 의식하지 말고, 꼭 너 다운 의미와 가치를 담아 이 넓은 우주에 보람되고 창조적인 그 뭔가를 하나라도 이루며 가거라! 그 어떤 장애물이 너의 앞을 막더라도… 그렇게 최선을 다하여 살다 가는 것이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난 소명이자 의무 가치라고 가르치신다.

제3곡 와운폭(臥雲瀑)[구름이 누어서 흘러가는 듯 한 폭포] -철학과 낭만의 방

만약에, 이 세상을 만든 진짜 조물주가 있다면 어찌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작은 틀에 가두어 평생 일만하다 사라지게 만들었겠느냐? 낭만이란 거창한 게 아니다. 지금의 일상에서 조금만 벗어나 조금씩만 여유롭게 시간을 할애해서 저 구름이 흘러가는 사연을 듣고, 저 하늘의 달과 찐한 연애도 해 보고, 쏟아지는 별빛을 먹으면서 아득한 우주도 꿈꾸어 보고, 산과 들과 파도가 속삭이는 자연의 감미로운 소리를 들어보렴. 오묘한 우주와 자연의 근원, 철학의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그렇게 살라고 조물주는 생명을, 인간을 만들었다고 가르치신다.


제4곡 관주폭(貫珠瀑)[구슬을 꿴 듯 한 폭포, 일명 관주폭포] -부자의 방

잊지 말아라! 인간은 유기체이기에 날마다 에너지를 얻지 못하면 순식간에 공(空)으로 사라져 버린다는 것을. 아무리 양반이라도 사흘을 굶으면 모든 학식과 인격이 달아나 버리고 사나운 맹수가 되어 버리는 법칙을… 그래서 돈은 최대한 정직하게 많이 벌어야 한다. 돈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행복과 즐거움을 선사해 준다. 돈은 평생 자기 결정권을 유지하며, 내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와,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하지 않을 자유를 준다. 그러니 내가 일을 못하더라도 굶어 죽지 않고 품위가 떨어지지 않을 만큼의 큰 돈을 쌓거나 아니면 매달 끊임없이 샘솟는 생명의 원천, 돈샘을 만들어라. 돈의 속성을 이해하고 깨달아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품위 있고 멋지게 살라 가르치신다.

제5곡 용주폭(龍珠瀑)[절구방아 찧는 듯 한 구슬의 폭포수]- 사랑과 우정의 방

아! 꿈결 같았던 그 사랑으로 나는 다시 돌아가련다! 가슴에 새겨진 그 눈동자. 이 세상에 태어나 단 한 번 진실로 반했던 그 황홀한 밤의 꿈결 같은 사랑. 사랑하기에, 너무 사랑하기에 떠나야만 하는 줄 알고 바보같이 떠나보냈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 버렸다. 이 세상 모든 것보다 지고지순한 그 사랑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것을… 아! 꿈결 같았던 그 사랑으로 나는 다시 돌아가련다. 떠나간 그 님을, 그 친구를 생각하며, 진한 사랑과 우정을 쟁취하고 속삭여라! 그러면 삶이 절대 공허하지 않고 아름다운 향기가 날 것이다. 조선 최고 자유사상가 허균은 “남녀 간의 사랑은 하늘이 준 것이고, 남녀유별의 윤리와 기강을 분별하는 일은 성인의 가르침이다. 하늘은 성인보다 높으니 차라리 성인의 가르침을 어길지언정 하늘이 준 본성을 거스를 수는 없다”고 했다. 남녀 간 사랑은 하늘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고, 우정은 무섭고 외로운 깜깜한 밤에 등불과도 같다. 그러니 소중한 선물과 등불을 마음껏 활용하고 즐겨라. 그게 진정한 최고의 행복이고 무병장수의 지름길이라고 가르치신다.

제6곡 금병대(錦屛臺)[병풍으로 두른 듯 한 자연대석]-좌절과 실패의 방

수천 도의 온도에서 달구어지고 수많은 담금질을 해야 철이 강해지듯 사람도 더 크고 큰일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좌절과 실패, 고통과 아픔의 시련이 선행되는 법이라고 2300년 전 맹자는 설파했다. “고통으로 인하여 죽지 않았다면 그 사람은 그만큼 성숙해진 것이다.” 200년 전 니체는 그 원리를 깨닫고 이같이 말했다. 무릇 실패와 좌절은 눈에 보이지 않은 인생의 오묘한 진리와 운명을 깨닫고, 진정한 나를 성숙시키기 위한 감사한 선물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당당히 받아들이고 즐겨라! 우주는 생로병사와 희로애락의 법칙이 적용되니 참혹한 좌절과 실패의 고난의 시간에도 용기와 희망을 잃지 않고 부단히 인내하고 노력하면 반드시 내일은 찬란한 태양이 뜨는 법이 세상의 이치라고 가르치신다.


제7곡 연자탑(燕子塔)[제비가 날아갈 듯 한 형상의 기암]- 도전과 여행의 방

너는 저 하늘을 나는 새처럼 도전하고 여행을 하며 살아라! 어차피 100년도 못 사는 삶. 도전하고 여행하여 대한민국을 넘고 세계를 넘어 구석구석 자연의 신비와 오묘함을 감상하고 체험하여 남보다 10배, 100배 많이 보고 느끼고 깨달아 값지고 멋지게 살아라! 어차피 인간은 죽을 때 10원짜리 하나 가져갈 수 없지만, 나의 소중한 체험과 경험과 도전은 땅속 깊은 곳에서도 추억되며 너와 함께 영원히 살리라고 가르치신다.

제8곡 만당암(晩塘岩) [수십 명이 너럭바위에 앉아 시를 짓는 명소]- 진리와 지혜의 방

만물의 영장이 동물처럼 본능과 욕구대로만 산다면 어찌 인간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세상 심오한 진리와 지혜, 과학을 연구하고 체험하여 세상에 아름다운 향기를 남기고 가는 것이 고상하고 멋진 삶이 아니겠는가! 어쩌면 그 길로 가는 유일한 지름길은 책과 공부밖에 없다. 책에는 한 인간이 평생을 걸쳐 연구하고 경험한 지혜와 지식이 함축되어 있다. 책은 이 세상의 최고의 발명품이자 인류 발전의 바이블이며, 그 속에 모든 진리와 지혜, 자유와 행복, 네가 나아가야 할 길이 담겨 있다. 책을 읽지 않는 성인을 여태껏 보지 못했다. 그러니 치매 예방 차원에서라도 죽을 때까지 책을 사랑하며 읽으라 가르치신다.

제9곡은 취적대(翠滴臺)[푸른 물방울이 떨어지는 넓적한 바위]-무병장수 건강의 방

건강하기 위해서는 지켜야 할 것이 있다. 무해한 활성탄소와 찌꺼기를 몸속에 남기지 않기 위해 소식(小食)하라. 오장육부 등 모든 장기가 원활하게 작동하고 면역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골고루 영양가 있는 음식을 제시간에 맞춰 섭취하라. 그리고 충분히 숙면을 취해야 한다. 꾸준히 운동하고,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피로를 줄이며 사는 것이 무병장수의 길이다. 이 세상을 다 주어도 건강보다 소중한 게 없으니 건강을 최우선으로 여기며 살라고 가르치신다.


이렇게 능강구곡의 수업이 끝났다. 인생이란 이렇게 살아도 헛되고, 저렇게 살아도 허망함이 끝이 없지만 그래도 이런 9가지를 생각하며 살면 조금은 보람되고 후회 없는 삶이 아닐까 생각한다며 말하고 이무기가 긴 날개를 펼치더니 용으로 승천하여 하늘 높이 날아갔다.....무더운 여름날 무릉도원에서 잠깐 사색의 꿈을 꾸고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덧 얼음골 정상에 도착해 있었다. 얼음골은 금수산 서북쪽 정상 9.8부 능선 돌무더기 그 안에 있었다. 얼음골 석실에 앉자 ‘여기까지 오느라고 얼마나 고생하고 살기가 얼마나 힘드시냐’며 어여쁜 금수산 선녀가 얼음찜질해 주듯 참으로 부드럽고 선선했다.

60평생, 참 많고 많은 산을 다녔는데, 양반가 부잣집 막내아들 같은 삶이랄까! 풍류와 멋, 청풍명월이 처음부터 끝까지 편안하게 살아 숨 쉬는 무릉도원은 처음이었다. 시원하고 편안한 안빈낙도의 산, 그렇게 꿈꾸고 바라는 삶이 거기에 있었다. 정말 즐겁고 행복한 산행이었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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