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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범의 등산미학(37) 경기도 가평 칼봉산 경반계곡에서 

 

원시림 정글에서 스틱의 중요성을 실감하다

어쩌면 저 너머에 오늘의 목적지인 수락폭포가 있을 것도 같았다. 물속을 낮은 포복으로 기어서 3m가 넘는 가시넝쿨 터널을 뚫고 마침내 계곡 정상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벅찼다. 온힘을 다해 달려왔으니 내 눈 앞에는 새 세상이 펼쳐져 있으리라!

그런데 아뿔싸~ 눈을 떠보니 지금 내 눈 앞은 정글이나 다름없는 원시림이었다. 계곡물에 반쯤 잠긴 하얀 새의 사체에선 지금 막 빠져나온 영혼이 영롱한 검은색 호랑나비로 변신해 마지막 작별의 입맞춤이라도 하는 듯 파란 광채로 번쩍였다. 또 다른 한쪽에선 맹독을 품은 살모사가 똬리를 틀고는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허락도 없이 오느냐는 듯 어리석은 나그네를 보고 날름날름 혀를 내밀고 있었다. 어리석은 중생은 그대로 넋이 빠진 채 힘없이 사방을 둘러봤다.

칡넝쿨과 가시넝쿨이 겹겹이 둘러싼 고립무원의 원시세계였다. 방금 들어온 가시넝쿨 터널로 다시 빠져나갈 수 있을지 머리를 밀어 넣어봤다. 오호 통재라! 몸뚱이가 옴짝달싹 못할 정도로 비좁은 공간이었다. 내 몰골을 훑어봤다. 천만다행으로 등산화를 신고 긴 바지에 긴 윗옷을 입고, 날카로운 창이자 몽둥이로 쓸 수 있는 스틱이 양손에 쥐어져 있었다.

순간 나도 모르는 힘이 어디서 나왔는지 강한 자신감이 샘솟았다. 그렇다. 지금 이 산에서 어떤 날짐승이나 악마가 나타나더라도 한방에 때려잡을 이 무기가 내 양손에 쥐어져 있지 않은가 말이다. 팔을 뻗어 첨단무기인 긴 스틱을 독사를 향해 힘차게 겨눴다. 그제야 살모사가 바위 뒤로 급하게 숨는다. 내친 김에 스틱으로 뱀이 숨은 바위를 강하게 내리쳤다. 상황이 역전되자 뱀이 꼬리를 내리고 줄행랑을 쳤다. 나는 스틱을 휘둘러 칡넝쿨 가시덤불을 내려치면서 그렇게 한발 한발 온힘을 다해 걸음아 날 살려라 원시림을 빠져 나왔다.


산 능선을 타고 내려오면서 퍼뜩 이런 생각이 들었다. 참으로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만약 내가 슬리퍼에 반바지, 반팔 티셔츠만 입은 상태에서 이 스틱조차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한 생각에 온몸이 떨려왔다. 아마도 내 몸은 공포와 겁에 질려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을 것이다. 조금 전 본 하얀 새의 사체가 계속 아른거리고 독사가 혀를 날름거리며 나를 응시하던 모습이 머릿속에서 잊히지 않았다. 그 독사가 나를 공격하기라도 했다면 나는 꽁지를 하늘로 쳐들고 머리통을 땅속에 숨기는 까투리처럼 맥없이 주저앉아 물리고 말았으리라. 그러면 서서히 힘을 잃고 쓰려져 끝내 산짐승의 밥이 될 수도 있었다. 아니 생존본능으로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독사와 싸웠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가시에 찔려 유혈이 낭자하게 되더라도 초인적 힘을 발휘해 독사를 해치우고 내 생명을 보전했을 가능성도 있었다. 어찌 됐건 방금 전 돌발 상황은 갑자기 위기나 어려움에 처했을 때 사람이 가지는 용기와 마음가짐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게 해줬다. 그리고는 준비 없는 등산과 경거망동이 얼마나 큰 화를 부를 수 있는지, 내가 오늘 얼마나 어리석은 행동을 했는지를 반성했다.


오늘 우리는 경기도 가평군 연인산(1068m)과 칼봉(900m), 매봉(929m)등 여러 봉우리를 탐험 중이었다. 연인산은 경기도 도립공원으로 지정된 큰 산으로, 특히 용추계곡은 경기도 최고의 계곡 중 하나로 손꼽힌다. 칼봉은 명지산 남쪽능선에 솟은 매봉의 동쪽 봉우리 중 가장 높다. 주능선이 칼날처럼 날카로워 칼봉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계곡 입구에 있는 용추폭포와 골짜기 안의 수락폭포가 특히 유명한데, 더덕과 산나물이 많이 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연인산과 칼봉은 높고 깊은 산이기에 자칫 길을 잃으면 울창한 숲속에서 뱀과 멧돼지, 오소리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을 들은 터였다. 이에 우리는 처음 계획했던 계곡 코스로만 등반하기로 했고, 똘똘 뭉쳐 등산장비를 짊어지고 백패킹으로 산행을 했다. 힘찬 연어처럼 야생의 물살을 거슬러 오르면서 때론 계곡 물에 미끄러지는 곡예를 하면서도 장애물을 하나 하나 넘어가며 정복하는 그 쾌감은 여름날 백패킹에서만 느낄 수 있는 최고 별미 중 별미였다. 하지만 어느새 백팩킹의 짜릿함과 황홀경에 너무 젖어 버렸을까? 무언가에 홀린 듯 우리 다섯 명의 대원은 지름길로 빨리 가려는 욕심에 그만 목적지와 방향이 다른 계곡으로 들어서버리고 말았다. 어리석었던 나는 오늘 등산의 정상부인 수락폭포에 먼저 도착해 멋진 사진을 많이 찍으려는 욕심에 그만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앞만 보고 내달렸다가 오직 정글의 법칙만이 존재하는 야생의 세계에 깊숙이 몸을 내던지고 말았던 것이다.


오늘 사선을 넘어 살아온 생생한 체험과 경험은, 아무리 내가 좋아하는 등산이지만, 방심하면 언제 어디서 길을 잃을지 모르고, 심지어 목숨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것을 뼈저리게 실감하는 기회가 됐다. 덤으로 나를 보호하고 자신감을 강화하기 위해 등산장비를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것, 특히 귀찮아 잘 들고 다니지 않았던 스틱이 어쩌면 만능 병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몸으로 깨달았다. 그리고 등산할 때는 안전화와 생수, 비상식량을 반드시 챙겨야 한다는 것도 가슴 깊이 새기게 됐다.

정신을 차리고 휴대폰을 열어보니 위험의 순간을 빠져나와 상념에 젖었던 시간이 아주 긴 것 같았는데, 겨우 1시간 정도 지났을 뿐이었다. 안전한 등산로로 접어들자 나를 기다리는 동료들에게 빨리 가서 무사함을 알리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닫고 빠른 걸음으로 수락폭포로 달려갔다. 이미 수락폭포를 감상하고 식사까지 마친 동료들은 나를 보고는 “나머지 네 사람은 어디 두고 혼자만 오느냐”고 타박했다. 눈앞이 캄캄해졌다. 혹시 나머지 네 사람도 그 죽음의 계곡에서 나처럼 헤매고 있는 것이 아닐까? 순간 휴대폰이 울리고 내 생존에 감격해 하는 등반 모임 총무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사정을 들어보니 나와 함께 방향을 잡은 네 사람은 금방 길을 잘못 들어섰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산이 무너져라 내 이름을 불렀다고 한다. 하지만 계곡이 구불구불한 데다 폭포 소리에 묻혀 그 목소리들이 내 귀에 전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 네 명은 그 멋진 수락폭포도 보지 못한 채 애타게 나와 헤어진 계곡 아래에서 기다렸다고 한다. 감동이 몰아치면서 눈물이 났다. 진정으로 미안하고 고마웠다.


동료들이 남겨둔 점심과 막걸리를 게 눈 감추듯 맛있게 먹고, 우여곡절 끝에 오늘의 목적지인 연인산, 칼봉, 매봉을 두루 거쳐 장관을 이루며 낙하하는 수락폭포 아래 섰다. 경반천과 경반리를 거쳐 보납산 부근에서 가평천과 합류하기 위해 약 5㎞를 달린 계곡물이 곳곳에 소(沼)를 이루고 있었다. 그렇게 4시간여 만에 도착한 수락폭포는 한마디로 굉장했다. 폭포를 이루는 물줄기 높이가 33m에 이르는데, 떨어지는 모습이 장관이었고, 소리도 엄청났다. 폭포 아래에서 위를 올려다보니 하늘로 뚫린 듯한 바위굴 같은 골짜기가 산 정상까지 이어져 있었다. 볼수록 생기 있고 우렁차다. 그렇구나! 이 멋진 폭포가 내 마음속에서 영원히 지워지지 않으려고 오늘 그 많은 우여곡절과 살 떨림이 있었구나. 그렇게 영원히 잊지 못할 정글 탐험기를 가슴에 남기며 경반계곡 백패킹 산행을 무사히 마쳤다.

우리 등반대원들은 산을 내려와 다함께 모여 6시간에 걸쳐 산행한 오늘의 등반을 자축하며 감자탕집에서 멋지게 또 회포를 풀었다. 어쩌면 우리를 위기에서 구해줄 진정한 인생의 스틱은 언제나 마음과 정이 통하고 든든한 산악회 식구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했다. 등반 동료들과 헤어져 집에 오자마자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내 몸을 자세히 관찰해 보니 손발이 갈라 터지고, 손톱에는 검은 때가 잔득 묻고, 속옷도 흙탕물에 벌겋게 젖어 있었다. 아마도 어제, 그 위험천만한 위기에서 나의 이기적 유전자가 생존을 위해 비상모드로 변신해 죽기 살기로 죽음과 싸운 듯 했다. 내 몸아! 참 고생했다. 애 많이 썼다. 고맙다!


※필자 소개: 김희범(한국유지보수협동조합 이사장)- 40대 후반 대기업에서 명예퇴직. 전혀 다른 분야인 유지보수협동조합을 창업해 운영 중인 11년 차 기업인. 잃어버린 낭만과 꿈을 찾고 워라밸 균형 잡힌 삶을 위해 등산·독서·글쓰기 등의 취미와 도전을 즐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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